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빚을 진 상태였는데, 그 이유로 일본은 우리나라의 일에 계속 관여를 했던 거지. 이에 분노했던 국민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빚을 갚으려 한 사건이 있는데, 이 일을 ‘국채보상운동’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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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는 대개 양반집 딸이나 양반의 아내, 왕족 중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렸어.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기생을 주인공으로 한 신윤복의 미인도는 유명세를 타기에 충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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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기 쓰기는 정말 좋은 습관이야. 하루를 돌아보고 글로 정리하는 습관은 정서에도 좋고, 글쓰기 실력을 기르는 데도 큰 도움을 주거든! 조선시대, 이 좋은 습관이 몸에 밴 왕이 있었어. 그 주인공은 바로 정조야.
--- p.44
아주 오래전에는 별자리를 신으로 삼으며 숭배했었어. 북두칠성도 신과 같은 존재였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북두칠성을 신으로 표현한 그림이 문화유산으로 전해지기 때문이야.
--- p.60
첨성대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우주와 관련되어 있단다. 첨성대는 우주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만든 ‘천문 관측대’야. 첨성대를 통해 언제 계절이 변하고, 언제 비가 오고 햇살이 밝은지 알게 되었지.
--- p.93
고인돌은 세계 곳곳에 있지만, 특히 우리나라에 많이 있어. 세계의 고인돌 중 반 이상인 1만 5000개에서 2만여 개가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니, 정말 놀랍지?
--- p.96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1400년대에 정착해 지금까지 대가 이어지고 있어. 그래서 현재 안동 하회마을은 주민의 70퍼센트 이상이 풍산 류씨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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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은 강제로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버린단다. 이름까지 ‘창경원’으로 바꾸며 우리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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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어. 바로 사람이 금천교를 지날 때, 금천교 아래에 흐르는 물이 사람에게 있는 잡귀를 잡아먹어서 궁궐과 왕을 지킨다는 이야기야.
--- p.131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게. 행주대첩 당시, 행주치마(부엌일을 할 때 두르는 앞치마)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 p.137
‘제주도’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니? 푸른 바다, 해녀, 귤, 흑돼지, 말… 정말 다양한 것들이 떠오르지? 그중에서도 제주도의 대표적인 상징인 이것을 빼놓을 수 없지! 바로 마을의 수호신, 돌하르방이야.
--- p.147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금동 대향로에 묻은 진흙들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어. 그러자 오랜 시간 땅 속에 감춰져 있던 향로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났어. 무려 1400년 이상의 긴 시간을 버틴 백제 금동 대향로가 드디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거야.
--- p.154
절이나 마을 입구 앞에 세워 놓고 장승의 몸통에 ‘악귀가 오지 않기를’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기도 해. 장승이 대부분 무섭게 생긴 이유도 악귀를 내쫓기 위해서지.
--- p.160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어. 하지만 고려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기술인 ‘상감 기법’을 개발하면서 훨씬 더 아름다운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어.
--- p.164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겨울에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 없었지. 가진 것이 별로 없던 농민들은 초겨울에 김장을 한 다음, 겨울 내내 김치를 먹으며 버텼던 거야.
--- p.170
고려시대에는 봉수를 네 개로 만들어 위험도를 4단계로 정했단다. 불을 하나만 피우면 문제없는 것, 적이 보이면 두 개, 적이 고려의 땅을 밟으면 세 개, 적과 고려군이 부딪치면 네 개를 피우는 것으로 정했어.
--- p.177
조선시대에 왕이 일본으로 보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조선통신사’라고 불러.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하는 일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조선과 일본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어.
--- p.185
옛날 사람들은 물과 바람, 햇빛 등으로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골라냈지. ‘명당’이라고 불리는 좋은 땅에 선조의 무덤을 만들어야 후손들이 잘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 p.190
옛날에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해녀로 뛰어든 사람들이 많았어. 그런 점에서 해녀는 ‘강인한 여성’의 상징이 되기도 했지.
--- p.198
우리나라는 화약의 발명과 수입이 늦었던 만큼 활과 화살을 주요한 무기 중 하나로 사용했어. 이는 곧 궁술이라는 무예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신라시대에는 궁술로만 인재를 선별할 정도로 활쏘기를 중요시했단다.
--- p.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