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가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이가 많다. 우리나라 첫 번째 신부라는 사실은 알지만,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200년 전,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김대건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을까? 어떻게 조선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으며, 왜 사제 서품 1년 1개월 만에 순교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그리고 한국 천주교에서는 왜 김대건 신부를 모든 성직자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것일까?
--- p.12
“인부因父, 급자及子, 급성신지명及聖神之名. 아맹亞孟.”
낮은 목소리로 정하상이 읊조리자 맞은편에서 김제준도 따라 했다.
당시 천주교의 기본적인 기도문인 ‘성호경聖號經’과 3대 기도문인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비롯한 모든 기도문은 1838년 「텬쥬성교공과(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가 출간될 때까지 번역이 안 되어 있었다. 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해서 사용하려면 주교의 승인(인준)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문 기도문을 한글로 읽고 암송했고,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은 유식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 p.83
당시 북경에서 마카오를 가는 최적의 경로는 물길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륙 지역인 서만자 출신의 안내인들은 물길을 두려워했다. 그런 까닭에 조선 신학생들은 육로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경에서 마카오까지는 대략 1만 리(4,000km),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하루 25킬로미터씩 걸어도 5개월이 걸리는 거리였다. … 1837년 6월 7일, 마침내 세 명의 조선 신학생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한양을 출발한 지 6개월 만이었다. 만주에서 북경을 거쳐 남쪽으로 중국 대륙을 종단하는 9천 리(3, 600km) 길을 걷는 사이에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 p.204~207
그림에도 소질이 있던 김대건은 연필로 지도를 그려보기도 했다. 지도에 꾸준히 관심을 보이던 그는 훗날 사제가 되어 조선에 입국한 뒤에 후임 선교사들을 위해 매우 자세한 조선 지도를 모사해서 마카오로 보냈다. 이때 김대건이 모사한 지도는 그가 순교한 뒤에 15명의 선교사가 백령도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가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을 때 조정에서는 그의 짐에서 나온 지도를 보고 영국에서 제작한 그 세계지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것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 p.227
리브와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는 앵베르 주교에게 편지를 써서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 (김대건) 안드레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늘 위통, 두통, 요통을 앓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한 두통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 그의 머리털은 회색, 흰색, 누런색, 거의 온갖 색깔입니다. 저는 지금껏 이렇게 지저분한 머리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열여덟 살 청년의 머리를 백발로 변하게 했지만, 학업 문제는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조금씩 해결되었다.
--- p.234, 237
1839년 초, 조선에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었다. … 결국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 세 사제는 순교의 길을 걸었으며, 그 외에도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과 최양업의 부모 역시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마카오 극동대표부의 조선 신학교에 조선의 박해 소식이 전해지는 데는 3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박해 소식은 물론 가족들이 위주치명(순교) 하였다는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한 김대건과 최양업은 조선 교우들의 기대가 담긴 편지를 읽으며 더욱 학업에 정진했다.
--- p.235~236
[도판] 신학생 김대건이 지켜본 남경조약 조인식 장면:
“… 세실 함장은 부관 뒤프레 씨와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가 파견한 사절, 지리학자와 저, 그리고 약 20명의 선원을 대동하고 16일 동안 항해한 후 강화조약이 조인되던 바로 그날 남경에 도착하여 조인식을 참관하고, 4명의 중국인 고관들을 전부 만났습니다.” (김대건이 1842년 9월 상해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p.263
"제가 조선에 돌아왔다는 말이 퍼져나가면, 저뿐 아니라 많은 교우들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또다시 군난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중심 교우 몇 분 외에는 제가 한양에 왔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리지 마십시오."
“부제님, 그러면 요즘 은이 쪽에 계시는 자당慈堂을 은밀히 이리로 모셔 올까요?”
김대건 부제는 잠시 생각을 하다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혈육의 도리보다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을 진두지휘하실 페레올 주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허니 제 어머니께도 절대 알리지 마십시오.”
--- p.341
김대건 부제는 1845년 3~4월 사이에 현석문이 그동안 정리한 ‘조선 교회 설립에 관한 개요’와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들의 행적’(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 전 사목 활동과 순교에 이르는 과정 포함), ‘1839년에 한양에서 순교한 주요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 과정’(조선의 형벌·감옥·재판 등에 대한 설명 포함)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순교자 보고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2020 개정판) 143~212쪽까지 70쪽에 걸쳐 번역 수록될 정도로 많은 분량이다.
--- p.345
“새로운 한 명의 신부는 바로 안드레아 부제요. 나는 안드레아 부제를 다음 주일인 8월 17일에 김가항 성당에서 조선의 첫 사제품에 올릴 것이오!”
그 순간 조선인 교우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일제히 함성을 터트리며 페레올 주교에게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또 조선의 첫 사제가 될 김대건 부제에게도 큰절을 했다. 그러고는 북을 치며 “조선의 수선탁덕首先鐸德(첫 번째 신부) 안드레아 신부 만세!”를 외치며 어깨춤을 췄다.
--- p.392~393
페레올 주교가 엄숙한 목소리로 “안드레아 김!” 하고 불렀다. 이제부터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사제 서품식을 처음 참관하는 조선 교우들의 시선이 ‘부름’을 받은 김대건 부제를 향했다. 김대건 부제는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앗숨Ad Sum(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자신을 끊고 십자가와 함께하는 신부의 삶을 살겠다는 각오가 담긴 대답이었다.
--- p.396
조선인 사제인 저 김 안드레아는, 중국 의례에 대하여 규정한 클레멘스 11세 교황의 칙서의 사도 규정과 명령에 대하여, 본 서약 형식이 규정되어 있는 대로, 그 헌장 전체를 최선을 다해 살피며, 온전하고 충실하게 지킬 것입니다. … 저는 이렇게 복음서에 손을 얹고 약속하고, 서약하며 맹세하는 바입니다. 천주님과 천주님의 이 거룩한 복음은 저를 도우소서.
- 안드레아 김해 김金, 본인 자필自筆로 서명함
[도판] ‘김대건 신부 서약서’ 원본은 교황청 복음화성에 보관 중이다(문서번호 Fondo S. O. C. P. vol. 78, f 405).
--- p.400~401
1931년에 펴낸 필사본 『정씨가사鄭氏家史』에는 김대건 신부가 사목 방문할 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는 이천 동산밑(동산리)을 거쳐 단내 정은의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성사를 주러 다닐 때는 밤 시간을 이용했다. … 그의 가족들은 이웃들이 눈치챌까 쉬쉬하며 김 신부를 방으로 모시고 성사 받을 준비를 했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숨겨놓았던 십자가를 정성스럽게 걸어두는 것이었다.
--- p.443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등산 첨사는 이 천주학쟁이가 배교를 하겠다면 조용히 중국으로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답은 의외로 단호했다.
“나는 천주교가 참되기에 믿는 것이오. 천주교는 천주를 공경하도록 나를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주오. 나는 천주교를 배교하기를 거부하오!”
--- p.459
무관 이응식은 주변 나라 사정에 밝고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을 통해 들여온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를 조선말로 번역해보라며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지도를 건네받은 김대건 신부는 번역을 마친 후,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에서 본 대로 각 대륙에 색을 칠하기 위해 이응식에게 여러 색깔의 안료를 가져다주면 채색 지도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채색 지도를 본 이응식은 깜짝 놀랐다.
“참으로 놀라운 재주를 가졌구나. 이걸 한 장 더 만들면 주상 전하께 올리면서 너를 구명할 방도를 찾아보겠다.”
--- p.488
세상 온갖 일이 주님의 명령 아닌 것이 없고[莫非主命], 주님의 상벌 아닌 것이 없다[莫非主賞主罰]. 그러므로 이런 환난도 또한 천주께서 허락하신 바이니, 너희는 감수하고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려라. …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나보다 더 착실한 목자를 주실 것이니, 부디 서러워 말고 큰 사랑을 이루어,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김대건 신부가 조선 교우들에게 쓴 마지막 편지 중에서)
--- p.509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지만, 여러분들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국경을 넘어 양인들과 교섭한 것은 천주교를 위해서였고, 천주님을 위해서였으며, 나는 그분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소.”
… 그의 목이 잘리면서 머리가 백사장으로 떨어졌다. 1846년 9월 16일, 조선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신부의 나이 불과 25세였다.
--- p.516~518
사랑하는 여러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이 기쁨의 날, 저의 이 메시지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교우들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이 기쁜 기념일은 영웅적 신앙의 모범적 증인이며, 한국 백성들이 박해와 고통을 겪었던 어려운 시기에도 지칠 줄 모르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우리의 기도를 올려드릴 기회가 됩니다.
동료들과 함께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미움을 이기기 때문에, 선이 항상 승리한다는 것을 기쁜 희망으로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마르 1,21). (2021년 8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미사에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 중에서)
--- p.528~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