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무늬로 어두움을 채웠던 동산의 30년
양돌규 _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여러 노조사들을 뒤적이다가 보면 백 개의 노동조합 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잘 나가는 노동조합은 한 개가 있을까 말까 한 정도다. 아니 차라리 없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물론 어느 노동조합이든 빛나는 조합원들의 단결, 눈부신 파업 투쟁의 낮과 밤, 사측과의 후회 없는 한 판 싸움, 인간다움에 감격하던 순간들, 가족처럼 진하게 부둥켜 안은 공동체의 향연들, 그래, 그런 것들도 있기는 하다. 언뜻 본 것도 같고, 잠깐씩 도래했다 사라지는 그 짧은 순간의 환희가 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영원토록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영광은 한순간이고 훨씬 오랜 시간을 채우는 건 심연 같은 어두움이다. 어느 노동조합이나 다 부침이 있고, 탄압에 스러져 신음하던 시절이 있으며, 내부의 배신, 조합원들 간의 반목, 분열과 상처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세대 교체도 일어나고 역사에 대해서도 착각과 망각, 단절과 계승이 교차하기도 한다.
동산의료원노동조합도 그랬다. 투쟁 속보나 유인물 같은 노조의 자료를 찾아 읽으면서 그 투박하고 날이 선 문장들 사이에 긴 한숨, 눈물, 하염 없이 길어지는 농성장 로비 바닥의 냉기 같은 게 느껴졌고 쓸쓸하고 처연한 간부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1987년 노동조합 결성 이후 짧게 빛났던 노조의 전성기가 있었지만 1991년 29일 파업 이후 29명의 해고자가 발생하고 손배가압류의 덫에 걸렸다. 이후에도 10여 년 넘게 길고 긴 시간동안 동산의료원노동조합은 빛보다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간을 꽤 오래 걸었던 것 같다. 춥고 긴 겨울이 지배하는 어느 북국(北國)에 도래한 따뜻하고 짧았던 아침, 그리고 훨씬 오랜 시간 하늘을 뒤덮은 어두움의 시간처럼 말이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신기한 점은, 이렇게 큰 어려움을 겪는 노조 치고는 굉장히 끈질기게 버티는 근성 같은 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합원 숫자는 400명에서 600명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줄어든 만큼 늘어났고 늘어난 만큼 줄어들었다. 탄압의 기억 때문인지 파업 투쟁 같은 적극적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의리를 져버리는 조합원들도 아니었다. ‘노조 탄압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동산의료원에 이처럼 꾸준하고 뚝심 있는 조합원들이 있었기에 30년 역사, 그 어두움을 오로라 같은 다채로운 무늬로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 어두움을 굳이 일컬어 보자면 암흑 같은 어두움이라기보다는 밝은 밤, ‘백야白夜’라고 해두고 싶다.
우리나라에 30년 노동조합 역사를 가진 곳이 많지는 않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전후로 만들어진 노동조합 중에 아직 유지되고 있는 곳이 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자료를 이만큼이라도 갖고 있는 노조는 더욱 드물다. 오랫동안 귀중한 자료를 간직하고 또 그것을 일일이 다 스캔해서 넘겨주신 권금자 선배 덕택에 동산의료원노조 30년사는 쓰일 수 있었다. 그 자료를 엮어서 총 7권 분량의, 말하자면 사초가 되는 자료집을 만들었다. 또 자료집으로 묶지는 않았지만 이후 의료연대 대경본부 활동자료집에 담겨 있는 동산의료원지부, 분회의 자료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텍스트 자료는 글자일 뿐이다. 글자 뒤의 맥락과 저간의 사정, 노조 내부의 분위기라든가 뒷 이야기는 초대 이상춘 위원장을 비롯해서 동산에서 활동했던 분들의 구술 인터뷰를 통해서 파악했고 녹취를 여러 차례 들으면서 숙지했다.
노동조합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조합원이고, 동산의료원 역시도 그러했다. 동산의료원 30년사의 주인공으로 조합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런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 글쓴이의 부족함을 탓해 주시되 행간에서 조합원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 주시기를 요청드린다.
지난 여름, 그러니까 2021년, 구술 인터뷰를 받기 위해 대구에 내려갔다가 청라언덕에 오른 적이 있다. 창궐한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지역 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 동산의료원의 노동자들이 매일같이 방호복을 입고 구슬땀을 흘리는 현장, 동산병원이 내려다 보였다. 오늘 날 멋들어지게 새로 지은 성서 병원의 영광 뒤에는 이 같은 노동자들의 봉사와 헌신의 시간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안다. 역병과 병독이 아무리 독해도 종국에는 물러가고 이겨낼 것을 우리는 안다.
마찬가지로 길고 힘겨웠던 어두움의 시간은 가고 다시금 노동조합이 조합원 곁에 자리 잡고, 조합원이 자부심 꽉 찬 노동조합의 주인이 되는 시간은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30년사를 넘어 40년사, 50년사를 쓰게 될 때는 뒷 부분 10년, 20년의 분량이 환희의 시간으로 채워졌으면, 밝고 희망찬 문장으로 가득찼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앞날에는 남국(南國)의 따뜻한 햇빛이 드리우기를, 그 안온함으로 노동조합이 꽃피우기를 기대해 본다.
2022년 4월 19일
---「책머리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