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양승훈이 말하다
이번 10월 31일로 나는 학교를 사직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많은 생각과 망설임 속에서 기도해 오다가 이제야 결정한 것이다. 14년 동안 정들었던 동료들, 사랑하는 제자들, 나의 젊음을 쏟아 부어 설계하고 만들었던 반도체 물리학 실험실,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게 했던 측정장비들, 손 때 묻은 연구실과 컴퓨터를 떠나는 것이다.
--- p.12
오랫동안 기도해 오던 일이었지만 직장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동안 지나온 나의 삶의 자취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마쳤으며, 그 후 별 배경도 없는 내가 경북대학교로 오게 되었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위험한 반도체 실험실을 무사히 이끌게 하셨으며 마흔도 안 되어 정년보장을 받은 정교수가 되게 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듯이 나도 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고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말을 해 왔다. 그러나 막상 주님께서 학교를 떠나라고 하실 때는 미련이 컸다. 그 동안 내가 직장의 주인 노릇을 해 왔음이 드러난 것이다.
--- p.13
2부. 양승훈을 말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창조의 연대와 방법에 대한 열띤 의논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양 교수님께서는 이러한 논의의 중심에 있는 분이시기도 하다. 양 교수님은 본인이 연구를 통해 철저한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창조연대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게 되셨지만, 자신의 견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잠정적인 자세를 가질 것을 항상 강조하셨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부에서도 창조론 시각의 차이가 형제자매에 대한 비난과 분노로 쉽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창조의 시간과 방법에 관한 자신의 의견과 관점에 대한 잠정적이고 유연한 자세를 가지는 것은, 더욱더 생산적인 창조론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사회와 교회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 p.62
학자 양승훈을 만난 것은 내게 또 다른 영향을 주었다. 그가 일생 성취한 것을 헤아려 본다면,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굳어 있기 쉬웠다. 하지만 그 연배에 보기 드물게 사고가 탄력적이었다. 다른 이의 의견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교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학문적 정직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창조과학과 결별한 경험이 이런 태도를 가지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보통 사람의 생각을 훌쩍 넘었다. 새로운 발견과 배움 앞에서 늘 겸허했다.
--- p.71
이제 그가 VIEW에서의 정년을 맞아 또 다른 나그네 길을 떠난다. 8월 말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붙어 있는 에스와티니(前 스와질랜드)라는 나라에 있는 에스와티니 기독의과대학교 총장으로 인생의 또 다른 막을 펼친다. 인구의 20%가 HIV 보균자라고 하는 아프리카 최빈국의 보건 의료 개선을 위한 학교의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누구도 쉽게 결단할 수 없는 길이다.
그는 VIEW 교수로서 마지막 강의를 마친 후, 지금껏 자신이 연구와 저술을 통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몸으로, 삶의 실천으로 남은 인생을 살겠노라고 해서 모인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지금껏 자신의 소명으로 삼아왔던 연구와 수십 권의 저술을 ‘만물의 찌끼’와 같이 내려놓았다.
--- p.72
3부. VIEW를 사랑하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의 소개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 적혀있는 내용이 내가 찾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의 방향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가기로 했다. 나는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생각을 거두고 앞으로의 내 삶을 위해 올인하기로 하였다. 사직을 하고 짐을 꾸려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그리고 밴쿠버에 도착했고, 무의식의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듯이 나의 잠자고 있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강력한 치료제는 나의 사고와 삶의 태도를 완전히 송두리째 뒤집어엎었고, 기독교 세계관이 주는 사고체계와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경험하면서 나는 이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몸을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가 되어 있었다.
--- p.128~129
동일한 세계관적 DNA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현장에서 사역하는 것 또한 VIEW를 통해 얻게 된 귀한 보물이다. 처음 수업에 참여했을 당시 몇몇 학우들이 VIEW에서는 보기 드문 감리교 목회자인 나를 보며 어떻게 해서 감리교 신학과 다른 개혁주의 신학이 바탕이 된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며 물어 오던 일이 기억난다. 그 질문을 했던 학우들은 이제 밴쿠버를 들르게 되면 꼭 만나는 십년지기 친구들이 되었다. VIEW 동문들의 직업, 교단, 지역, 나이, 성별은 다양하지만 세계관 변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여 연구하고 협력하며 기독교 세계관적 목회와 삶을 세우기 위해 함께할 수 있음이 참으로 감사하다.
--- p.136
4부. VIEW를 살아가다
코로나 19가 발생한 2020년부터는 그동안 개발했던 기독교 세계관 교육 콘텐츠와 사역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 세계관 교육가’ 양성을 위한 세 종류의 지도자 교육과정을 온라인으로 개설하였다. ‘기독교 세계관 교육 기본과정’은 1년 4학기 과정으로 기독교 세계관, 타세계관, 기독교 세계관 교육의 원리와 실제를 공부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사역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지도자 과정이다. ‘기독교 세계관교육 강사과정’은 1년 6학기 과정으로 어린이세계관학교를 직접 운영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콘텐츠를 제공하는 지도자 과정이다. ‘기독교 세계관 전문과정’은 이미 전문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통합하는 책을 쓰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코칭하는 지도자 과정이다. 앞으로 기독교 세계관 전문과정 이수자들이 강사로 세워지고 함께 협력하는 ‘기독교 세계관 교육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기독교 세계관으로 준비된 리더들을 양성하는 일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 p.152
3년 여의 VIEW에서의 유학을 통해 나는 복음의 총체성과 하나님나라에 대해 눈이 열려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세계관적 목회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세계관적 목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성경적 관점을 열어주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앙과 삶이 통합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며,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세계관적 목회가 교회의 체질을 새롭고, 건강하게 변화시키리라 믿는다.
--- p.162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며 세계관 사역은 이제 2.0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가 되었다. 특별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세계관 교육을 어떻게 해 나갈지, 이념 갈등 시대의 세계관 교육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기존에 흩어져 개별적으로 각개 전투하던 세계관 사역들이 통합적으로 네트워킹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VIEW 출신 목회자와 사역자들 중심으로 세계관 사역네트워크(가칭)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세계관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사역해 왔지만, 다른 VIEW 출신 사역자들은 설교, 제자훈련, 세계관캠프, 세계관비전트립, 시니어세계관아카데미 등 다양한 시도를 그간 목회의 현장에서 진행했다. 이런 세계관 사역들이 종합되고 통합되어 제공된다면 세계관 운동이 더욱 효과적으로 교회와 목회의 현장에서 전개되리라 기대한다.
--- p.168
스투디움과 병행해서 다양한 형태의 ‘아볼로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7년간 누적 참여 인원은 약 150명이다. 서평훈련을 생략한 가벼운 책나눔 모임으로 직장인, 가정주부, 기독교 사역자, 장년 은퇴자 등이 주된 참여자이다. 최근엔 고교생 대상의 주니어 북클럽도 시도했다. 간간이 비신자도 참여하기도 하는데, 신앙유무와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를 알아가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려고 한다. 이들의 학습 경험들은 자연스럽게 복연의 교육커리큘럼 개선에 의미 있는 데이터로 도움을 주고 있다. 역시 7년 전부터 팟캐스트, 유튜브 등으로 책 나눔과 소개 방송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에게 책모임을 권장하고 있다.
복연은 지금 전 세대와의 쌍방향 소통 속에 개개인의 문해력과 자기표현능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연구자 중심에서 학습자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 보급에서 포스트모던 세계관 학습으로 방향을 바꾼 셈이다. 조만간 교육프로그램의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보급에 나설 것이다. 물론 복연이 세속 세계관을 익혀나간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총체적 세계관을 세속 정신과 적당히 타협할 이유는 없다.
--- p.184
나는 무엇보다 과학 수업을 하는 것이 무척 좋고 즐겁다. 학생들에게 과학의 세계를 소개하고 그 세계로 잘 안내하고 싶었다. 기독교 대안학교에서의 과학 교육을 잘하기 위해, 특히 창조론적 세계관으로 과학 교육을 잘 하기 위해서 VIEW에 공부하러 갔다 온 것이 아니었던가?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창조론에 대한 오해와 부족한 이해로 말미암아 기독교 대안학교에서도 창조론과 과학 교육 사이에 부조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행히 내가 근무하고 있는 강릉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님부터 학교 선생님들이 창조론과 과학 교육에 관하여 “창조과학적 창조론만이 창조론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의 VIEW에서의 공부 경력과 과학 교육 경력을 인정해 주었고 지지해 주었다.
--- p.204
현재 주력하고 있는 사역은 모든 사람이 선교사와 같은 헌신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일상 속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주권선교사를 양성하는 사역이다. 그리고 그 사역의 하나로 소명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소명 교육의 한 프로그램으로 ‘시니어를 위한 록키 소명 여행’을 코로나 19가 발생하기 전에 갔었다. 이 프로그램은 소명 교육과 여행을 묶었다는 것과 노년기에 계신 분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이 은퇴한 상태라 생업에 얽매이지도 않고 시간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자신의 소명에 대해 생각하고 그 소명에 따라 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은퇴 후에 삶에 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209
내가 VIEW에서 경험한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은 고스란히 첫 목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저 단순히 지식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목회의 전 영역에 성경적인 세계관이 묻어있었다.
예컨대 당시 보수성향이 강한 70년 된 전통적인 교회의 문화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하나씩 고쳐가며 성도들에게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져 세속적이고 미신적인 삶을 청산하도록 강조하였다. 교회 강단 개혁과 지역 공동체 교회로서 역할 회복, 그리고 형식과 습관에 젖은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도록 힘쓰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사명을 갖고 헌신하도록 가르쳤다. 교회 직분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가지며, 가정과 직장 생활을 교회 생활보다 열등하게 여기는 이원론적인 생활을 벗어나도록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서 교회 내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학교를 시작하여 이론적인 훈련도 병행하였다.
---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