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걷기가 삶에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백 번 말로 하느니 함께 걷는 게 좋겠다 싶었다. 걸으면 몸과 마음에 힘이 생기고 그 힘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좋은 연료가 되어준다는 것을 같이 경험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마음속으로 오래 품고 있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길 바랐다. 침묵 속에서 걷다 보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와 힘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길. 거기서 우리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싶었다.
---「프롤로그」중에서
2.
서늘한 새벽 공기,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풍경, 새소리, 바람 소리, 탁탁 스틱을 경쾌하게 밟아가며 나를 앞질러 가는 순례길 동지들의 ‘부엔 까미노(Buen Camino)!’ 하는 인사가 노래처럼 들려왔다. 우리가 정말 순례의 길에 서 있구나,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겨우 첫 고비를 넘겼다」중에서
3.
잠시 뒤 멀리서 태윤이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나타난 태윤이의 얼굴은 의외로 쌩쌩했다. 다리를 절룩이기는 했어도 짜증도 내지 않았고 기어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너무 반가워서 태윤이를 덥석 안아주었다. 긴 거리를 걸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가 이틀째 꿋꿋하게 걷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견했다.
‘와, 이렇게 걷게 되는구나! 우리 딸한테 이런 힘이 있었구나! 길 위가 아니라면 있어도 알 수 없었을, 있어도 쓸 수 없었을 귀한 힘을 이렇게 발견하게 되는구나!’ 순례길을 떠나올 때 가졌던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옅어지고 그 자리에 믿는 마음이 채워져가고 있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새로운 얼굴들」중에서
4.
사는 나라도, 살아온 시간도 저마다 제각각인 우리지만 여성으로서 겪어 온 공통의 경험이 있기에 모두 뭉클했다.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 여성이 힘을 내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응원의 마음이 국적과 나이를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순례길에서 잠깐 만나 한 끼의 식사를 나눴을 뿐인데 십 년은 쌓인 듯한 우정의 냄새가 났다. 순례길이 주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마음의 연결」중에서
5.
용서의 언덕까지 이르는 탁 트인 들판을 걸으면서 ‘나는 용서 구할 일을 별로 안 하고 살았는데’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다. 용서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던 철판 동상을 보면서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 바로 떠올랐다. 아이가 내 속도대로 힘을 내주지 않아서 잠깐 미워하고 원망했던 옹졸한 엄마, 아까의 나를 용서해 주라고 말이다.
---「삼겹살의 힘일지라도 걷고 있으면 된 거야」중에서
6.
아니 이렇게나 섹시한 몸의 주인이 할머니였다니. 충격이었다. 이런 반전이 있나, 나는 완전히 꽂혀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다짐이라는 걸 해버렸다. ‘저 할머니처럼 달려야겠어. 나이가 더 들어서도 저렇게 탄탄한 몸으로 경쾌하게 뛸 수 있는 할머니가 돼야겠어. 아주 섹시하게 나이 들어갈 거야.’ 생기 넘치는 스페인 할머니를 닮은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뜨거워졌다.
---「섹시한 스페인 할머니처럼 달리는 거야」중에서
7.
쉬어야 할 때라는 신호가 자꾸 왔다. 걸어야 할 때가 있다면 쉬어야 할 때도 있다. 그걸 잘 알아차리는 것도 자기를 보살피는 중요한 과정이다. 잘 걷는 것보다 어쩌면 마음이 보내오는 이 ‘STOP’ 신호를 잘 따라야 한다. 무시하면 언제든 티가 난다.
---「마음의 표지판이 쉬어야 할 때를 가리킨다면」중에서
8.
노란 화살표를 따라 순례의 길을 걸으면서 내 삶의 노란 화살표는 내가 세워가는 것임을 마음에 새겼다. 누가 친절하게 알려주는 길의 안내는 순례길에서만 받고 싶었다. 내 삶의 안내자는 나 자신이고, 노란 화살표를 세워가는 주체자도 나 자신이니,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오로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 삶에는 나만의 노란 화살표」중에서
9.
산티아고 순례길이 산 아니면 평원이지, 그래도 바람이 늘 시원하게 불어주니까 낮에 걷는 것도 괜찮다. 그래, 우리는 하던 대로, 우리 속도대로 걷는 거다. 힘들면 앉아서 늘어지게 쉬는 거다. 우리에게 딱 맞는 속도를 찾아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이날도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알베르게에 들어왔지만 남들보다 늦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느려도 걸으면 기적에 가 닿지」중에서
10.
어느 길로 가든 완벽한 선택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나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 그 길에 집중하는 것만이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걷는 길의 아름다움을 공들여 보는 것, 길이 뿜어내는 아침 냄새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 생쥐와 개미와 달팽이, 들풀에 내 시선을 나눠주는 것, 이 길에서 만나는 다른 순례자들과 다정한 인사를 주고받는 것.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선택한 길의 의미는 내가 만들지」중에서
11.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어나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한 뼘은 자라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례길 초반에는 걷기에 적응하느라 몸도 마음도 몸살을 앓았을 테다. 몸의 고통을 이겨내며 묵묵히 걸어야 했던 긴 시간 동안 태윤이의 내면에도 깊은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밝아지는 표정, 내게 건네는 말들 속에서 걷는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자주 묻어났다.
---「글쓰기로 삶을 세워나가는 사람을 사랑하지」중에서
12.
관성적으로 흘러만 가던 삶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자기 의지로 걸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 타인의 순례기에서 그리고 여기서 만난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걷기의 이유는 삶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 철의 십자가 앞에서 순례의 한 시기가 매듭지어진 느낌이 들었다.
---「철의 십자가, 새로운 자신의 옷을 입는 곳」중에서
13.
“걸으면서 느끼던 것들을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네.”
우리가 걸은 이 걸음들을 딱 떨어지는 문장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태윤이가 답답해했다. 시간이 걸릴 일이지. 지금은 어떻게도 설명하기 어렵고 어떤 의미일지도 알기 힘든 게 당연할 거야. 일상으로 돌아가 이 순례의 시간을 마음에 푹 담그고 살아내는 긴 발효의 시간을 거쳐야만 알 수 있을 거야. 이 시간이 우리에게 힘으로 응축될지, 더 없는 위로를 주게 될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게 해줄지, 미래의 어느 시간대에 가 봐야 분명해지는 거겠지. 그러니 우선은 곧 나올 순례자 만찬을 맛있게 먹고 단잠을 자는 거다. 날이 새면 또 열심히 걸어가는 거야.
---「마음속에서 들리는 말들」중에서
14.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침묵 속에서 끝도 보이지 않는 길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마음속에 눌러 놓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오래도록 걸으며 나눈 나와의 대화에서 내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순례길을 걸은 충분한 이유가 됐다.
---「이만하면 떳떳하게 걸었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