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중국인들도 자기 말글에 위기의식이 있었다. 아편전쟁 패배,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北京점령, 이어진 청일전쟁 패배로 큰 충격을 받은 중국 지식인들은 어려운 한자로는 정치 개혁과 국민 계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표음 위주의 문자 개혁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의 대문호이자 선각자 루쉰魯迅이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고 했을까. ---p.16
시간이 흐르면서 교육·법률·기술·사회 분야의 필수 언어로 자리 잡은 일본어는 국어가 되었고, 조선어는 일개 반도어, 지방어, 언문, 방언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조선의 교육 현실을 직시한 상하이의 영자 신문 대륙보China Press의 나대니얼 페퍼Nathaniel Peffer 기자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교과서는 모두 일본어로 되었으며, 교수 용어도 일본어다. 몇 시간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는 일본인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다만 문학적 언어로 배울 뿐이다. …… 조선인 교육의 첫째 목적은 일본어 보급이다. 이 계획은 용의주도해서 보통학교의 매주 수업 시간 32시간 중 8시간은 일본어 시간이다. 즉 조선 아동은 학습 시간의 4분의 1을 외국어인 일본어에 소비한다. 다른 과목에 비교하면 일본어 시간은 배나 된다.’ ---pp.45~46
“독일과 영국이 폴란드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지배했을 때 폴란드어와 켈트어를 말살했듯이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민족 말살 차원에서 선어를 말살할 것입니다. 한글 운동이야말로 민족자존을 위한 투쟁입니다!” ---p.71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받들어 말모이 편찬을 추진하다가 해외에 망명한 김두봉이나 조선어학회의 선봉장 이극로, 독립투사들의 지킴이 인 등 대다수 조선어학회 회원들 역시 대종교인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인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p.89
1838년 12월 1일 조선에서 선교하던 앵베르Laurent Marie Joseph Imbert 주교는 포교성성布敎聖省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조선 사람들은 그들의 모국어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데 적합한데도 자기 고유의 말을 멸시한다. 한문 서적만 사용하고 번역하지 않은 상태로 발음만 옮겨 뜻도 모르면서 기도하고 있다.’ ---p.134
사전 편찬의 실무를 맡은 정인승은 명사, 감탄사, 부사 등의 어휘풀이를 담당하면서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 용례 때문에 고심했다. 일례로 ‘궁둥이’에 관련된 어휘를 수집해보니 궁둥이, 궁뎅이, 엉덩이, 엉뎅이, 응덩이, 응뎅이, 방둥이, 방뒹이 등 수없이 많았다. 매사에 적극적인 그는 옷을 벗고 궁둥이를 내놓은 다음 회원들과 함께 어디까지‘궁둥이’고 어디까지‘엉덩이’며 어디가‘방둥이’인지 토론했다. ---p.179
이극로는 월북하기 전 김두봉의 편지를 받았다.
‘나라가 두 쪽이 나더라도 말까지 두 쪽이 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 북쪽에서는 사전 편찬이 시급한데 쓸 만한 학자가 없습니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되니 당신이 북쪽으로 와주십시오.’ ---p.229
“중국인도 한자 때문에 나라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며 문자를 고치려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 고약한 한자를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가.”
조선어학회는 이런 상황에 당혹감과 절망감이 들었다. 그 무렵 중국의 지식인들은 평생을 배워도 알기 어려운 한자를 개혁하지 않고는 중국의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언문일치가 문맹률을 낮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자각 때문이다. ---p.236
휴전 협상이 한창이던 3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통해 정부 문서와 교과서에 옛날대로 쓰기 철자법을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석 달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말 기독교계에서 가르치던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구한말 성경 맞춤법’은 박승빈의 정음파가 주장하던 표음주의적 맞춤법이다.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 모든 규제를 풀어 소리 나는 대로 적자는 것이다. ---pp.241~242
우리말《큰사전》6권의 출판이 완료되었다는 것은 한국 문화사상 획기적인 대사건으로, 후대까지 기념할 만하다. 세종대왕이 정음을 제정·반포한 지 510년 만에 순전히 우리글로 우리말을 해석한 사전이 완성된 것이다.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