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옥이가 살고 싶은 집을 그려줄게.” 오른손에 연필을 든 인호가 성옥을 반히 바라보며 말했다. 성옥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그림으로 그려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 그러고는 인호가 성옥을 쳐다보았다. 집이 아니라 성옥의 초상화를 그리려는 것처럼. “집 짓는 남자니까.” 그가 중얼거렸다. --- p.53
성옥이 자신을 남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느끼긴 했다. 자신도 성옥을 여성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성의 호기심을 넘어 그리고 본능의 깊은 켜들을 지나쳐, 성옥의 생의 원형질 같은 것으로 자신의 혼이 스며드는 느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수복지구 기념관의 도면을 상상할 때 성옥의 불행과 슬픔과 고통이 상징부호처럼 느껴지곤 했다. --- pp.62~63
나 같은 소설가는 타인의 상처나 고통엔 민감하면서 그것을 어루만지고 함께하는 것엔 인색하니, 이해와 더불어 용서를 빈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있지도 않은 것을 더듬어대는 ‘눈먼 기술자’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실제 삶에선 한없이 미숙하고 비굴하단 걸 고백하면 부끄러움이 덜어질까? (……) 성옥아. 넌 사는 것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산다는 것. 그것보다 더 소중한 이념이나 가치는 없다는 거, 이제 알지? 네가 직접 써준 시와 편지가 소설의 현실감을 살리는데 큰 도움이 됐다. 문득, 고맙다는 말이 구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