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를 감지한다. 그 차이점들을 극복하려면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2천 년도 더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도 그와 비슷한 의지를 보이는가? 이는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며, 지성만큼이나 겸손과 인내도 요구된다. 우리와 성경 당시 사회 사이의 역사적 거리를 가로지르는 일은 어렵다. 많은 점에서 현대 독자들은 고대 성경 문화 속 사람들보다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그저 같은 수영장의 다른 구역들을 헤엄치면서, ‘고대 세계’라는 바다는 상상만 할 뿐이다. 우리가 성경의 배경인 고대 지중해 지역 세계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은 상당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경의 고대 사회들은,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동아시아의 문화와 비슷한 점이 많다.
---「서론」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성경을 그 자체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경 본문만 있을 뿐 성경 저자의 세계를 직접 파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성경과 비슷하면서도 우리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성경의 원래 독자들에게 중요했던 관심사나 주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 ‘명예-수치 문화’란 사람들이 명예-수치의 역학에 대해 고조된 민감성을 갖고 있는 환경을 말한다. 사실, 명예-수치 관점의 요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명예와 수치는 인간의 경험 속에 내재되어 있다. 문화마다 패턴이 다를 뿐이다. 전통적인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 사이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명예-수치의 관점에는 최소한 세 가지의 특징적 강조점이 있다. 이 문화들은 전통, 관계, 위계질서를 특별히 강조한다. 이 세 요소가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 또는 ‘체면’을 결정한다.
---「1장 동양의 눈으로 읽는 법」중에서
바울은 명예와 수치에 대해 정확한 감수성을 나타낸다. 바울은 로마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지만(롬 1:10; 15:23), 바울과 로마 교인들이 공통으로 아는 친구들은 몇몇 있다(롬 16:3-23). 이러한 요소들이 바울의 소통 방식에 영향을 준다. 바울은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만큼, 간접적인 소통 방식을 선호한다. 고대 지중해 문화는 오늘날의 동아시아 문화처럼, 일반적으로 ‘고(高)-맥락’ 문화로 인식된다. 실제로 이는 이 문화의 사람들이 간접적인 소통에 능숙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정보를 항상 명시적으로 전달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상황을 통해 “행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를 ‘액자형’ 편지로 보면, 로마서의 목적에 빛을 비춰 주는 생각의 갈래들을 연결할 수 있다.
---「2장 바울의 선교가 그의 메시지의 틀이다」중에서
명예와 수치는 그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느낌이 아니다. 무엇이 명예와 수치에 합당한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명예와 수치는 한 사람의 객관적 가치를 표현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종종 명예와 수치가 마치 객관적인 법과는 대조되는 상대적인 개념인 것처럼 오해한다. 문화들 사이에 명예와 수치에 대한 상반되는 관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 자체가 모든 인류에게 변하지 않는 기준이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명예와 수치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로마서 1:18-32에서 죄에 대한 바울의 강조는 전통적인 서양 신학과 다르다. ‘죄’는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수치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높게 여기는 것이다(롬 12:3과 비교하라). 이 단락 어느 곳에서도 ‘율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인간의 문제를 말할 때, 바울은 그 대신 명예-수치의 언어를 사용한다.
---「3장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중에서
집단적 정체성은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바울이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다루는 로마서 2-3장에서 특히 더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바울의 논증은 고대 유대교의 민족중심주의/국수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문화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은 부득이하게 온 세상을 내부자와 외부자로 나눈다. 바울에게 이런 행동이 내포하는 신학적 함의는 반역적이다. 이것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왕으로 통치하시는 세상을 ‘식민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가 세상의 진정한 왕이라는 것이다(롬 1:1-4).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이 믿음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족속과 방언에 대해 왕으로서 권위를 행사하신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특정 사회 집단에 더 깊이 연관시킬 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다.
---「4장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는 것」중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명예를 위협하는가? 인류가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는데도 부끄럽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가진 이들조차 그분을 욕되게 한다. 이러한 환경은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창 12:3; 18:18; 22:18). 하나님이 어떻게 죽음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열국을 복 주실 수 있는가? 둘째, 하나님은 세상을 복 주시는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해서 포로로 잡혀갔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롬 2:23-24).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복의 통로로 합당하지 않은 종이다. 셋째, 유대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반대했다.
---「5장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면을 살리신다」중에서
우리가 칭의를 ‘개인화’하여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지가 주요 관심이 된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그리스도의 백성을 분열시키는 조건들이 미묘하게 조성된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 관계가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사회적 정체성에서의 본질적 변화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구슬 한 자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익하고 도움이 되지만 필수적이지는 않은 자원봉사 단체가 될 것이다. 혈통, 사회적 계급, 국적 등에 대한 기본적 충성을 바꿔야 한다는 근본적인 도전은 받지 않을 것이다. 칭의는 구원만큼이나 사회적 정체성에도 관여한다. 만약 신자들의 근본적 집단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들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복음은 위기에 처해 있다.
---「6장 누가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중에서
복음을 제시할 때 어떤 이들은 부활보다 개인의 평안과 저 세상에서의 구원을 강조한다. 이들은 신실하게 고난을 견디도록 동기 부여를 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을 본질적으로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설명하는 자기 보호에 가장 강력하게 호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본적 소망이 고통에서 개인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고난을 자랑할 수 없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에서 수치당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롬 4:25). 진정한 영광과 명예는 고통의 부재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구원은 단순한 안락이 아니라 성품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 목적이 경건한 성품과 정결해진 소망이다. 신자들이 이러한 명예와 수치의 관점을 가질 때 삶은 실제적으로 변화된다.
---「8장 수치를 통해 영광을 바라는 것」중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행동 기준을 강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수치심을 사용해 왔다. 산업화 이전의 런던에서, 정부 기관은 범법자를 처벌하고 악행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채찍질과 고문을 사용했다. 오늘날, 방법은 다르지만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관행 자체는 여전히 흔하다.…수치를 주겠다는 협박은 강력한 억제력을 발휘한다. 역사 속에서 이 방법이 계속해서 사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이 수치 당하기를 두려워한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증거한다. 권력자들은 이 두려움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조종한다. 그렇다면, 과연 수치가 선한 목적을 위해 정당하게 사용될 수 있을까?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수치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마서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절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주 상기시켜 준다.…‘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 반응과 두려움이 아니라 죄의 객관적 결과다.
---「10장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중에서
바울은 공공의 선에 기여하는 선행을 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한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이 그저 사적인 영성을 가진 도덕적 시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의 권면은 지역 관료들이 신자의 선행을 칭찬하리라는 분명한 기대를 전제한다. 이는 그런 선행이 공적인 것이며 그래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의미다. 공적인 기부를 통해, 신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할 것이다. 사회적 사역은 복음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때문에,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존중과 사랑의 표현으로서 사회적 사역에 관여해야 한다(롬 13:7-10).…사람들이 권위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그 권위자가 그리스도이든 지방 관료이든, 그들이 명예롭게 또는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황제의 백성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11장 서로 존경하라」중에서
하나됨은 똑같은 확신을 가질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되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어떤 사람은 틀렸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사람들은 성경과 자신의 양심을 혼동하여, 자신에게 죄인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죄가 아닐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셋째, 바울은 획일성과 하나됨을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이 위험은 아마도 강한 집단주의적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질 것이다. 전통, 예식, 규율들은 외적인 순응을 가져오고 하나됨이 존재한다는 인상을 준다. 공동체는 순응하지 않는 자들에게 수치를 안긴다. 로마서 12:3-8과 14:1-9 같은 본문들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을 위한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조화를 측정하는 데 자신이 속한 집단을 사용한다. 그러한 제한된 관점은 진정한 하나됨을 평가하고 성취하는 능력을 억제한다.…문화적 구분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에 기초가 될 수 없다.
---「12장 ‘조화로운 사회’로서의 교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