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삶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매일 아침 지역별 감염자 수를 발표하는 뉴스, 서로를 감시하는 듯한 시선 속에서 무기력한 날들이 지속됐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 갈 때쯤 친구와 나눈 여름날의 대화가 문득 떠오른 이유는 인스타그램에서 본 해시태그 때문이었다. 자기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머리맡 조명 하나만 켜둔 채 휴대폰을 쥐고 침대에 누워 엄지손가락으로 재빠르게 사진을 넘기다 지인이 올린 여행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 밑에는 별다른 서사 없이 과거, 추억 그리고 회상을 뜻하는 단어 ‘#throwback’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아, 이 단어가 이토록 아련하고 소중하게 느껴질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을 바쁘게 오가던 비행기의 모습은 뜸해졌고 우리는 집앞 카페에 나가는 일조차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던 그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스로우백throwback’이 지닌 힘에 감탄했다. 즐거웠던 순간을 추억하고 그때를 함께해 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연결되기를 원했다. (중략) 여행은 추억이라는 형태로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사진 하나만 가지고도 하고 싶은 말들이 콸콸콸 쏟아져 나온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눈빛을 보면 그는 이미 사진 속 여행지에 가 있다. 사진 속의 소리와 냄새, 촉감까지 모두 전달하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야기하는 사람만 기억 속의 여행지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같이 데려갔다 온다는 것이다. 여행을 말하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함께 추억하는 마음. 우리 삶을 촘촘히 채우는 이 마음 때문에 다시 여행을 꿈꾸고, 기록하고, 그리워한다고 믿는다.
---「프롤로그」중에서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열정만큼이나 다른 이들에게 성공한 내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욕심과 두려움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번역가다운 일을 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면서 불안은 더 커져만 갔다. 그때의 나는, 목적지의 이름을 되뇌며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을 거라 믿으면서도 ‘실시간 탐색’이라는 명목하에 경로를 수정하겠다고 떠들어대는 지도 앱을 불안하게 들여다보고, 차마 앱을 지울 수는 없어서 휴대폰을 꼭 쥔 채 이곳저곳을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는 여행자와 같았다. 잘될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수시로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할 만한 일이 없는지 검색해 보면서,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품은 양면적인 일상을 보냈으니까.
--- p.25
우리는 행복하냐는 질문 혹은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하기 전에 온 힘을 다하여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떠올리는 것 같다. 매일 파티를 하듯 세상만사 걱정 없이 사는 삶을 꿈꾸지만 사실 그런 삶은 없다. 그것이 행복이라면 우리는 행복을 평생 맛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 p.48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매 순간 플랜 B를 가슴속에 품고 산다면 참으로 든든하겠지만 차후 대책을 세우느라 소중한 지금을 놓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 대신 따스한 햇살, 파아란 하늘, 런치 박스를 든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의 분주함,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발랄함을 눈과 귀로 느끼기로 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은 오로지 지금 그 순간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다. 소중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
--- p.56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한 가지 면만 보고 쉽게 판단할 때가 많다. 급한 일이 들어와서 주말에도 일을 하면 “프리랜서인데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네”라고 안쓰럽게 본다거나, 평일에 여행을 떠나면 “역시 프리랜서라서 팔자가 좋다”고 말하는 식이다. 프리랜서의 삶은 막상 살아 보면 매일 매일 역동적이고 다채롭다. 프리랜서의 삶을 한 가지 모습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 p.100
어쩌면 여행은 내 삶의 경계선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은 잠시나마 일상과 단절돼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니까.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지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돌볼 수 있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힘들었던 마음을 달래고 나면 전보다는 사람들한테 덜 상처받는다.
--- p.102
스스로 정했던 마감 기한을 여러 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고, 더 멋지고 깔끔한 번역문을 내놓으라며 내가 나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던 때였기에 이로 인한 자책감, 주변의 상황을 모른 척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피로감이 몰려 내 감정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세상에. 이러다간 말 그대로 미쳐 버릴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친 순간, 반짝이는 전구처럼 휴대폰의 ‘비행기 모드 버튼’이 떠올랐다. 해외여행을 가려고 비행기를 탈 때나 누르던 바로 그 ‘비행기 모드 버튼’. 팬데믹이 시작되고 2년 동안 비행기를 탈 일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버튼.
---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