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20세기 북한의 정치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는 비록 한반도의 절반이지만 북쪽에 사는 북한 사람들을 거의 반세기 동안 통치함으로써, 한반도의 분단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아마 조선 왕조 말기를 포함해서 금세기의 한반도 지도자들 가운데 김일성만큼 한반도의 현대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일성은 일생을 힘차게 살았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 식민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20세의 청년으로 일찍이 항일 투쟁에 나선 그는 결단코 일본인들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았고, 초지일관 일본의 제국주의에 무력으로 대항했다.독립 운동을 할 당시에 조선의 독립 투사들이 흔히 그랬듯이, 김일성도 나라 밖에서 외국 사람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일본군의 만주 침략 이후 만주 일대를 근거지로 중국인들, 러시아인들과 함께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조선이 해방되는 날까지 무장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의 혹한과 굶주림, 배신자들의 밀고와 일본 토벌대의 무자비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그 막강한 일본군에 맞섰던 것이다. 그의 항일 유격대가 결국 일본군에 쫓겨서 소련의 연해주로 피신하게 되었지만, 그 곳에서도 김일성은 소련군의 훈련을 받으면서 대일 투쟁을 계속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으로 조선의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할되고 소련군이 북반부를 점령하게 되자, 김일성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일약 북한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이때부터 1994년 7월 사망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일인 독재의 철권으로 북한을 다스려 왔다. 그는 국가의 주석이었을 뿐 아니라, 전 한민족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천만 북한인들의 수령으로서 그들의 생각과 삶을 지도했다. 김일성은 해방된 조국에 공산 국가를 세우기 위해 사회주의 정치 체제를 수립하고, 분단된 조선을 통일하기 위해 남침 전쟁도 감행하였다.
또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정적들을 철저하게 숙청하기도 했다. 자기 나름대로의 정치 사상을 만들어 내며,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외세를 배제해서 북한을 자주적인 나라로, 민족적 정체성이 잘 보존된 나라로 꾸미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은 이 과업이 당대에 끝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장남 김정일을 후계자로 세워서 대를 이어 완수하도록 조치했다.
아시아의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서, 김일성은 자기의 업적에 관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선집〉, 〈저작선집〉, 〈저작집〉 등을 모두 합하면 50권이 넘는다. 김일성은 북한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는 물론, 아주 구체적인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러나 사적인 기록은 별로 남기지 못했다.
그가 80이 된 해, 즉 1992년부터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집필했는데 1994년까지 2년 동안 모두 다섯 권이 출판되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2주 전에 제5권이 나왔고, 제6권은 사후 7개월이 지난 1995년 2월에 세상에 소개되었다. 생전에 발간된 다섯 권의 회고록에는 김일성의 가족적 배경, 자신의 출생과 소년 시절, 그리고 빨치산으로 활약했던 1936년까지의 상세한 사연들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해 왔던 혁명 역사와 그 줄거리가 어긋나지 않게 씌어졌다. 김일성이 최고의 항일 유격전으로 자랑하는 보천보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1937년을 회고하는 제6권에 등장한다.
그런데 사후에 출판된 제6권은 이미 김일성의 술회를 바탕으로 한 것 같지 않다. 1937년은 김일성이 한창 무장 투쟁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이고, 이른바 공비의 두목으로 만주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를 회상하면서 벌써 김정일을 우상화하려는 흔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아들 김정일이 출생 전임은 말할 것도 없을뿐더러, 김일성이 장래의 처 김정숙과 결혼도 하지 않았었다.
논리적으로 죽은 김일성의 회고록이 앞으로 더 나올 수 없지만, 계속 출판된다고 하더라도 제6권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회고록다운 회고록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 김일성은 80이 넘는 생애 중 겨우 25년 정도를 되돌아보는 데 그쳤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행적에 관해 사적인 기록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1940년대 초 하바로프스크에서의 야영 시절, 해방과 귀국 후의 활동, 북한(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의 성립 과정, 한국 전쟁, 북한에서의 파벌 투쟁, 중·소 분쟁시 북한의 입장, 주체사상의 창안과 발전 과정, 후계자 결정과 당 내부의 갈등 등 지난 반세기 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에 관해 김일성이 직접 하고 싶은 말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희망이나 포부, 과오에 대한 자아 비판이라든지 아쉬웠던 일들을 회고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김일성의 업적들, 예컨대 정부와 당·군의 창설이나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친 정책은 다수 공표된 바 있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폐쇄성 때문에 김일성의 증언 없이 과거 50년에 걸친 그의 고투와 통치 궤적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김일성은 과연 어떤 나라를 만들고자 했는가? 자신이 마음 속에 설계했던 나라와 현재 한반도의 북쪽에 있는 북한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 그가 시도했던 정책들 중에서 어떤 것이 성공하고 어떤 것들이 실패로 끝났는가? 장남 김정일은 정권의 후계자로서 북한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김일성의 뜻을 이어받아 부친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대를 이어 수행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김일성이 꾀하지 못한 일들을 아들이 추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들인가?
--- 서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