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의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역설적인지 아는가. 나는 다만 ‘자살 상황(condition suicidaire)’이라는 쉽게 풀기 힘든 모순을 따라가 보고 그게 어떤 것인지 증언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언어의 힘이 닿는 한.
---「서문」중에서
살아야만 한다고? 일단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다. (…) 자유죽음을 찾는 이는 누가 묻기도 전에 먼저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아니야! 혹은 둔중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한다. 살아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 나는 아니야! 나는 원치 않아. 밖에서는 사회의 법으로, 안에서는 ‘자연법(lex naturae)’으로 느끼도록 충동하는 강제 앞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사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나는 더는 인정하지 않겠어.
---「1장 뛰어내리기에 앞서」중에서
사회는 종족 보존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살을 거부한다. 여기에 다시 문명은 종교와 도덕을 덧붙인다. 이때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는 문명에 봉사하는 충직한 하인이다. 곡물 상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먼저 죗값부터 치르고 사회로부터 면허증을 교부받은 전문의에게 될 수 있는 한 빨리 상담을 받은 다음, 어디 회사라도 취직해 월급쟁이로도 얼마든지 살수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알아, 열심히 일하다 보면 막판에 다시 성공을 거머쥘 수도 있잖아.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중에서
내가 사는 게 오로지 죽기 위해서라면, 집을 짓는 게 완공 축제 때 허물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죽음을 피해 죽음으로 도망가고 싶을 뿐이야! 좀 더 생각을 정확하게 가다듬는다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존재의 어처구니없는 부조리함으로부터 도망 나와, 없음이라는 어이없는 불가사의함으로 사라진다!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중에서
내가 지금 떠올리는 개념은 심리학 이론과는 충돌할지 모르나 우리가 다루는 문제의 성격에는 훨씬 더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Todesneigung)’이다. 일단 이 말을 상형문자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자. 성향이란 무엇인가에 끌리는 것, 말하자면 추락하려는 성벽(性癖)이다. 식물의 줄기가 성장하면서도 땅으로 이끌리는 굴지성(屈地性)처럼 우리도 몸의 근원인 흙으로 끌리는 것이랄까. 이끌림은 동시에 거부의 몸짓인 혐오이기도 하다. 생명을 거부하는, 존재이기를 거역하는 혐오. 이는 일종의 태도거나,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태도의 포기다.
---「3장 손을 내려놓다」중에서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내 말은, 한편으로는 사회가 냉혹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자발적으로 인생의 고리를 끊고 나가겠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과열된 관심과 근심으로 소동을 떠는 이중성으로는,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가?
---「3장 손을 내려놓다」중에서
모든 자유죽음 계획은 그게 끝장을 본 것이든, 마지막 순간 낚아챔을 당해 실패한 것이든, 도와달라는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메시지다. 이런 메시지는 누군가를 상대로 쓰는 게 아니다. 누구를 향해 외치는 비명도 아니다. 아무런 표시가 없이, 묵묵히 건네지는 메시지는 생명 논리와 존재 논리에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고 경계를 넘어서는 그 순간에서조차, 의식을 마지막으로 불사르는 그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타인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타인은, 우리가 알고 있듯, ‘지옥’이다.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중에서
자살자는 고집 센 토론자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예’ 하는 말을 하며, ‘아멘’ 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지극한 존엄함에게,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한 풍문으로 자살자를 심판하는 세상에게! 평온한 바다와도 같은 감정으로? 시시각각 좁혀져 오는 사면의 벽들에 머리를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이럴수도, 저럴 수도 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겉보기에만 서로 배척할 뿐이다. 다만, 있지도 않은 저 하늘나라에 가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중에서
인간이 자신에게 목숨을 던져버리겠어 하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 비록 기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체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이제 거치적거릴 게 없다. 짐? 불과 몇 미터만 더 지고 가면 된다. 던져버리는 순간, 기분 좋게 취한 황홀함을 느낀다. 물론 술을 마신 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만족감이다. 이게 도피일까?
---「5장 자유에 이르는 길」중에서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은 거짓말에 속아 살지 않았다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살아냈다고 과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해 끊임없이 구축해야만 하는 진정성은 부단히 깨어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더 열심히 진정성을 따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휘리릭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게 진정성이다.
---「5장 자유에 이르는 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