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엘 리히터의 회화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발전해왔다. 1990년대는 추상회화의 자유로움을 실험하며 최대한의 시각 재료를 담은 화면을 구성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구상성과 서사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 시기는 사회적 이슈를 환각적이면서 거친 화풍으로 그려내 역사화의 성공적인 현대적 변주로 평가받는다. 작가는 2015년 이후로 추상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회화로 다시 한번 변화를 시도한다. 이때는 인체의 형태로 범위를 줄이고 몸의 동적 움직임에 주목하여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번 전시는 다니엘 리히터의 작품에서 서사가 본격화되는 2000년 회화부터 인체의 형상에 집중하는 근래의 회화까지 20여 년간의 여정을 소개한다. 제목 ‘나의 미치광이웃(My Lunatic Neighbar)’은 네이버(Neighbor)의 철자를 의도적으로 바꿔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는 작가 특유의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을 보여준다.
작가의 2000년대 작품들은 일종의 현대적 역사화로 볼 수 있다. 다만, 화면에서 해당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함으로써 해석에 있어 열린 구조를 취한다. 「투아누스, 2000」는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환각적 화면으로 묘사된다. 커다란 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여있는 화면은 경찰의 심문을 받는 사람들처럼 보이다가도 구애하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작가는 19세기 프랑스 회화의 기법을 참고하여 마약 중독자들이 모인 공원의 한 장면을 묘사했다. 화면은 사건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사람들이 엉켜진 모양새로 환영의 공간을 탄생시킨다. 「피녹스, 2000」는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동시에 벌어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작품은 독일 통일 10주년에 발표되었기에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도 보인다. 견고했던 사회 정치 구조가 균열 되는 지점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작가는 스스로 몸을 태우고 다시 살아나는 전설의 새 피닉스에 빗대어 몰락과 부흥을 반복하는 정치와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2011년 그려진 일련의 회화는 험난한 산세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낭만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던 시기 그려진 작품들로 이방인, 오리엔탈리즘, 모험, 영웅, 자연의 장엄함 등 낭만주의 문학과 미술의 클리셰들을 새롭게 재현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너를 돕는 건 내 본성에 어긋나, 라고 늑대가 말했다, 2011」는 벼랑 끝에 매달린 남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늑대의 모습이 등장한다. 화면은 자연스럽게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대표작을 떠올리게 한다. 안개로 휩싸인 산 정상에서 대자연을 내려다보던 한 남자는 벼랑 끝에 매달려 늑대에게 도움을 청한다. 작품 제목에서 늑대가 남자를 돕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밝히면서 위태로운 낭만과 현실에 부딪힌 자유와 꿈을 상기시킨다. 한편, 「헤이조, 2011」는 터번을 쓴 남자와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가 만나는 상황을 묘사한다. 19세기 문학에서 터번은 미지와 환상의 세계, 중동을 향한 서구인들의 궁금증과 모험을 의미하지만 911테러 이후 위협과 갈등의 상징으로 변모된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말보로맨의 전형이며 마초의 상징이지만 웰빙과 금연의 시대적 흐름으로 이제는 변해버린 과거의 낭만이다.
최근 작가는 강력한 색과 선으로 인물들의 행동을 단순하고 긴장감 있게 표현한다. 강한 실루엣과 원색 표현이 인상적인 「눈물과 침, 2021」은 1차 세계대전으로 다리 잃은 독일 두 소년 병사가 목발을 짚고 나란히 걸어가는 엽서 사진을 참조했다. 전쟁의 부조리와 슬픔을 상징하는 이 사진은 다니엘 리히터에 의해 각자 하나의 다리를 가진 두 사람이 겹친 모습으로 전환되어 펑크스타일의 화려한 나비나 휴머노이드처럼 역동적인 존재로 읽힌다. 전쟁의 상흔과 같은 드라마틱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선과 색의 화면이 다양하게 읽혀질 수 있도록 실험하는 것이다. 또한 「개쩌는 음악, 2018」에서도 세 개의 몸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명확한 신체의 이미지라기보다 구분되고 조각난 덩어리로 묘사된다. 살펴보면 벌린 입은 비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활동적인 다리의 형태로 펑키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혹은 신체끼리 얽힌 관능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신체의 이미지를 재료 삼은 작업은 선과 색 자체에서 오는 시각적인 스펙트럼을 늘려간다.
다니엘 리히터에게 사회 정치적 이슈는 지금도 작가의 주요 관심사지만 최근 작업에서 보면 서사성에서 벗어나 스타일을 단순화시켜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느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면 지루해 진다.’는 작가의 말에서 새롭고 깊이 있는 회화가 궁극적인 수단이자 목표인 작가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늘날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온 다니엘 리히터의 작품 세계를 조망해 볼 흥미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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