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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문화적 글로벌시대의 종교와 정치

상호문화적 글로벌시대의 종교와 정치

코리안아쉬람 인문연구-0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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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77쪽 | 438g | 152*225*14mm
ISBN13 9791189186197
ISBN10 118918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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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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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의 정체화 이론과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노예의지 이론을 크게 세 부분에서 비교한다. 첫째 정체화 제1장르: M←a와 자유의지, 둘째 정체화 제2장르: S←A와 성서, 셋째 정체화 제3장르: Sa와 노예의지. 정체화 이론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연장선상에서 라깡이 발전시킨 것인데, 그의 여러 저서에서 뼈대 역할을 하고 있고, 특히 1961년-62년 세미나는 Identification(停滯化)을 주요 제목이자 테마로 다루었다. 이 이론은 그의 사상을 구조적으로 세우는 토대인데, 이 짧은 글에서 그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그가 고안한 ‘도식L’에 따라 정체화의 제1, 2, 3장르를 설명할 것이다. 그의 이론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이 글을 이해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이 글은 루터의 생각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비교할 것이다. ‘도식L’은 이 글의 각주 29번에 해당하는 그림이므로 참조하면서 독서하면 좋을 것이다.

이 비교를 통해 개신교 신학 문헌의 해석틀의 하나로 정신분석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단 이 글에서는 구조적인 분석이라는 한계 때문에 세밀한 분석은 시도하지 않겠고 구조분석에 주안점을 둘 것이다. 라깡과 종교 일반에 대한 담론 가능성을 위해, 필자의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라깡과 종교”, in 「라깡과 현대정신분석」(2005 Winter, Vol. 7). 라깡과 개신교 신학 간의 세밀한 분석을 위해, 필자의 『동일시와 노예의지』(서울: 백의, 1999), “아우구스티누스와 라깡”, in 『생명의 영성』(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와즈 돌토의 『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김성민 옮김, 서울: 다산글방, 1999)와 『인간의 욕망과 기독교 복음』(김성민 옮김,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0), J. ANSALDI의 Le dialogue pastoral(Geneve: Labor et Fides, 1986)과 L’articulation de la foi, de la theologie et des ecritures(Paris: Les editions du Cerf, 199l), 그리고 Dire la foi Aujourd'hui(Suisse Aubonne: Moulin, 1995)를 참조할 수 있다.
---「라깡의 정체화(Identification)와 루터의 노예의지(servo arbitrio)」중에서

1. 머리말
최근의 각종 보도에 따르면, 인도는 조세·토지·노동의 3대 개혁과 2016년 전격적으로 시행된 화폐개혁 등 각종 개혁정책 및 모디노믹스(Modinomics)라 부르는 경제개발 정책을 통하여 새로운 신흥경제국(emerging country)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한때 해외원조를 받기 위해 가난과 영혼을 수출한다고 자조하던 인도가 이제는 “인도에서 만들어라”(Make in India)라는 구호 아래 제조업에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하였으며, 최근에는 구매력평가지수(PPP) 기준 GDP가 이미 그들의 과거 식민지배국인 영국을 추월하였고, 이어서 독일, 일본마저 추월하여 세계 3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세계적 IT 기업 상당수의 CEO가 인도계로서 이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명목(nominal) 지수로는 아직도 1인당 GDP가 2천불에 불과한 인도가 조만간 현재의 중국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을 예상한다면 미래에 미중과 더불어 이른바 빅3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밖에 안 보인다.

인도 경제가 제조업을 정책적으로 육성하면서 제조업이 중심인 우리나라와의 협력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최근에 있었던 고고도미사일방위체계, 일명 싸드(THAAD)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은 우리에게 몇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는 특정 경제권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취약성이고, 둘째는 다른 지역과의 갈등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또는 사후에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지역 전문가의 필요성이다. 그렇다면 중국경제에의 과도한 의존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중국 비중을 낮춰 정치적 변수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거대한 시장인 인도라는 새로운 파트너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는 기존의 불교 또는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알려진 인도와는 다른 시각에서 인도에 접근하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즉 개인의 종교 또는 취향에 따라 필요한 사람만 선택적으로 알아야 하는 인도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모든 한국인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전략적 지역이라는 관점에서 인도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 인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현실이라는 지역학에서 출발하여 그 문명의 기저에 자리잡은 사상의 뿌리까지 통찰하여야 할 것이다.

현대의 인도는 90년대 이후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힌두뜨바(Hindutva, 인도는 힌두교만의 나라여야 한다는 정치이데올로기)와 세속주의(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주의적 입장)의 갈등 및 각종 종교간의 갈등이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에서 항상 중심에 서있는 주류는 힌두이즘이며, 그 뿌리는 중세시대에 샹까라(?a?kara) 등에 의해 정립된 베단따 철학이다. 본고는 현대 인도에서 세속주의와의 갈등 및 이슬람과의 갈등이라는 두 가지 주요 반목의 중심에 서있는 힌두뜨바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본고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재해석 하는 창조적 연구논문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개글이다. 이를 위해 정채성, 백좌흠 교수 등의 국내외 연구논문들을 참조하였다.

2. 힌두뜨바 개요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된 인도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규정하고자 하는 문제는 힌두와 힌두이즘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와 더불어 전개되어왔다. 1990년대 이후 인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인도의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커지는 것과 더불어, 소위 문화 민족주의(cultural nationalism)로 불리는 현상이 인도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인도 교민 사회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cf. Chandhoke 1999; Chatterjee 2001; Mayaram 2004.

문화 민족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지역과 나라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힌두(Hindu)와 힌두이즘(Hinduism)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힌두-힌두이즘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영국 식민지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독립운동 시기를 거쳐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근대국가로서 인도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해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를 비롯해 다른 사회들과 구별되는 인도의 사회
---「힌두뜨바(Hindutva) - 종교와 정치가 나쁘게 결합된 좋은 사례」중에서

머리말 ; 종교가 질병이라고?
종교는 언젠가는 치료되어야 할 하나의 질병이다. 그 질병이 치료될 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존엄을 부여하기 위해 더 이상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실제 역사에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 존엄성의 조건들을 수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윌리엄 페이든, 이민용 역(2005), 『성스러움의 해석』, 청년사, p46. 참조

종교라는 질병이 치료되고 더 이상 꿈꾸지 않아도 되는 그 세계는 변혁을 통해서 실재할 수 있다. 스스로 나비가 되는 호접몽을 꾸었던 장자(莊周, 莊子, BC 369~289)는 당대의 권력자들인 제후들에게 그들이 꾸는 꿈이 그저 그러한 꿈일 뿐이라고 설파하였다. 종교철학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장자다운 접근이었다. 종교철학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장치가 필수적이다. 초현실적 비전을 토대로 철학적 의의를 찾아야 한다. 그 후 샤먼의 신화를 상징적 우화로 변화시켜 거기에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사상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제3단계의 샤먼 의식을 한 단계 뛰어넘는 철학적 지성의 2차적 조작이 필요하다. 고대 중국사상계에서 장자는 자신의 철학을 샤머니즘의 기반에서 출발하여 그 샤머니즘을 뛰어넘었던 사람이다. 井筒俊彦, 박석 역(2013), 『의식과 본질』, 고양: 위즈덤하우스, p252. 참조 장자는 나비가 되었다는 자신의 꿈을 통하여 종교철학이 정치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비판하였다. 장자의 설법은 샤먼스러운 우화로서, 아주 성공적으로 논지를 교묘하게 설파한 것이다.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호되게 시련을 겪은 종교의 구체적 실례들로는 다음 같은 사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제정 러시아를 뒤흔든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Grigory Yefimovich Rasputin, 1872~1916)은 치유능력과 예언에 능통한 종교인이었으나 지나치게 정치현실에 뛰어들었기에 나락으로 떨어진 불행한 사람이었다. 신돈(辛旽, ?~1371)은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꿈을 이루려다 요승의 낙인이 찍힌 사람이다. 또한 종교적 본분에서 멀어지며 정치적 현실에서 추락을 맛본 인물이다. 또한 태평천국을 건설하려던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의 경우도 종교와 정치 사이의 거리를 실증하는 사례에 속한다. 이 사건들은 현실에 대하여 이상적 꿈을 바탕으로 변혁시키고자 하는 정치의 영역과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종교의 영역이 서로 다른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의 것은 여호와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라고 설파한 청년 예수의 경우가 그러하고, 자신의 고국인 카필라의 석가족이 침략당하는 것을 결국에는 묵인하며 참상을 목도하였던 석가모니의 경우에서도 확연한 것이다.

그래서 원효(元曉, 617~ 686)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밝히기를, 세속의 일들에 대하여 그리워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것을 출가[不戀世俗 是名出家]라고 명확히 하고 있다. 이 출가라는 말은 불교의 고유용어이기는 하지만, 청렴하게 사는 것을 의무로 하는 종교인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 청빈한 삶을 통해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하는 것이 종교인의 주요한 덕목이다. 종교인으로서 현실의 패역과 무도함을 들여다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현실은 가혹하여 세속인들에게도 현기증이 나게 하기도 하고 구역질이 나도록 몰아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산으로 들어가 머리 깎고 살고 싶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바램은 한낮의 꿈처럼 한가롭고 낭만적이어서 현실로 되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1. 패역한 현실! 들여다보기조차 싫어질 때
곤혹스러운 일들을 대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쓰기 싫은 글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 글의 주제로부터 한참 비켜있는 글을 읽고 나면 한결 가벼워지곤 한다. 당말의 문장가인 사공도(司空圖, 837~908)가 펼쳐낸 〈시품〉(詩品)은 난처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할 때 또는 무기력해져 있을 때 좋은 차 한잔을 마시며 읊조리기에 제격이다.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가운데 아홉 번째 글 「기려」(綺麗)는 문장에는 다양한 표현법이 들어 있는 것이 좋으며, 그럴 때 그 글이 곱고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하여 붙인 제목이다. 「기려」는 읽어볼수록 문장의 기려
---「정치는 꿈꾸고, 종교는 해몽(解夢)한다」중에서

Ⅰ. 시작하는 말
근대불교학이 정립되던 20세기 초엽부터 중반에 걸쳐 선불교 연구의 선두주자를 들자면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 鈴木大拙는 10여 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고 1909년에 귀국, 學習院 대학, 1921년에는 大谷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6년 鎌倉市에 마츠가오카(松ヶ岡) 文庫를 설치하였으며, 미국 각 대학에서 불교철학을 강의하는 등 서구에 불교사상, 특히 禪思想을 전한 공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저작은 『鈴木大拙全集』전40권(東京, 岩波書店, 1968~2003)에 수록되어 있다.

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업적은 동서양 불교계나 불교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근대 禪學 연구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주 출신 승려 겸 불교학자 브라이언 빅토리아(B. Victoria)에 의해 1980년『Zen War Stories』가 출간 Brian Daizen A. Victoria, Zen War Stories, R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2002(First Edition 1980). 된 후 스즈키에 대한 비판, 특히 근대일본의 군국주의와 관련한 비판이 서구에서 일기 시작하여 이제는 일본의 학자들도 가세해 뜨거운 학문적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Zen War Stories』는 근대일본의 군국주의 과정에서 선이 전쟁의 도구로써 이용된 점을 부각시키면서 일본의 대외 전쟁에 대한 선사들 내지는 선학자들의 책임을 강하게 물었다. 이러한 여파로 臨濟宗 妙心寺派에서는 2001년 9월 27일 제100차 정기총회에서 근대 군국주의 시기 自宗의 전쟁협력 책임문제에 대한 종단 차원의 참회의 내용을 포함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브라이언의 연이은 저작『Zen at War』는 천황주의로부터 발양된 일본군부의 대외 정복 과정에서 보인 선의 역할을 그 근거를 들어가며 더욱 상세히 논하고 있다.Brian Daizen A. Victoria, Zen at War, Rowman and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6(First Edition 1997).

이러한 연구와 더불어 로버트 샤프(R. Sharf)는 「The Zen of Japanese Nationalism」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 사조에 힘입은 스즈키를 비롯한 불교인들에 의한 선의 해석이 근대국가의 확립 및 천황주의와 군국주의 이데올로기 확장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음을 폭넓게 연구하였다. Robert Sharf. The Zen of Japanese Nationalism, History of Religions 33:1,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베르나르 포(B. Faure) 또한 여기에 가세하여 특히, 스즈키의 경우 서양종교의 외피를 입은 채 선을 해석하고, 이에 바탕하여 일본인론 내지는 일본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선 오리엔탈리즘(zen-orientalism)을 창안해 냈음을 밝혔다. 그는 「Chan Insights and Oversights : An Epistemological Critique of the Chan Tradition」가운데 이러한 서구적 시각의 선불교에 대한 해석을 전도된 오리엔탈리즘(reverse orientalism)이라고까지 지적하였다. Bernard Faure, Chan Insights and Oversights : An Epistemological Critique of the Chan Tradi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이러한 과정에서 제기된 스즈키의 선사상 비판에 대해 일본의 학자들이 옹호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상황을 빚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에 들어와 이시이 코세이(石井公成), 키리타 키요히데(桐田?秀), 스에키 후미히코(末木文美士)가 서구학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며, 야마사키 미츠하루(山崎光治), 사토 타이라켄묘(佐藤平?明)가 적극적인 방어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에키 후미히코는 스즈키의 글과 언설을 통해 그 애매모호성을 근거로 다분히 일본군국주의 체제에 대한 동조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였다.末木文美士의 「大拙の??批判と?性論」(松ケ岡文庫編集,『鈴木大拙?後四?年』, 河出書房新社, 2006)을 참조할 것.

여기에 대해 사토 타이라켄묘는, 스즈키의 서간문에 나타난 군국주의에 대한 비난의 글을 제시하는 등 강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를 옹호하였다.佐藤平?明「鈴木大拙のまこと-その一貫した??否認を通して」, 「財?法人松ケ岡文庫?究年報」21호, 松ケ岡文庫, 2007, 참조. 佐藤平?明는 본 논문에서 末木文美士 외 다른 학자들의 鈴木大拙에 대한 비판을 전방위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수많은 스즈키 관련 연구 성과 등이 나오고 있지만 이러한 논란에 대해 여전히 관망하는 자세만을 취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제 서양과 일본의 스즈키에 대한 민족주의나 군국주의와의 관련 혹은 전쟁지원에 대한 책임론 공방을 한국의 학자들도 당연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로서는 첫째, 그가 서술한 수많은 선 해석의 텍스트들이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선에 관한 수업과 수행에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선 연구나 저술의 선구적인 업적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역사적 상황성(context)이 결여된 선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근대 일본불교와 민족주의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를 중심으로-」중에서

I. 서론
고전과의 만남은 오늘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혜안을 여는 대화의 창구가 된다. 동양사상의 고전적 지혜 가운데 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에서 공자를 비롯한 유교전통이 2천 여 년의 장구한 정신적, 제도적 지배 이데올로그로 작동해 왔다면, 노자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제도 밖의 민간인 속에서 혹은 도교 사상사 속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중국 철학의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노자는 공자보다 앞서 철학을 개척한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특별히 ‘도(道)’의 개념을 우주론적 차원은 물론, 인생 제반에 걸친 삶의 철학으로 체계화 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천도(天道)’ 사상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는 일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이상적 인간의 최고 형태를 염두에 둔 성인(聖人)의 삶은 어떤 것인가를 시종일관 『도덕경』 81장 전체에서 제시하고 있다. 노자에게서 주요한 주제들은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무위’의 삶 속에서, 하늘과 자연의 규율에 순응하며, 탐욕 없이 비고 고요한 마음(虛靜)으로, 겸허(謙)하게 소박한(樸) 삶을 살아가는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나라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들 개개인 혼자의 힘으로만 부족하다. 집단을 이루는 사회적 존재로서, 특히 전쟁이 끊임이 없었던 춘추전국 시대에는 국가 지도자의 정치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노자는 동 시대를 살아가면서 백성들이 왜 고통 속에서 괴로워 했던가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의 하나로 임금이나, 군주 또는 후왕들의 정치적 지도력을 문제 삼으면서, 그 해결책으로 다양한 그의 사상을 전개하며 제시했던 것이다.

이에 필자는 그의 여러 가지 사상들 가운데 특별히 백성들을 살리고자 했던 정치철학적 요소가 강한 노자 본문을 선별하여 해석하면서, 그의 사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 보았다. 첫째, ‘포일(抱一)’에 입각한 부쟁(不爭)의 정치학. 둘째, 무위(無爲)의 정치학. 셋째, 소박(朴)과 겸손(謙)의 정치학이다. 우선, 부쟁의 정치학에서는 ‘수도포일(守道抱一)’의 정치와 반전 평화사상을 살펴보았고, 두 번째, 무위의 정치학에서는 ‘허정(虛靜) 무위’와 ‘허심실복(虛心實腹)’의 정치학 그리고 ‘중도(中道)무위’와 ‘대공무사(大公無事)’의 정치학을 고찰했다. 마지막의 소박과 겸손의 정치학에서는 잔꾀를 버리고 소박함을 간직한 ‘무지수박(無智守朴)’과, 겸양의 정치학을 논했다.

이상의 논의는 『도덕경』 원문을 중심으로 필자가 직접 해석한 본문과 중국 고대의 사상가 하상공(河上公)이나 왕필(王弼)은 물론 기타 중국의 현대 노자 전문 학자들의 주석도 참고하였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적인 국가를 생각했던 노자의 정치철학은 과연 무엇인지, 특별히 ‘스스로 그러한(自然)’ 원리에 순응하는 도를 간직한 채, 무위의 삶을 사는 ‘수도무위(守道無爲)’의 정치철학이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Ⅱ. ‘포일(抱一)’에 입각한 부쟁(不爭)의 정치학
1. ‘수도포일(守道抱一)’의 정치

‘수도(守道)’는 도를 간직한다는 뜻이다. 도를 몸소 간직하고 지키는 정신을 수도라고 한다면, 노자는 늘 몸속에서 도를 간직하여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도를 간직하면서 ‘하나(一)’를 안으라고 했는데, 이때 하나를 껴안는다는 것은 곧, ‘도를 껴안는 것(抱一)’ 劉康德, 『老子』, (上海: 上海辭書出版社, 2018), p.62. 劉康德은 ‘一’은 ‘道’를 가리키며, ‘抱一’은 ‘守道’를 뜻한다고 했다. 반면에 왕필(王弼)은 ‘一’이 ‘少之極也’라고 하여 ‘작은 것의 지극함’이라고 풀었다. cf. (魏)王弼, 『老子道德經注』, (北京: 中華書局, 2011), p.58. 왕필은 여기서 ‘抱一’이라고 노자본분을 기록했지만, 帛書甲乙本과 北大本에는 ‘執一’로 되어있다. cf. 陳劍, 『老子譯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9), p.83. 을 말한다. 이 ‘포일’의 정치철학에 대해 노자는 『도덕경』 10장에서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혼백이 하나를 품고, 그 하나를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氣)를 전일(專一)하게 하고 더없이 부드럽게 하여, 능히 갓난아기 같을 수 있겠는가? 어두운 거울(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씻어 능히 흠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꾀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명권, 『노자왈 예수 가라사대』, 상권, (열린서원, 2017), p73.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여기서 혼백이 하나(一)를 품는다고 했을 때, ‘하나’에 대한 해석이 주석가들에 따라 다소 다르다. 우선 왕필은 ‘사람의 참’(人之眞)이라고 했고, 王弼, 『老子道德經注』, (北京: 中華書局, 2014), p.25. 여기서 왕필이 ‘하나(一)’를 ‘참(眞)’이라고 했는데, 루우열(樓宇烈)은 이 ‘참’을 ‘소박(樸)’으로 풀었다(‘眞’, 卽樸.). p.26.
하상공은 “도와 덕이 생겨나게 한 것으로 태화(太和)의 정기(精氣)” [漢] 河上公, [唐] 杜光庭等注, 『道德經集釋』, [上冊], (北京: 中國書店, 2015), pp.12-13. “一者, 道德所生, 太和之精氣也, 故曰一.”

라고 하였다. 왕필의 해석대로 ‘하나’를 인간이 지닌 ‘참’이라고 할 때, 그보다 앞서 살았던 동한(東漢) 시대의 하상공은 이 ‘하나’를 ‘태화의 정기’라고 해석함으로써, 인간이 타고 날 때부터 부여받은 ‘정기’로서의 알짬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 다석 유영모의 해석처럼 풀면 ‘하나’는 욕심으로 가득 찬 ‘제나’가 아니라, 순수한 영혼의 ‘얼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타고난 ‘정기’를 갓난아이처럼 ‘전일’하게 부드럽게 하고 깨끗한 거울처럼 흠이 없이 백성을 통치 할 수 있어야 함을 노자는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노자는 『도덕경』22장에서 ‘포일’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휘어지니 온전해지고, 구부리니 펴진다. 움푹 파이니 채워지고 낡으니 새롭게 된다. 적으니 얻게 되고 많으니 미혹된다. 이로써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모범이 된다.” 王弼, op., cit., p.157. “曲則全, 枉則直(正) , 窪則盈, ?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 抱一爲天下式”. 왕필은 ‘抱一爲天下式’ 이라고 기록하지만, 帛書甲乙本과 北大本에는 ‘執一爲天下牧’이라고 되어있다. “성인은 ’일‘을 가지고 천하를 보살핀다.”는 뜻의 ‘牧’ 대신에 ‘式’을 써서 ‘모범이 된다.’는 것으로 풀었다.
---「노자의 정치 철학」중에서

I. 들어가는 말
조지아는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국가는 아니다. 조지아의 원래 명칭은 러시아어로 그루지야(Gruzija)였다. 그루지야는 재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소비에트에 병합되어 소비에트 연방 국가 가운데 하가 되었다. 스탈린이 그루지야 출신이었다. 그루지야는 우리나라만큼이나 내적 혼란과 갈등 그리고 분쟁, 그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영토전쟁과 식민지화 등이 끊이지 않았던 국가이다. 갈등과 분쟁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아직도 치료되지 않은, 여전히 치료 중인 안타까운 국가이기도 하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독립한 그루지야는 친서방 정책을 표방하면서 영토문제와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러시아와도 교류하는 이중적인 외교 관계를 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생존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실리적 외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 명칭은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있던 샤카쉬빌리 대통령이 2009년 그루지야를 조지아로 호칭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공식 요청하였다. 그 후 그루지야를 조지아로 부른다고 보면 되겠다.
이 글에서는 조지아가 어떤 과정을 겪으며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와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되었는지,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독립하여 체제를 다듬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조지아의 체제전환 과정을 살펴보겠다.

II. 그루지야의 위치와 역사
1. 지정학적 위치
조지아는 지리적으로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와 서쪽으로는 흑해 중간에 있는 나라이다. 북쪽은 러시아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남서쪽은 이슬람 국가인 터키와, 남쪽은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와, 그리고 남동쪽은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 경계를 하고 있다. 조지아의 북서쪽에는 압하지야(Abkhazia)가 있고, 북쪽 정 가운데 러시아 국경 사이에 남오세티야(South Ossetia) 공화국이 자리 잡고 있다. 남서쪽에는 아자리아(Ajaria)가 있다.

과거에 조지아는 비단길이 통과하는 지역으로 동서 문물교류의 요충지였다.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불교를 접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그리스 로마의 영향은 물론이고 기독교를 접하여 수용하였고 이로 인해 친서방적 경향을 나타냈으며, 중세 이후부터는 페르시아와 터키의 영향을 받았다. 정세진, “그루지야 역사의 공간과 접변 연구? 동과 서, 북방의 경계를 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 제12권 제1호 (2008): 330, 331.

조지아의 지정학적 위치는 흑해로 진출하려는 강대국의 전략 지역이 될 가능성이 크고 주변 강대국과의 영토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위치로 보인다. 마치 한반도가 러시아, 중국,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더구나 조지아 영토 안에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아자리아 공화국이 자리 잡고 있는 형국은 세 민족과 민족갈등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영토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2. 그루지야의 시작과 러시아 지배
조지아는 그루지야 종족이 이주해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에는 동쪽의 카르틀리(Kartli) 공국과 서쪽의 이베리아(Iberia) 공국이 있었다. BC 4세기에 그루지야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루지야는 BC 1세기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AD 334년 미리안 3세 국왕이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그 후 중세시대에 페르시아와 투르크 민족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기독교 유산과 전통을 유지했다. 1236년 몽골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게 되자 그루지야의 친서방 정책
---「조지아의 체제전환: 속국에서 독립국으로」중에서

Ⅰ. 들어가는 말
내가 유학 생활을 시작했던 1999년에 한국 개신교는 천만 성도를 이야기할 정도로 성장의 달콤한 끝물을 마시고 있었고, 그 당시 2백만 성도의 가톨릭교회를 포함하면 전체 인구의 사 분의 일이 그리스도인이라며 교세를 자랑하였다. 세계 10대 초대형 교회 명단에 한국의 교회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서구의 대학에서 공부를 해보니 서구 학자들이 한국의 그리스도교 하면 떠올리는 것은 천만 성도나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아니라 한국에서 탄생한 ‘민중신학’이었다. 그 당시 군 출신 노태우 대통령을 끝으로 정치에서도 군부독재 대신 문민 대통령 시대가 이어져 오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민중신학에 관한 관심과 열기는 수그러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민중신학에 기반을 뒀던 민중교회가 제도권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성장에 실패한 원인이 가장 컸다. 사실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서구신학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 한국의 여러 종교 가운데 가장 서구화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진보 또는 보수 진영의 유수 신학대학의 교수들이나 목사들은 대부분 서구 신학교에서 공부하였기에 한국에서 시작된 민중신학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필자 또한 한국에서 학문적으로 민중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중신학에 관해 질문하는 외국 친구들의 관심에 놀랐다.

그때 필자는 한국의 신학은, 즉 서구신학이 아닌 한국에서 발생한 신학은 민중신학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서구 사회에서 민중신학의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알리고 활발하게 한국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조지 메이슨 대학교(George Mason University)의 노영찬 교수의 소논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노영찬은 한국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있는 유니언 장로교 신학교(Union Presbyterian Seminary)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산타바르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Barbara)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지아 메이슨 대학의 정교수로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Young-Chan Ro, Dao Companion to Korean Confucian Philosophy (2019); The Korean Neo-Confucianism of Yi Yulgok (Albany, 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9); The Place of Ethics in the Christian Tradition and the Confuncian Tradition : A Methodological Prolegomeneon (Patiala: Punjabi University. Guru Gobind Singh Department of Religious Studies, 1965); Young-chan East-West Religions in Encounter Ro, Minjung Theology : Theology of Transformation and Transformation of Theology (1987) 등이 있다.

이 논문은 한국의 문화, 영성 및 사회적 가치의 전체 맥락에 관한 성찰의 결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한국 민중 신학을 설명한다. 이 한국적 신학은 70년 이후 아시아와 서구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노영찬은 그의 논문을 통해서,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의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보여주려 했다.”라고 말한다. Young-Chan Ro, “Revisioning Minjung Theology: The Method of the Minjung,” in Lift Every Voice : Constructing Christian Theologies from the Underside, ed. Susan Brooks Thistlethwaite and Mary Potter Engel (Maryknoll: Orbis Books, 1998), 51.

안병무, 서남동, 김용복과 같은 유명한 1세대 민중 신학자들의 글을 다루지 않고, 길지 않은 노영찬의 논문을 다루는 것은, 노영찬이 서구 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민중신학의 의미와 중요성을 논쟁하면서 영어로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논문은 민중신학에 대한 서론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아서, 나는 먼저 민중신학의 배경을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한국은 36년간 일본 제국주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를 받다가 1945년 독립했다. 독립의 기쁨도 잠시, 소련과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냉전’이라는 이념 대결의 희생양으로 1948년에 남과 북으로 공식적으로 분단되었다.Chang-Nack Kim, “Korean Minjung Theology: An Overview,” Register (Spring 1995): 2.

분단 상황은 남과 북의 민주화, 경제발전, 평화운동을 가장 심각하게 저해해왔다. 그 후 한국 민중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몰아냈지만, 곧이어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통일에 관한 운동과 민주화는 다시 후퇴하였다. 박정희는 남한의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경제발전’을 추진하였다.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경제발전계획은 사실, 4·19 혁명 이후 혁명 정부가 세워놓은 장기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수행하는 데 사용된 정책은 농민과 공장 노동자 모두의 희생에 기초했다. 소위 말하는 ‘저임금·저곡가’ 정책으로 인해 한국의 농경사회는 궁핍해졌고,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이주해야 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신생자본가들은 양질의 저임금 노동자들을 많이 필요했으므로,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은 도시의 하층 계급을 형성하여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서 힘든 일을 하면서도 매우 낮은 임금을 받았다. 그들은 달동네로 지칭되던 서울과 대도시의 낙후된 지역에서 동물처럼 살도록 강요받았다. Ibid., 3. 이 가혹하고 비참한 노동 환경 속에서 한 젊은 노동자이자 성실한 천주교 신자인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조영래, 『전태일평전』, 개정판(서울: 돌베개, 1991), 283.

전태일은 청계천에서 미싱공 보조로서 노동자의 길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공장에서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고 그들의 일을 도왔다. 곧 그는 모든 자본가가 “노동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고, 관계 당국에 “노동법”에 근거해서 노동자들의 부담을 줄여줄 것을 청원했다. 그러나 그의 청원은 철저하게 무시당했고, 마침내 그는 자본가와 정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노동법은 명목상의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영래 변호사가 민주화운동을 하다 경찰의 수배를 받아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3년 동안 쓴 전태일 평전을 참조하라. Ibid., 118-44.
---「민중신학과 민중운동의 중요성」중에서

서 언
인류사에서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찬란한 문명을 지니며 세계를 중화본위로 지배하였다. 그러나 근세 말에 청조는 1840년 아편전쟁으로 부터의 본격적인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서 참담하게 무릎을 꿇고 전락하여야만 했다. 오늘날 중국은 과거의 잠자던 사자와 비참하였던 반식민지 상태에서 완전히 환골탈태하여 바야흐로 이제는 세계의 슈퍼파워인 미국과도 국력에 있어 현실적인 각축과 경쟁을 하는 중국굴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여기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중국인민들의 각고의 노력 및 투쟁과 더불어 그들의 국부요 최고의 지도자들로 중국민족을 이끈 손문(1866~1925)과 모택동(1893~1976)의 이념과 지도력을 마땅히 그 공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제 본고에서 살펴보겠지만 손문은 중국인민을 흩어진 모래알(散沙)에 비유하였다. 그러면서 손문은 제 2의 태평천국의 홍수전(1814.1.1~1864.6.1.)이 되고자 새롭게 중국혁명을 꿈꾸며 그 혁명을 실현시키고 성공시키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나름대로의 깊은 인간이해를 추구하여 중국인민을 단결시키며 그로써 이당치국- 강력하고 희생적이며 혁명적인 정당을 통한 중국의 혁명을 시도하였다. 그는 비참하였던 청조 말기에 일찍이 태평천국을 그리워하면서 공화혁명을 꿈꾸고 드디어 실현시킨 중국의 국부요 신해혁명을 완수한 혁명가 손문의 혁명개념과 인간이해를 파악하려 한다. 2025년 3월 12일은 1866년 11월 12일에 태어나 향년 58세로 사망한 손문 사후 100년이 되는 기념해 이기도 하다. 대장정으로 표현되는 중국민족의 변화와 굴기(?起)와 대변화를 보면서 우리의 분단국가의 비참한 민족의 숙원이 하루 빨리 우리의 역사적 실천과 비범한 인식, 이념과 전략으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손문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바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손문의 혁명(革命)개념 - 태평천국, 신해혁명, 혁명건설
손문은 단순한 실천가와 혁명가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지난행이(知難行易)를 신념으로 하며 때문에 손문은 당대의 그 어떤 중국인보다도 외국의 발달한 문물과 지식에 통달했던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그 스스로 삼민주의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창안하고 주창한 사상가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당대의 강유위나 양계초와 같은 체제 내에서의 개혁이 아닌 봉건적인 제도와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를 근원적으로 바꾸는 공화혁명을 꿈꾸며 실천적으로 추구하였다. 혁명 손문은 일찌기 비밀리에 청조를 전복시키는 혁명운동을 본격적으로 획책하기 시작하여 1894년 북경, 천진, 무한 등지를 돌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1895년에는 드디어 광주에서 혁명의 첫 행동을 가졌다. 손문은 1895년 2월, 10월 26일에 군사봉기를 한다는 계획 아래 농학회를 조직하고 동시에 청천백일기도 고안하였다(佐伯有一, 野村浩一 外,1984.:154). 손문의 일파는 홍콩을 근거지로 하여 광동에 있는 성성(省城)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나 모의가 발각되고 이 계획은 비밀이 누설되어 70여명이 체포되고 11월 7일 처형되었다.

이같이 손문은 기존의 체제내의 개혁을 원하던 변법파와는 달리 이미 분명하게 군사혁명을 시험하고 있었고 변법파가 〈비(匪)〉라 칭한 삼합회를 비롯한 중국사회의 비밀결사와도 관계를 맺어 선원 등 노동자층이나 민간 자본가층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도 근원적으로 상이한 출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문은 Revolution을 일본식으로 옮긴 〈혁명〉이라는 뜻이야 말로 자신의 행동에 적합한 말이라 하여 사용하였고 그것은 종래의 기의(起義), 광복(光復)과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中國現代史,:154) 중국 역대 왕조는 항상 농민혁명으로 붕괴되었으며, 그 수많은 반란과 농민혁명은 대체로 통치집단에 의해서는 反亂으로 그러나 민중들에게는 기의(起義)로 일컫어 졌다. 때문에 오늘날의 중국 정부는 예를 들면 황건난이나 무창의 군사폭동을 '황건기의(黃巾起義:의로운 봉기)'와 ‘무창기의(武昌起義)’로 높여 부르고 있다. 그러나 기의보다도 혁명은 한 차원 더 다른 개념이다.

원래 혁명(革命)이라는 중국어 개념과 한자어의 출전은 주역(周易)의 혁괘상전(革掛象傳)-‘天地革而四時成 湯武 革命 順乎天而應乎人’ : 하늘과 땅이 바뀌어 네 철을 이루듯 탕(湯), 무(武)의 혁명은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듯이 하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의 요청에 응한 것이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미 맹자는 일찍이 왕도(王道)가 아닌 패도(覇道)일 때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가능함을 그의 사상에서 주장 한 바 있었다. ;서정식, 민중유교사상, 살림터, 2009, 268참조. 서양 개념으로 혁명에 해당하는 영어 revolution은 라틴어 revolutio가 어원으로 “回轉하다” 또는 “反轉하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Jack Goldstone, “Theories of Revolutions: The Third Generation, World Politics 32, 1980:425-53/Jeff Goodwin, No Other Way Out: States and Revolutionary Movements, 1945- 199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9 참조.

이 손문의 분명한 목표와 가치였다. 우선 그의 삶의 고백을 통하여 손문의 혁명개념과 인간이해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나의 혁명 건설사업은 세계의 진화의 조류에 근거를 두고 각국이 이미 실행한 선례를 받아들이고, 그 이해득실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다한 결과 그 소산으로 그 내용은 각각 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혁명방략을 정립하여 혁명진행의 도정을 3기로 나누어 정하였다. 곧 제1기는 즉 파괴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군법을 시행하여 혁명군으로 만청(滿淸)의 전제를 타파하고, 관료의 부패를 소제하고, 풍속의 악습을 개선하고 노비를 불평등에서 해방하고, 아편의 유독을 씻어 버리고, 풍수의 미신을 근절하고, 국내 세관의 장애를 철거하는 것 등, 비정일소의 파괴사업을 담당, 수행케 한다. 제 2기는 즉 과도기이다.

이 기간에는 약법(約法)을 실행하여 지방자치를 건설하여 민권의 발생을 촉진한다. 1현을 자치의 단위로 하여 현 밑에는 향, 촌의 2구를 분설하여 현이 이를 다스린다. 각 현은 적병이 소탕되고 전쟁이 정지된 날로 약법을 반포하여 인민의 권리, 의무와 혁명정부의 통치권을 규정한다. 그 기간은 3년을 한도로 한다. 3년의 만기 후, 인민은 자기 현의 관리를 선거한다....민국창건의 당초, 나는 혁명방략의 시행을 극력 주장하였고, 혁명건설의 목적을 달성하여 삼민주의 정치의 실현을 기했으나 우리당의 많은 인사들은 입을 모아 이것을 불가하다고 했다. 나도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이를 설명하고 혹은 논박을 가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이상을 매우 높다고 단정하고 행이지난(行易知難)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호라, 어찌하여 나의 이상이 높기 때문이라고 하는가. 당시 당원의 지식이 저급한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여기에서 나의 마음은 흐리고 뜻은 냉각되었다. 혁명이 가지는 파괴와 혁명이 가지는 건설은 물론 상관관계에 있고, 서로 보완하여 실행되어야 한다.”(孫文, 〈建國方略〉, 孫文全集, 中卷, 81-82.)

손문은 그가 20대에 혁명에 뜻을 둔 이래 장구한 세월을 중국의 공화혁명을 위해 투신하고 투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패한 혁명가’라는 오명을 숱하게 들으면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백절불굴의 의지로 신해혁명을 이룩하였다. 그의 혁명과 관련한 고백은 다음과 같다.

“혁명 성공 이전 일찍이 나는 10회 이상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투쟁정신은 추호도 좌절된 바가 없었다. 민국 2년, 원세개가 이미 전국을 통일했을 때에는 나는 이미 정치에는 상관하지 않고 실업개발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 때에는 그는 암살수단을 써서 송교인을 죽였다. 나는 한 사람의 병사도 거느리지 않았으나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원세개 토벌을 결의하고 이를 절규하였다. 애석하게도 남방의 도지가 대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기선을 제압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토원군(討袁軍)의 실패 후 동지들은 투지 저상하여 감히 혁명의 재거를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원세개가 스스로 왕좌에 나가고 황제제도를 펼 것은 필연적인 추세인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이에 대비하고 당원을 각 성에 널리 파견하여 황제제도 반대를 제창하였다. 그런 까닭에 원세개가 그 뜻을 아직 펴기 이전에 이러한 반대는 이미 인심을 고취하고 반대케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그리고 일단 황제제도가 발해지자 전국이 즉시 일어나 이를 박멸하였던 것이다.”(孫文, 〈建國方略〉, 孫文全集, 中卷, 84.)

손문에게 있어서 혁명은 과거 수 천 년의 중국의 봉건적인 제도와 황제의 지배, 특별히 만주족이 지배하던 낡은 체제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새롭게 공화민주주의를 혁명적으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손문(孫文)의 혁명개념과 인간이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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