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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전기

김일성 전기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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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23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690g | 153*224*30mm
ISBN13 9788946073791
ISBN10 8946073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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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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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도 알 수 있겠지만 우리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김성주의 운명은 그때도 특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성주는 소득이 비교적 높은 망명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외국에서 외국어로 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외국 문화와 외국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다. 가족에게서 정치 이야기도 자주 들었을 것이다. 그의 부모는 서양 문명의 개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었다. 이 모든 것은 김성주의 성격이나, 그의 매우 예외적이며 흥미로운 운명의 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장 망명자의 아들」중에서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에 의병장 김일성과 김현충의 활동은 확실히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다 덜 알려져 있는 동명이인의 활동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김성주는 아마 자신이 바로 도시전설의 김일성과 닮아 보이도록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金日成(태양이 된다)’이라고 쓰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김영주가 아버지 김형직이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고 증언한 것을 보면 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제2장 중국공산당 유격대에서」중에서

북한 정권 수립 전에 사망한 사람 외에 대부분의 제88여단 조선인들은 북한의 고위 간부가 되었다. 제88여단에서 중대장이었던 최용진은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까지 올라갔다. 최현 소대장은 나중에 인민무력부장이 되었고, 박성철 분대장은 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북한에서 높은 간부가 된 제88여단 출신자들의 총목록을 매겨본다면 20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전부 남자였다고 강조해야 한다. 김일성은 이 시대의 대부분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을 낮춰 보았다.
---「제3장 붉은 군대의 대위」중에서

김일성 평생 가장 중요한 시기는 1945년 가을이었다. 대대장에 불과했던 그는 바로 이 시기 하루아침에 북조선의 수령이 되었다. 1945년 소련의 영향권은 급격히 확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련은 위성국가가 2개밖에 없었다. 몽골과 투바였는데, 투바는 1944년 소련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소련은 사할린 섬의 남반부, 쿠릴 열도와 동프로이센 일부를 합병했으며 붉은 군대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만주를 점령했다. 소련은 독일, 오스트리아, 조선에 점령지가 생겼다. 전 세계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북조선은 스탈린 전리품의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제4장 모스크바에서 임명된 낙하산 수령」중에서

1945년 10월 14일은 맑은 날이었다. 이날 평양 모란봉 근처에는 큰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언덕 위에는 소련 병사들이 급하게 만든 대(臺)가 있었고 연설자를 위한 강단(講壇)이 있었다. 강단 위 벤치에는 치스탸코프, 레베데프, 로마넨코 등 소련군 주요 장군들과 조만식, 박정애를 비롯한 조선인이 앉아 있었다. 통역은 미하일 강 소령이 맡았다. 강단과 벤치 뒤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커다란 초상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 강단에 김일성은 없었다. 소련군의 시나리오에 따라 ‘민족적 영웅 김일성 장군’은 인민 앞에 갑자기 등장해야 했다. 그는 강단 아래 공간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다.
---「제5장 새로운 시작」중에서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했다. 김일성은 ‘해방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시민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는 아직 평양에서 서울로 출발하지 않도록 했다. 대신 김일성은 서울을 통치하기 위해 리승엽을 파견했다. 서울 함락 후 북한군은 남진(南進)을 계속하기는커녕 서울에서 ‘해방’ 경축 행사를 했다. 최용건 민족보위상도 사흘 동안 경축행사를 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제6장 김일성의 전쟁」중에서

숙청들은 계속되었다.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은 박헌영을 각각의 형법 규정에 따라 3중의 사형과 전체 재산 몰수형에 처했다. 해당 자료와 증언들을 보면 재판 기간 박헌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인민재판이 희비극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무죄라는 것이 재판에 반영될 수 있게 노력했다. 박헌영은 이 재판이 사실상 김일성이 지시해 이뤄지는 그에 대한 제거 작전이라는 것을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다. 박헌영은 혹시나 그에 대한 고소가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닐까도 살펴보려 했다. 전 조선공산당 당수는 인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가 설마 부정재판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제7장 수령의 적들」중에서

결과적으로 북한 야권이 결국 실패한 이유는 리상조의 결단력 부족이었다. 리 대사는 흐루쇼프에게 김일성을 해임해달라고 직접 요청할 용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대사는 소련공산당 앞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제기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 같다. 한편으로 리상조는 나라가 운명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일성을 해임하지 않으면 리 대사나 그의 동지들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미래가 고통과 암흑일 것이었다. 그러나 대사는 이 모든 일이 혁명 동지 사이에서 벌어진 오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 아닙니까? 그는 혁명가 아닙니까? 그는 동지에게 비판을 받으면 실수를 이해하고 고치지 않겠습니까?
---「제8장 결정적 전투」중에서

1957년 8월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4분의 1 정도가 숙청당한 것을 보면 1958~59년의 대숙청 규모를 인식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최고인민회의 보궐선거를 하도록 결정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선거를 언론매체에 절대 언급하지 않도록 했다. 아마도 숙청 규모를 숨기기 위한 결정으로 보인다. 1959년 7월 19일 진행된 이 선거에서는 약 120만 명 참가자 중 14명만 반대투표를 했다. 이 14명은 북한 역사상 마지막 반대투표자가 되었다. 이후 모든 북한 선거들의 결과는 ‘100.0% 찬성표’였다. 필자가 이 책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중앙선거와 지방선거 모두 예외는 없었다.
---「제9장 최후의 승리」중에서

김일성의 계획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첫째, 그는 새로운 전쟁에 대한 꿈을 꾼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1955년에도 이승만은 북진 멸공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이승만이나 김일성 모두 새로운 전쟁은 일으킬 수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소련은 김일성에게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북한의 상황이 바뀌었고 김일성은 소련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둘째, 김일성은 이미 전쟁을 일으켜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그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은 갑자기 생긴 평화사상 때문이 아니라 승리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김일성은 전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10장 제2차 한국전쟁을 준비하며」중에서

이 사건들 중 첫 번째이면서 아마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민군은 정예 특공대를 훈련시켰다. 국군 군복을 입은 특공대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1968년 1월 21일 서울 청운동까지 들어갔다. 거기서 한국 경찰관 최규식 총경은 특공대를 가로막고 검문에 들어갔다. 의심이 많았던 최 총경이 총을 빼들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최규식 총경은 순국했고 대부분의 특공대 대원들도 사살 당했다. 그중 한 명만 포로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탈출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다시 돌아간 박재경은 이후 인민군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고, 포로 김신조는 남한의 평범한 주민으로 계속 살면서 회고록도 썼다. 둘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제11장 쇄국의 시대, 주체사상 그리고 남한 습격」중에서

1967년 김일성은 진짜 전체주의 제도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신질서의 이름은 유일사상체계(唯一思想體系)라고 했다. 무시무시한 이 표현은 이제 나라의 모든 행동이 김일성 사상을 무조건 따라야 할 것이며, 김일성 사상과 모순된 사상은 물론 김일성 사상과 관계없는 사상 역시 모두 금지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유일사상체계는 전체주의 선포였다. 김일성은 이 표현을 1967년 3월 처음 언급했고 1956년부터 발생한 모든 일의 결과가 바로 이 체계의 설립이라고 덧붙였다.
---「제12장 유일사상체계」중에서

1974년 2월 김성애와 김정일의 싸움은 김정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2월 16일 김정일은 33살이 되었고 아버지는 그때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성도 33살이 되던 1945년 북한 지도자가 되었다.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는 김정일을 아버지의 후계자로 추대했고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이 자리 위로는 김일성 총비서 자리밖에 없었다. 개인 면담을 통해 김성애는 아직도 자신은 중요한 인물이고 김정일이 김일성 아들인 것만큼 자기 아들이라고도 강조했지만 너무 늦었다. 2월 전원회의 이후 북한 매체에서 김성애에 대한 언급들은 줄어들었고 결국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제13장 총비서 동지와 그의 세자」중에서

그러나 자신의 두 눈으로 사회주의권 붕괴를 지켜본 김정일은 나라에 필요한 본질적인 개혁은 추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버지에 대한 숭배를 더욱 강화하도록 결정했다. 김일성의 주석궁은 수령의 능(陵)이 되었다. 북한 매체는 이 ‘금수산기념궁전’이 ‘수령의 영생위업’을 위하여 어떻게 화려한 건물이 되었는지를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김일성의 미라가 있는 외재궁(外梓宮)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기 전 북한은 사진사들에게 그렇게 많은 불편을 주었던 수령의 혹을 시신에서 제거했다.
---「제14장 죽은 수령의 강력한 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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