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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

와글와글-0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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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128*182*20mm
ISBN13 9791197138249
ISBN10 1197138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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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대로 보지 못한 정원은 이제야 꼼꼼히 돌아보았다. 햇살이 눈 부셨다. 넓디넓은 정원 한편에 사람도 들어갈 만큼 큰 독이 엄청 많았다. 줄지어 선 술독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커다란 술독은 마치 미로처럼 끝없이 많고도 많았다. 그런데 술독 표면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이 많은 술독은 그저 장식품인 건가 싶었다. 안내문을 읽고서야 궁금함이 풀렸다. 발효를 위해 독 표면의 먼지를 일부러 닦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귀를 가까이 대면 뽀글뽀글 술이 익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고 했다. 그 안내문을 읽고 미로 같은 술독 사이를 다시 천천히 걸었다. 걷다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술독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닦아내야 깨끗해지는 유리창의 먼지도 있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술을 익게 하는 술독의 먼지도 있다. 만난 지 오래되어 이제는 소원해진 친구들을 생각했다. 명절 안부와 경조사 인사로 남은 그들과의 사이는 멀어진 것이 아니라 그처럼 먼지가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이에 쌓인 먼지는 어떤 것일까.
--- p.16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떠난 엄마는 이제 해답을 찾았겠지만, 나에게 이야기해줄 수 없으니 그 질문은 내게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다만 남겨진 나는, 훗날 내가 떠난 이후 남겨진 이들의 마음은 알 것 같다. 함께 하는 많은 시간, 행복한 이야기들이 '추억'이거나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할 것임을 이제 안다. 그러니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한마디 건네본다.
"같이 커피 한잔할까요?"
--- p.85

일어서서 베란다 창틀을 두 손으로 세게 감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의자를 밟고 일어섰다. 12층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과 내려다보는 집 앞 공원의 풀과 나무 그리고 벤치에 울컥했다. 네가 말한 동그란 달을 보기도 전에 눈물이 차올랐다. 글썽이며 더 높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파트 사이로 달이 동그랗게 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울퉁불퉁하여 못난 달은 멀리서 보면 매끄럽고 아름답다. 어두울 때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달은 오직 밤하늘을 배경으로 밝게 빛났다. 동그란 달이 이야기하듯 어둠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밝음이 있고 무언가 아름답다면 모난 면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 p.137

서태지와 아이들이 컴백하는 날이면, 저녁 자율학습 시간 전에 한 사람에게 부탁해서 음반 레코드점에서 사 오곤 했는데 나는 자처해서 그 일을 하곤 했다. 분명 귀찮은 일임에도 따끈따끈한 신보를 가장 먼저 만져볼 수 있다는 이유가 컸다.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이 발매되던 날, 친구들은 역시 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날은 많은 친구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몰래 가지고 왔었다. 앨범마다 놀라움을 선사하며 새롭고 신선한 사운드를 들려준 뮤지션에게 거는 기대가 컸었기에, 누구보다 더 빨리 듣고 싶었기에. 교복 안쪽 주머니에 모인 돈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S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 p.159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 아직 도망가지 못한 어둠들을 잡아서 제자리에 옮겨 놓는다. 어둠들은 무게가 각기 다르고 저마다 색마저 달라 알맞은 곳으로 보내줘야 한다. 어느 놈은 커튼 뒤로, 이놈은 침대 밑으로 넣어둔다. 가끔 처음 보는 놈이 나타나면 자못 놀라 어쩔 줄 모르고 고민하다가 밤새 잠들지 못할 때가 있다. 아침이 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으면 연필심에 숨겨 놓는다. 그래서 내 글은 간혹 남은 잔흔이 나오곤 한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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