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앞에 있는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 푸성귀를 심었다. 싹을 틔워보려고 씨앗도 샀다. 상추며 깻잎이며 쑥갓이나 겨자채며 바질도 심었다. 비 소식이 잦아서 물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쑥쑥 자랐다. 잘 자란 잎을 마당에서 바로 따와서 씻어다가 현미밥에 생양파와 두부, 된장을 곁들여 쌈 싸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연하고 신선하고 아삭거리는 맛이 꼭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비건 지향인으로 산 지 2년이 넘었지만 야채에 밥을 싸 먹을 때면 세상에 내가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사흘에 한 번씩 집 앞으로 수박이 도착했다. 여름이 왔다는 뜻이다. 냉장고에 시원한 수박이 없는 여름은 추방이다. 슬슬 봉숭아를 심을 시기가 다가온다. 나에게 여름이란 봉숭아물을 들인 손끝이다. 손톱이 자라나서 빨간 봉숭아물이 위로 위로 올라가 결국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꼭 천천히 해가 지는 것 같았다. 봉숭아꽃이 필 때마다 따서 모아두었다가 ‘오늘인가?’ 싶으면 돌절구에 백반을 넣고 꽃을 찧었다. 달이 통통하게 살찐 밤이었다. 손톱 위에 이겨진 꽃잎을 얹고 랩으로 싸고 실로 돌돌 감아 리본을 묶었다. 함께 물들일 사람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지난해와 지지난해는 혼자서 열 손가락을 다 묶을 수 없어 이틀에 나눠 낑낑대며 물을 들였다. 다음 날이면 살인마처럼 손발이 빨갰다. 손톱 가득 빨간 석양이 타올랐다. 여름이 한창이었다.
--- p.18~19,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중에서
팥빙수가 먹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삶은 팥 통조림을 샀다. 작년에는 직접 팥을 사다 불려서 팥 앙금을 삶느라 고생을 했기 때문에 올해는 용의주도하게 인터넷으로 주문한 것이다. 팥 통조림은 업소용밖에 판매하지 않아 가장 작은 게 축구공만 했다. 집에서 팥빙수를 해 먹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빙수를 열 번도 더 해 먹어도 남을 것 같아서 먹을 만큼만 덜고 나머지는 나누기로 했다. 먹을 것과 나눌 것을 잘 소분해서 담고 당근마켓에 무료 나눔 글을 올렸다. 보존제가 들어가지 않은, 방금 개봉한 신선한 팥입니다, 하고 적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지금 빵을 먹고 있던 참인데 발라 먹고 싶다고 나눔을 신청했다. 금방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 가장 절실해 보이는 두 명과 만나기로 했다. 수영을 하러 가는 길에 얼려둔 팥 봉지를 들고 나갔다. 땡볕에서 사람들이 내가 줄 팥을 기다리고 있었다. 팥이 든 봉지를 건네고 멀찍이서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스크 위로 눈꼬리가 휘어지는 것으로 보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냉동고에 꽝꽝 얼려둔 두유를 절구로 매우 쳐서 잘게 부쉈다. 거기에 팥 두둑이 덜고 시럽 조금과 콩가루를 아낌없이 부었다. 팥빙수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여름의 별미다. 두유로 만들어도 매우 맛있는데 아무도 그렇게 만들어 팔지 않아 직접 해 먹어야 한다. 얼얼하고 달큰하고 고소한 빙수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그릇 위로 숟가락이 정신없이 오갔다. 참 내, 벌써 몇 달째야.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여전히 뭘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안 나네. 나는 생각했지만, 당장 앞에서 팥빙수가 녹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팥빙수. 함께 나눠 먹는 팥빙수. 절벽에서 보이는 풍경은 오늘도 아름답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이상하게도, 전혀 가난해지지 않는다.
--- p.20~21,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중에서
복스럽게도 1년여 만의 폭설이 찾아온 날, 나는 저 네 가지를 비호하며 이사를 강행했다. 전날 밤 가장 아끼는 차를 꺼내 우려 마시며 정든 집과 작별 의식을 하고, 찻주전자와 찻잔을 뽀독뽀독 닦아 뽁뽁이로 싸두었다. 1인용 돌침대와 1제곱미터 크기의 벤저민 나무가 있음을 이삿짐센터에 미리 일러두고 추가 금액은 15만 원으로 쇼부를 봐둔 상태였으며, 아주 객관적인 통계에 의거하여 우리 고양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모(친구)를 고양이 담당으로 섭외해놓기도 했다. 몇 개월간 회사와 부동산을 오가며 저녁마다 집을 보러 다니고, 돈을 꿔 전세 계약금 5퍼센트를 현금으로 마련하고, 주말마다 집을 단장하고 집 보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반차를 몇 번이고 내가면서 대출 심사를 받고, 이사 비용을 마련하는 이 모든 과정을 혼자 겪으며 깨달은 것은 명료했다. 가난한 솔로 여성에게 이사란 명을 축내는 일이구나. 이사를 자주 하지 않는 삶이 곧 행복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나. 이사 비용을 갚는 데는 그 후로도 꼬박 1년이 걸렸다.
--- p.36~37, 「일력」 중에서
노동운동에 청춘을 바치고, 삶의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낸 나의 어머니 김한영 여사는, 내가 진로를 고민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걱정할 것 없어. 공장에 취직해!” 그녀의 말에 따르면 생산만큼 숭고한 노동은 없다. 실제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사람의 손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장은 어떤 노동보다 정직하고 뜻깊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평생을 공장에서 일하는 내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가 나의 가능성을 그 정도로 평가한다는 것이 무척 슬펐다.
--- p.40, 「일력」 중에서
다음 모임에는 이 코미디언의 쇼를 같이 보는 것으로 할까요? 같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말했다. “오늘 이걸로 끝인가요?” 그러자 방 안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깔렸다. 그게 내가 40분 만에 했던 첫 마디였기 때문이다. “무대 안 하나요? 저는 그런 줄 알고 준비해왔는데.” 사람들은 일제히 웅성거렸다. 네? 오늘요? 하지만 대본도 쓴 게 없는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아직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내가 말했다. “10분 정도 생각하고 아무 말이나 해볼까요? 지금 수다 떨듯이 한 사람당 딱 3분씩만요.” 당황하는 사람들 사이로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친목 모임은 싫어서요.” 이것을 스탠드업 코미디에서는 펀치 라인이라고 부른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배운 게 그거였다. 가장 오래 속했던 모임인 글방에서 유일하게 요구했던 것이 모임에 글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의당 코미디 모임의 지참금은 코미디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당연히 충격으로 질렸다. 방 안에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 p.53~55, 「일어나서 웃겨봐」 중에서
하여튼 그날 웃긴 얘기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슬프고, 이상하고, 진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 그제야 무대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보였다. (...) 마주 보고 했으면 당황스럽거나 눈물이 났을 이야기가 일어나서 했다는 이유로 너무 웃긴 얘기가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 우리가 웃으면 꼭 무언가가 승화되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보호해주는 어떤 기운이 생기는 것 같았다. (...) 최초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최초의 관객이 되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풀었다. 바로 앉아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코미디가 시작된 것이다.
--- p.55~56, 「일어나서 웃겨봐」 중에서
환승로를 덜렁덜렁 걷고 있는데 어떤 대머리의 할아버지가 빠르게 내 옆으로 바싹 따라붙더니 별안간 내 팔뚝을 만지기 시작했다. 정말 순식간에, 양손으로 팔뚝을 찰흙처럼 주물주물거리더니 앞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누가 보면 마치 내 팔뚝과 예약된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고 떠난 사람 같았다. (...) 3초 후에야 사태를 파악했다.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팔을 돌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그 사람이 주무르던 팔이었다. 마치 정월대보름에 쥐불놀이를 하듯이 오른팔을 허공에 마구 돌렸다. 그러고는 전속력으로 달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주어 그 뒤통수를 내리쳤다. 누군가를 때려본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나는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살면서 그렇게 달려본 적도 처음이었다. (...) 긴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 플랫폼의 맨 끝까지 질주해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긴 후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 p.67~68, 「모녀전철」 중에서
수영에 서투른 나는 수영장에서의 시간이 지루했다. 수영 비슷한 것을 시도하다가도 금방 지쳐서 엄마 등에 매달렸다. 나를 업고 걸으면 물의 저항이 더 세지니 운동이 더 잘된다는 명분도 됐다. 아줌마들은 다 큰 애를 왜 업고 다니냐며 질투 섞인 잔소리를 했다. “딸이라서요” 하고 대답하는 엄마의 얼굴엔 웃음이 만연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의 하루는 부러움을 살 만했다. 가야 할 직장도, 학교도 없었다. 챙겨야 할 남편이나 자식도 없었다. 알람도 없었다. 아침이면 느긋하게 일어나 밥을 챙겨 먹고 설렁설렁 버스를 타고 수영장과 목욕탕에 와서 시간을 보내다 산책을 하고 잠이 들면 그만이었다. 돈 걱정도 없이 쫓기는 것도 없이 그저 커다란 스포츠센터의 골드 회원권과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한강 길을 덜렁덜렁 오갔다.
우리는 물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삶에 이런 날이 오다니. 우리가 골드 회원이라니. 돈 많은 사람의 삶이 이런 걸까. 그런데 이 시간이 비로소 몸이 다 망가져야만 오다니. 그것도 겨우 한 달만 오다니. 그래도 오다니.
--- p.169, 「엄마와의 한 달 살기(2) - 엄마의 진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