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자로서, 옛 친구들과 길을 달리하는 사상적 변절이라고 주저하는 불교 운동가들이라면 바로 ‘전환’의 가치가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다. 녹색, 생태, 생명, 평화, 전환의 패러다임의 강 건너편에 서면 달리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어서 건너오시라. 그리하여 더 많은 진보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 함께 노력해 주시길 바란다. 이제 우리가 하화중생 해야 할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머리말
오늘날 지속가능한 발전의 생태적 메시지는 인간이 지구상의 생태계의 한 일부분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모든 중심인양 지배하고 정복해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분석한다.
동물과 식물, 수많은 무생물적 자연에 대한 권리와 그들의 존재를 고려한 사회적 가치와 결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위기를 초래한 또 다른 이유라고 말한다. 생태적 관점에서 미래세대를 고려하지 않고 현세대들만으로 사회적 결정을 하며, 다른 생명과 자연의 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간 중심적 의사 결정구조가 바로 오늘의 민주주의의 한계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현세대주의에, 생태적으로 인간중심주의에 갇혀있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더욱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미래세대와 타 생명까지 고려한 생태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생태적 시각에서 진보란 없다
하나하나 낱 생명, 개체 생명만이 생명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의존하여 서로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자인 장회익 교수는 이것을 ‘온 생명’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생명으로 정의한다면 ‘불살생’을 계율로 하는 우리에게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동물을 죽이거나 곤충을 죽이지 말라는 말로만 해석할 것인가? 그것으로만 인식하기에는 불교의 가르침은 더 깊다. ‘온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돌, 바람, 물 등의 무생물도 낱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시스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낱낱이, 촘촘히, 중중첩첩히 연기되어 변화 상호 의존하는 이 시스템이 온 생명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거나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살생이다.---인드라망의 세계와 생태적 깨달음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자비 연민을 느끼며 나아가 그것을 뛰어넘는 대자비심을 실천하는 삶, 바로 그것이 불교가 생각하는 생태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이라도 인도적 위기일 때는 식량을 주고 치료해줘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인도주의’의 명제이다. 불교적 실천은 이미 나와 남, 나와 적을 구분하는 관념을 뛰어넘어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라는 구분을 뛰어넘는 대자비심으로 나가야 한다.---마음의 생태학과 현대인의 심리
근본은 아(我)와 적(敵)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의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목적이나 의도마저 갖지 않는 것이다. 무심(無心)한 상태이다. 무엇을 얻거나 이익을 보거나 승리하겠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상대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정진하다보면 목적은 어느덧 달성되게 된다. 아니 그 이상을 얻게 되며 이 과정에서 목표는 오히려 과정의 부산물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이익이나 무엇을 얻겠다는 손익계산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생태사회는 이분법적 사고를 부정하고 다양성의 사고를 지향한다. 자신은 천사라고 생각하고 상대를 악마라고 생각하는 이분법을 반대한다. 그래서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양성이다. 다른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과 가치의 절대성, 배타성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비폭력은 생태사회의 필수적 요소
사람 권리를 찾기도 어려운데 개나 짐승에게까지 권리를 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100년 전 미국의 노예주, 아니 그 훨씬 전에 귀족이나 노예주들이 바로 노예들을 향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또 1920년 전후 여성의 참정권이 있기 전까지 수많은 남자들도 바로 여자들을 향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차별받는 인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수많은 동물들이 고통을 받고 인간의 탐욕과 식욕을 위해 제명에 죽지 못한다면,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은 연기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우리에게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과보로 되돌아올 것이다. ---동물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그동안의 통일은 ‘합치는 것, 같아지는 것, 너를 없애는 것, 커지는 것,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은 동일(同一)이 아니다. 어쩌면 화일(和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서로 잘 통하는 통일(通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죽이는 통일’이 아니라 ‘살리는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 일방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의 통일이어야 한다. 현재의 과제뿐 아니라 미래과제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어가는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살리는 통일’은 균형과 조화를 통해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더 다양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은 지역과 지역이 어우러지고, 남한과 북한이 어우러지고, 동아시아의 국민들이 어우러지고, 미래세대와 생명이 어우러지는, 문명의 전환과 생명평화의 한반도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문명전환과 생태적 관점에서 꿈꾸는 통일과 평화
1972년 16세의 나이로 불교 국가 부탄의 4대 국왕이 된 지그메 싱에 왕추크 국왕은 GNP가 물질적 탐욕을 조장하고 자원과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부와 국민들이 경제적 부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소수만이 편안한 삶을 살고 있고, 반면에 사회적 약자들은 고통과 빈곤, 소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돈을 위해 자원을 착취하면서 환경을 파괴하고 급기야 전쟁과 갈등 대립이 발생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사회의 경제적인 발전과 개개인의 정신적, 영적 삶의 질을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가 통치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는 대안으로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총행복도)를 제안하였다. 그래서 그는 2006년까지 34년간 한결같이 이를 기조로 정책을 펼쳐왔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사례는 세계의 웃음거리였다. 히말라야 산맥 어딘가에 고립되어 세계적 흐름을 모르는 이상한 불교 왕국의 정책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누구도 웃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웃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있다. 자신들의 방식이 위기를 불렀고, 갈등과 분쟁을 초래한 것임을 깨닫고는 지금 전 세계가 앞다투어 히말라야 작은 왕국의 철학과 사회적 실천을 주목하고 있다. 더욱이 왕추크 국왕은 국민의 행복이 왕보다 중요하다고 하여 헌법에 기초한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키로 하고 왕권을 내놓아 평민으로 돌아가 더욱 감동을 주었다.---불교국가 부탄의 국민총행복(GNH)
대체로 일반인들은 “불교는 고기 먹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돌고 돌아와 보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수많은 중생을 살리고, 결국 지구 온난화를 막아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전 세계 인간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동물을 죽임으로써 만들어진 사람들 간의 살육과 대립의 에너지를 치유하는 것도 바로 불살생의 실천인 채식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미 채식이 중요한 관습으로 내려오고 있는 불교는 이제 시절의 인연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철저한 채식운동에 나서야 한다. 바루공양의 전통을 살려 음식물은 남기지 않는 빈그릇 운동, 식사를 거룩한 공양으로 여기고, 자신의 수행을 돌아보며 천천히 먹는 운동, 또한 만중생의 노고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은혜를 갚으며, 밥값을 하고 사는 삶의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자. 고기를 안 먹으면 힘을 쓸 수 없다고? 걱정 마시라, 풀만 먹는 소나 코끼리는 힘만 세다. ---채식이 인류를 구한다
생태주의, 생태라는 말은 바로 관계적 사고, 그물망적 사고이다. 공해(Pollution)나 환경(Environment)이라는 말로는 근본적 가치를 담을 수 없어서 ‘생태’, ‘생태주의(Ecology)’라는 더 깊은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사회정치에 대해 ‘녹색(Green)’이라는 정치적 표현을 쓴다. 녹색은 당연히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녹색’은 그 안에 환경과 생태주의를 포함하며, 여기에 더해 분권화, 비폭력, 사회적 책임,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 수많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그들을 위한 ‘돌봄’이라는 의미가 녹아들어 있다.
또한 녹색은, ‘청색’으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적색’으로 표현되는 사회주의가 하나같이 물질적 풍요만이 진보라고 생각했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생산력주의 사회를 만들어 오늘과 같은 위기와 절멸을 초래했다고 생각한다. 청색과 적색이 결국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해 이를 뛰어넘는다는 의미의 ‘녹색’이다.---생태사회를 위한 불교의 가르침
산중에는 반드시 사찰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토의 65%가 산인 이유도 있고, 산악신앙이 강했던 이유도 있었으며, 선불교가 들어와 구산선문을 열면서, 속세와 떨어진 산중에 수행처를 만들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혹독한 탄압을 받아 스님들은 한양의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평지사찰은 문을 닫고 산중사찰만 남게 되었고, 결국 절은 산속으로 내 쫓기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스님들은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위봉산성 등 산성을 짓는데 동원되었는데, 이를 지키고 유지하게 하는 역할도 산중에 사찰이 있는 이유의 하나였다. 또한 신라말 도입된 풍수지리설의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은, 산이 국가의 존망성쇠와 직접 관련이 되어있기 때문에 이름난 산에 사찰을 지어 산의 기를 지키고 허한 곳을 보강하고자 하였다.
금강산, 비로봉, 반야봉, 문수봉 등, 우리나라의 산 이름 모두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불교에서 산과 숲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절이 없는 숲과 산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지만, 숲이 없는 절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숲과 생명을 살려온 불교문화
정토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구성원은 현재 서울에 40여 명, 문경에 60여 명 등 약 10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께 기도와 발우공양, 법회와 사회활동을 해나가면서 초기 승가공동체의 삶을 구현하고자 한다. 정토회는 서울과 부산을 비롯하여 전국 60여 곳과 해외 17곳에서 법회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약 200여 곳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5~20여 명이 모여 진행하는 수행공동체 법회모임이다.
이들 정토행자들은 수행을 하면서 동시에 사회활동도 해야 한다. 정토회의 기구로는 매주 ‘깨달음의 장’과 ‘나눔의 장’이 진행되는 문경정토수련원이 있고, 사회단체로서는 환경기구인 ‘에코붓다(Eco-Buddha)’, 평화와 난민지원 기구인 ‘좋은 벗들(Good Friends)’, 국제개발지원기구인 ‘제이티에스(Join Together Society)’ 등의 사회단체가 있으며, 별도의 기구로 ‘평화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 두 불교공동체는 모두 새로운 불교의 모색이자 나아가 사회적 실험이고, 내부에 생태적 가치를 중요한 지침으로 하고 있는 공동체이다.---대안으로서 불교공동체의 실험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깨달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나누고 베푸는 삶은 초기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스스로 나눈다거나 베푼다는 의식까지도 끊어져 체화되어야 한다. 개인의 깨달음은 자신의 의식적 각성에서 시작해서 결국 사회적 깨달음으로 확장되어야 궁극에는 다시 자기 자신의 깨달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이러한 삶이 결국 자신의 삶을 구하고, 지구를 구하는 삶이 될 것이다. 불교가 미래의 종교라면 불자들은 그들의 삶으로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북경의 나비가 날갯짓하면 뉴욕에 태풍이 분다는 말처럼 작은 실천은 커다란 변화의 씨앗이 된다. 역사 속에서 격동의 변화도 처음에는 작은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다. 타인을 위한 삶이 실제로는 자신에게 더 큰 행복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생명살림을 위한 불자청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