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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가 모이는 밤

살의가 모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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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5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406g | 128*188*23mm
ISBN13 9791189770273
ISBN10 11897702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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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아무도 없지만 무대에서 필사적으로 외치는 배우처럼 몸부림치는 내가 불쌍했는지, 환한 번개 불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방 안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 p.10

사람들은 나를 살인마…… 그것도 대량 살인마라고 할 거야.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평범한 대학생에 지나지 않았던 내가 B급 스플래터 무비 못지않은 사이코 킬러……라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야. 무슨 살인 중독자도 아니고. 다시 말하지만, 그건 모두 사고였어.
--- p.12

친구를 이 별장까지 데려다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폭풍우로 인한 산사태로 산을 내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구와 이 별장에 하루 묵게 되었는데, 밤이 되어 어떤 사람(X라고 해 두자.)에게 습격을 당했다. 나까지 죽이려고 해서 저항하다가 얼떨결에 X를 죽이고 말았다, 라고. 그러니까 죽은 여섯 명 중 한 사람에 관해서만 내 범행을 인정하면 된다. 그것도 정당방위로 말이다.
--- p.16

나는 욕을 한 바가지 해 주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고 입을 다물었다. 소노코는 이런 년이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완곡한 협박, 논리 바꿔치기, 장대 높이 뛰기 수준의 비약, 울면서 정색하기 등, 상대의 반론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년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는 사람과의 말싸움이라면 나 역시 누구한테도 쉽게 지지 않지만, 무식하고 끈질긴 소노코는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다는 걸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 p.26

나도 전에는 학생답게 가정 교사 알바 같은 걸 했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의 전통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지인 중에서도 물장사 쪽 알바를 하는 여학생이나 남학생이 꽤 많이 있다. 나는 꼭 몸을 파는 일이 아니라도 그렇게 ‘성’을 상품화하는 일은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게다가 그런 알바를 하는 애들을 보면 꼭 돈 좀 있는 아저씨들을 이용해 먹는다. 있는 데서는 갖은 아양을 다 떨면서 뒤에서는 헐뜯고 욕한다. 나는 그런 위선적인 모습도 싫었다.
--- p.30

‘일’이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모두 자존심을 조금씩 잘라 팔며 먹고사는 것이다. 회사원도 상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비굴하게 복종해야 한다. 술집에서 자신의 취향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엉큼한 손님의 비위를 맞춰 가며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 상품화다 뭐다 하며 이상하게 과장된 윤리 도덕 따위로 비하하는 소리를 들으며 폄하당할 이유는 없다.
--- p.31

정말, 남자들은 왜들 그 모양이지? 아무리 못생긴 여자라도 일단 건드려 보고 싶어 하는 그 정신 구조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니까. 뭐, 그냥 호기심일 수는 있겠지. 무서운 영화 같은 거 보고 싶은 심리하고 비슷한 것일 수도 있고.
--- p.44

여자가 말을 끝낼 틈도 없이 남자는 사정없이 꽃병을 두 번, 세 번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아니, 본인은 머리를 노렸겠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맞은 건 미모로가 놓친 최초의 일격뿐이었던 것 같다. 나머지는 빗나가서, 맞아도 토모에의 팔에 상처만 냈다.
--- p.72

고통스러운 죽은 이의 표정은 누구의 것이라도 험악하다고 생각하며 미모로는 또 다른 시체로 시선을 돌렸다. 젊은 여자였다. 아마도 토모에보다 열 살은 더 젊어 보였다. 이쪽은 제대로 옷을 입고 있었다. 침대 곁에 옆으로 누워 있는 그 시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기가 상당히 세 보이는, 독한 느낌의 인상이었지만 이목구비가 잘 갖추어진 보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p.137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한 그는, 넘치는 기세로 쓰러져 있는 ‘아기 할아버지’의 시체를 발로 차며 밀어붙였다. 노인의 시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나 보다. 온몸을 휘감고 있는 피의 냄새가 공포와 광기를 증폭시켰는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내 목을 계속 졸랐다. 나는 이러다 죽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냥 정신이 없었다.
--- p.206

누가 보면 폭풍우 속 별장 안에서 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일곱 구의 시체에 손을 댄다고 놀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참는 데 한계를 느꼈다. 내 방으로 가서 샤워를 하기로 했다. 물론 소노코의 시체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 욕실을 사용하는 건 더 불쾌했다.
--- p.253

지옥에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 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이오스미의 망령은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온 것처럼 흠뻑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내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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