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이라는 말에는 훈민정음 창제가 세종이 직접 한 일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을 세종 혼자서 창제한 것인지 신하들인 집현전 학사들과 공동으로 창제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에서 ‘어제(御製)’의 의미는 세종이 친히 지었다는 뜻입니다. ‘어제(御製)’, ‘어정(御定)’, ‘어찬(御撰)’ 등이 흔히 쓰이는데, ‘어정’은 임금이 명령하여 지은 것을 말하고, ‘어제’와 ‘어찬’은 임금이 친히 지은 것을 말합니다. 《누판고(樓板考)》의 범례에 “어명으로 찬한 것은 ‘어정’이라고 하고 친히 찬한 것은 ‘어찬’이라고 한다(御命撰曰御定 親撰曰御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세종이 친히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문자 이름인 ‘훈민(訓民)’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훈민’이란 용어는 주로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철의 〈훈민가(訓民歌)〉와 같은 글도 있지만, 그 ‘훈민’은 일부 백성이지 백성 전체는 아닙니다. 백성 전체를 뜻하는 의미로 신하가 ‘훈민’이라는 용어를 썼다면 아마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을까요? 또한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입니다. ‘가르친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한자로 ‘교(敎)’와 ‘훈(訓)’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敎)’를 쓰지 않고, ‘훈(訓)’을 쓴 것일까요? ‘교’와 ‘훈’의 새김은 ‘가르치다’이지만, 실제로 ‘교’와 ‘훈’은 그 의미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교’는 주로 남자에게, ‘훈’은 주로 여자에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pp.23-24 「《한글 이야기》 1권 한글의 역사」
오늘날 한글 자모의 배열 순서는 결국 18세기 중반에 결정된 것을 후대에 그대로 인정한 결과입니다. 그것도 매우 과학적이고 언어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하여 배열된 것입니다. 영어 알파벳의 ‘a, b, c, d’ 등의 배열 순서나 한자 부수인 ‘一, ?, ?, ?, 乙’ 등이나 획수에 따른 한자의 배열 순서는 이러한 원칙에서 한참 벗어납니다. 과학적이지 않지요. 한글을 과학적인 문자라고 하는 사실을 한글 자모의 배열 순서의 변화 과정에서도 쉽게 증명할 수 있지 않았나요?--- p.57 「《한글 이야기》 1권 한글의 역사」
훈민정음 창제 시 만들어진 한글 자형이나 서체는 각 한글 자모의 변별력이나 조합, 각 자모의 공간 배정 등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글자를 쓰고 읽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 자연히 그 자형이나 서체에 변화가 생깁니다. (……) 직선을 최대한 곡선화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서체로 만들어 낸 것이 궁체입니다. 궁체는 ‘훈민정음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문자는 의사만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도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글 서체를 계속 개발하고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한글 서체를 어떻게 유용하게 활용해 왔는지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pp.123-124 「《한글 이야기》 2권 한글과 문화」
목판과 소반, 제기 사발, 보자기, 해주 항아리, 떡살, 기와 등에 한글이 새겨져 있거나 쓰여 있는 경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생활 문화재에 한글이 쓰여 있거나 새겨져 있습니다. 대개 그릇이나 소반 등에는 목록과 개수를, 항아리에는 항아리를 만든 사람 이름을, 떡살에는 명칭을, 그리고 보자기에는 아들과 자손이 창성하기를 발원하는 기원문을 한글로 써 놓았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생활 문화재를 만든 해를 반드시 써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만든 해는 이 문화재들 모두에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한글은 흔히들 한자에 밀려 천대를 받아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천대를 받으면서도 실제로는 생활 속에서 명맥을 끈끈하게 이어 오며 사용되어 왔습니다.--- p.176 「《한글 이야기》 2권 한글과 문화」
제사상을 차리는 예를 익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쉽게 익히기 위해서 탁와 정기연 선생은 ‘습례국 놀이판’을 창안하였습니다. ‘습례국’을 만들어 즐겁게 그 예를 익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같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한글을 써 놓았습니다. 한글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대부들은 한자와 한문을 주로 썼고, 서민들은 한자나 한문을 잘 몰라서 주로 한글을 썼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문자를 통한 계층 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탁와 문집에 나오는 ‘습례국도설’을 보면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대부들은 한자와 한문을 숭상했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로 써서 의사소통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사대부들도 한글을 잘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한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글을 통해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협동하고, 협동을 통하여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 pp.347-348 「《한글 이야기》 2권 한글과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