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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의 글 | 유진목 ·004
| 서문 | ·009 | 1장 | 뛰어내리기에 앞서 ·017 | 2장 |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071 | 3장 | 손을 내려놓다 ·121 | 4장 | 나 자신에게 속하자 ·169 | 5장 | 자유에 이르는 길 ·215 | 옮긴이의 글 | 김희상 ·266 | 찾아보기 | ·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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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작가 알림신청Jean Amery,한스 차임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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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김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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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의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역설적인지 아는가. 나는 다만 ‘자살 상황(condition suicidaire)’이라는 쉽게 풀기 힘든 모순을 따라가 보고 그게 어떤 것인지 증언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언어의 힘이 닿는 한.
---「서문」중에서 살아야만 한다고? 일단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다. (…) 자유죽음을 찾는 이는 누가 묻기도 전에 먼저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아니야! 혹은 둔중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한다. 살아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 나는 아니야! 나는 원치 않아. 밖에서는 사회의 법으로, 안에서는 ‘자연법(lex naturae)’으로 느끼도록 충동하는 강제 앞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사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나는 더는 인정하지 않겠어. ---「1장 뛰어내리기에 앞서」중에서 사회는 종족 보존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살을 거부한다. 여기에 다시 문명은 종교와 도덕을 덧붙인다. 이때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는 문명에 봉사하는 충직한 하인이다. 곡물 상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먼저 죗값부터 치르고 사회로부터 면허증을 교부받은 전문의에게 될 수 있는 한 빨리 상담을 받은 다음, 어디 회사라도 취직해 월급쟁이로도 얼마든지 살수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알아, 열심히 일하다 보면 막판에 다시 성공을 거머쥘 수도 있잖아.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중에서 내가 사는 게 오로지 죽기 위해서라면, 집을 짓는 게 완공 축제 때 허물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죽음을 피해 죽음으로 도망가고 싶을 뿐이야! 좀 더 생각을 정확하게 가다듬는다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존재의 어처구니없는 부조리함으로부터 도망 나와, 없음이라는 어이없는 불가사의함으로 사라진다!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중에서 내가 지금 떠올리는 개념은 심리학 이론과는 충돌할지 모르나 우리가 다루는 문제의 성격에는 훨씬 더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Todesneigung)’이다. 일단 이 말을 상형문자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자. 성향이란 무엇인가에 끌리는 것, 말하자면 추락하려는 성벽(性癖)이다. 식물의 줄기가 성장하면서도 땅으로 이끌리는 굴지성(屈地性)처럼 우리도 몸의 근원인 흙으로 끌리는 것이랄까. 이끌림은 동시에 거부의 몸짓인 혐오이기도 하다. 생명을 거부하는, 존재이기를 거역하는 혐오. 이는 일종의 태도거나,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태도의 포기다. ---「3장 손을 내려놓다」중에서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내 말은, 한편으로는 사회가 냉혹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자발적으로 인생의 고리를 끊고 나가겠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과열된 관심과 근심으로 소동을 떠는 이중성으로는,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가? ---「3장 손을 내려놓다」중에서 모든 자유죽음 계획은 그게 끝장을 본 것이든, 마지막 순간 낚아챔을 당해 실패한 것이든, 도와달라는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메시지다. 이런 메시지는 누군가를 상대로 쓰는 게 아니다. 누구를 향해 외치는 비명도 아니다. 아무런 표시가 없이, 묵묵히 건네지는 메시지는 생명 논리와 존재 논리에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고 경계를 넘어서는 그 순간에서조차, 의식을 마지막으로 불사르는 그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타인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타인은, 우리가 알고 있듯, ‘지옥’이다.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중에서 자살자는 고집 센 토론자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예’ 하는 말을 하며, ‘아멘’ 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지극한 존엄함에게,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한 풍문으로 자살자를 심판하는 세상에게! 평온한 바다와도 같은 감정으로? 시시각각 좁혀져 오는 사면의 벽들에 머리를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이럴수도, 저럴 수도 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겉보기에만 서로 배척할 뿐이다. 다만, 있지도 않은 저 하늘나라에 가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중에서 인간이 자신에게 목숨을 던져버리겠어 하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 비록 기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체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이제 거치적거릴 게 없다. 짐? 불과 몇 미터만 더 지고 가면 된다. 던져버리는 순간, 기분 좋게 취한 황홀함을 느낀다. 물론 술을 마신 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은 만족감이다. 이게 도피일까? ---「5장 자유에 이르는 길」중에서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은 거짓말에 속아 살지 않았다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살아냈다고 과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해 끊임없이 구축해야만 하는 진정성은 부단히 깨어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더 열심히 진정성을 따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휘리릭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게 진정성이다. ---「5장 자유에 이르는 길」중에서 |
살아서 죽음 속에 갇혀 지내길 거부한 사람
1978년 10월 17일 잘츠부르크의 호텔에서 한 남자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 그의 옆에는 고액의 장례비와 함께 호텔에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한스 차임 마이어(Hanns Chaim Mayer)로, 191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나치에 저항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 일로 마이어는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후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며 수감 생활을 했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된 건 독일이 패망한 1945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귀향하지 않았다. 이름마저 버렸다. 애너그램으로 성씨(Mayer)의 철자를 뒤바꾸어 아메리(Amery)라는 이름을 새로 가진 그는, 아우슈비츠 수감 사실을 숨긴 채 브뤼셀에서 기자와 작가로 활동했다(266~269쪽). ‘장 아메리’라는 이름이 마침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가 아우슈비츠에서의 고문 경험을 성찰한 《죄와 속죄의 저편》(1966)과 특히 자살을 논한 이 책 《자유죽음》(1976)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물론 출간된 당시에도 이 책이 자살을 주제로 한 최초의 책은 아니었다. 이미 ‘자살학(Suizidologie)’이라는 학문이 19세기부터 존재했고, 에밀 뒤르켐, 지크문트 프로이트, 장 배슐러를 비롯한 많은 학자가 자살을 연구한 책들을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죽음》은 출간 직후 동시대 지식인들에게 강렬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약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살’에 관련한 가장 뜨거운 문제작으로 거론된다. 선택을 결행한 자의 내면으로부터 서문에서 아메리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이 책이 시작된다고 못을 박는다. 그가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자살자의 마음, 특히 그들이 처한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자살이라는 문제의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자살 직전, 자살자들은 너무도 완벽하게 유일해서 다른 것과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자기만의 상황에 처한다. 이 상황에 대해 아메리는 ‘에셰크(echec)’라는 개념을 제시한다(89~92쪽).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인 실패’ ‘치욕스러운 좌절’을 뜻하는 에셰크 앞에서 자살자들은 자존과 존엄을 위해 자연법칙을 깨뜨린다. 그들에게 있어 이 ‘에셰크’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다. 그런데 어떤 상황과 조건이 ‘에셰크’로 규정되는가 판가름하는 것은 곧 개인 주관과 그가 속한 사회다. 그리고 양쪽의 판단은 늘 엇갈릴 수밖에 없다. 지금도 우리는 자살을 다룬 기사에서 언제나 이 ‘엇갈림’을 목격한다.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이렇게 별것 아닌 일로 죽다니.” 이에 대해 아메리는 우리 사회가 내리는 판단의 본질은 인간의 ‘기능성’에 있고, 종교와 도덕, 심리학과 정신분석은 그런 사회에 봉사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95쪽). 오히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고 단언하며 ‘삶’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되짚어보게 한다(119쪽). 물론 에셰크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치욕을 감수하며, ‘생물의 본능과 사회의 의무에 충실한 인간’으로, ‘죽음을 얻지 못하고 생명을 잃어버린 자’로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다(233~234쪽).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에셰크’에 주는 답으로서, 자존의 이름으로, 오롯이 자신의 결심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가 된다. ‘자기 자신을 살해’한다는 의미인 ‘자살’이란 말 대신, 자유롭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자발적인 행위라는 뜻의 ‘자유죽음’으로 대체하자는 아메리의 제안은 이렇게 설득력을 얻는다(20쪽). 삶의 부조리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들 ‘자기 세계 속의 자살자’의 마음을 들춰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번뜩이는 깨달음이 아닌 당혹스러운 의문이다. 살면서 부딪치지만, 한 번의 고민 없이 넘어갔던 삶의 모순들을 그가 집요할 정도로 되짚어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한 청년의 죽음을 두고 아주 불행한, 곧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아메리는 도리어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자연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끊임없는 생각거리를 던진다. 나이가 먹고 육체가 그 소임을 다했을 때 죽는 건 자연스러운 것일까? 50대 중반에 돌연 심장마비로 죽는 것은?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사망한 것은 자연사일까? 20대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는 것은? 아메리는 여기에서 더 깊숙이 사유를 밀고 들어간다. “태어난 이상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이렇게도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러니 우리는 ‘완공 축제 때 허물어질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83쪽). 이로써 우리가 가졌던 죽음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흔들린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인 사건으로만 알았던 죽음이 돌연 ‘주관의 선택’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메리가 보여주려는 건 삶과 죽음, 그리고 자살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세상이 주입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리학이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나르시시즘의 위기’ 혹은 ‘성장 과정의 결손’ 때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의심해 본 적이 있던가? ‘죽는 것만 못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그래도 살아야만 해!”라고 외치지는 않았던가? 그 몰이해가 우리 사회를 존엄을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곳으로 만든 게 아닐까? 아메리의 말에 반감이 불쑥 올라온다면, 우리에게 ‘그 어떤 상황에서든 계속 사는 것만이 옳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반증이다. ‘다수의 행동이 그 어떤 고민도 필요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이 열어주는 삶의 길 출간 이후 약 50년간 이 책은 ‘자살을 합리화한다’ 나아가 ‘자살을 부추긴다’는 오해를 받아왔다. 특히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전에 자살을 기도했다가 살아났고, 아메리가 이 책을 쓰고 2년 뒤에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는 뒷이야기는 그 의심에 더욱 신빙성을 더해줬다. 그러나 그것은 누명이 맞다. 아메리도 “변론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은 자유죽음을 찾는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현상만을 추적하는 과학적 연구에 보인 반작용일 따름”이라며, 단호하게 “그 같은 오해는 삼가달라”고 이야기한다(13쪽). 실제로 책의 후반부에서 아메리가 치중하는 것은 자유죽음의 ‘무의미함’을 밝혀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메리는 왜 이 공허한 죽음을 이토록 치열하게 사유한 걸까. 실존주의 사상을 비롯한 철학과 문학, 사회학, 심리학과 정치 이론까지 끌어오며 아메리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아메리가 ‘자유죽음의 현상학’을 통해 보여주려는 건 우리에게 내재된 편견이기도 하지만, 자살을 각오한 마음가짐 그 자체이기도 하다. 책 전반에 걸쳐 아메리는 자살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살자는 인간으로 누려 마땅한 존엄과 자유의 이름으로 존재의 법칙에 항거하는 사람이다. 자살자는 삶의 부조리에 부딪쳤을 때, 그 정체를 고민하며 온몸으로 끌어안는 사람이다. 자살자는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이다. 자살자보다 더 지독하게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자살자의 마음으로 인생을 사는 건 어떤가? 잠시 후 죽는다면, 아니 언제 죽을지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를 괴롭히던 눈앞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어떤 순간에도 나로서 살아갈 수 있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는 아메리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던 것이다. 이 책이 출간 이후 50년간 문제작으로 꼽혔던 이유는 자살 옹호라는 오독과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유했다는 정독(正讀)이 끊임없이 대립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곧 이 말은 자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50년 동안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유진목 시인의 말처럼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서 첫 페이지를 펼치는 독서를 권유해본다.’ 이번에는 당혹감이 아닌 깨달음을, ‘우리의 지평 앞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떠오르는 경험을 해보길 바라면서. |
생명의 존엄에 대해 사유하는 일은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일에서부터 시작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서 첫 페이지를 펼치는 독서를 권유해본다.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반드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죽음》은 우리가 죽음에게 가는 것과 죽음이 우리에게 오는 것의 다름을 이야기하는 책으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줄곧 이 문장에 멈춰 있다.
“세상은 여전히 있지만, 곧 더는 있지 않게 되리라.” - 유진목 (시인, 《작가의 탄생》 《거짓의 조금》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