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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문학 18

동서문학 18

: 꽃들의 체온

노기화 등저 | 몽트 | 2022년 06월 1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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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346쪽 | 153*224*30mm
ISBN13 9772671779004
ISBN10 26717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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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투정을 부리면
너울이 다가와 꿈은 크게 요동쳐
덜 깬 잠을 잡아 흔들지

어떤 고민이든 말해 봐
다 들어줄게
무심한 듯
빛줄기로 휘파람을 부는 등대
흔들리지 마라
네 꿈은 여기에 있어

수평선은 바람 몸살로 멀미하지
깊은 그곳 소리 없는 선율이 평화를 깨고
바깥세상이 궁금한 것들은
운수가 사나운 것들뿐

불빛 피리가 사선으로 너울을 다독이고
소리가 홀리 듯 꿈을 잡아끌지
---「윤은진 - 피리부는 등대」중에서

나사*가 달이 양수처럼 품은
물을 발견했다는 뉴스를 듣는 저녁
툭, 바닥으로 떨어진 서랍 손잡이
애벌레 같은 나사를 조이다 보면
우화羽化를 꿈꾸는 내 겨드랑이에도
문득 날개 한 쌍 돋아날 것 같은데
둥실, 떠오른 역마살이
무중력 오랜 잠의 가장자리에
발끝을 내려놓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거기 달의 치마폭 적막만이 어슬렁거리는 밤
쉬이 잠들지 못한 물방울 하나가
떠돌이 물방울 하나를 끌어들여
꿀벌처럼 뜨겁게 잉잉대다가
툭, 뱉어낸 꽃 한 송이
어머니의 어머니를 만날 것도 같은데
---「최분임 - 몸의 기원」중에서

열쇠를 꽂아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싶은 비밀스러운 방과 방 앞에 섰다. 누군가를 지켜주는 자물쇠가 번쩍 빛을 내며 나를 차갑게 노려본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웃음소리 대신 탁한 노인 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연기처럼 새어나오는 옆방의 이 야기가 한집에 사는 식구들처럼 가깝다. 나름의 속내를 내 뱉는 것일지도 모른다. '머리조심'이라는 붉은 글씨가 떠오른다. 쪽방 을 담 삼아 삐뚤삐뚤 걸어가는 낯설지 않은 발소리에 귀를 기울 여본다. 왠지 정겹다. 어떤 사람냄새가 풍긴다. 툭 터진 하늘대 신 환한 달빛이 비좁은 골목을 비추었으리라. 반으로 접힌 작은 문이 세상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리라. 사람들이 빠져 나 간 빈집에는 가랑잎만 수북이 쌓여 있다. 얼마큼의 외로움과 그 리움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느껴진다. 골판지박스로 덧 댄 부식된 나무 문이며, 선이 뜯겨 나간 전기계량기며, 시멘트벽 에 새겨진 ‘삼천리 연탄’의 오랜 글자가 어떤 문화재보다 내 눈에 는 더 귀하게만 보였다.
자물쇠가 채워진 쪽문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이 문을 열 고 사라져간 사람들은 또,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숱한 아침을 열고 숱한 밤을 닫으면서 반듯한 새로운 집을 꿈꾸었을 것이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이 미래로 가는 관문이었을 것이다.
---「박소언 - 쪽방의 시간」중에서

나 또한 그 소중한 돈을 다시 벌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남 편을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리기 시작했 다. 거기 갈 바에 차라리 굶고 말겠다, 그런 험한 데를 다 가느냐, 치안이 안 좋은 가난한 나라라며 그들은 파키스탄을 경멸했다. 친정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김 서방을 믿고 그 먼 데를 가느냐고, 또 주식을 할 사람이라고, 개 버릇 남 못 준다고도 했다. 물론 내 친구들도 섬뜩한 소리를 해댔다. 극단주의 무슬림한테 처참 하게 죽을 수도 있다며 치를 떨었다. 그들은 겉으론 파키스탄을
경멸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두려워했던 것이다. 새 운동화를 신 고 가슴을 펴고 새로운 길로 달려나갈 용기가 없는지도 몰랐다.
나라고 그런 소리에 겁먹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왕이면 스웨 덴 같은 선진국이면 얼마나 좋을까도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나 라에서 실직한 한국인을 고용해 줄리도 없었다.
반대로 파키스탄에 가라고 부추긴 사람들도 있었다. 남편 먼 저 파키스탄으로 떠난 후였다. ‘남편한테 가야지?’ 성당의 신부 님은 나만 보면 그 소리를 했다. 목사인 남편의 형님도 나를 못 보내서 안달이었다. 남편이 무슬림 여자와 재혼해 버릴지도 모 른다고 겁까지 줬다. 시어머니는 더 성화였다. 어떻게 너 혼자 집 구석에서 빈둥빈둥 놀고먹느냐고, 빚쟁이 들볶듯 들볶았다.
나는 뭐 파키스탄이면 어떠랴 싶었다. 남편 말대로 골프도 치 고, 두바이에 장도 보러 가고, 모헨조다로 유적지, 인더스강에도 가고 싶었다.
막상 이 나라에 와서 내가 느낀 건 부추긴 사람들이나 경멸했 던 사람들이나 모두가 아는 척하기 좋아했다는 것이다. 정말 중 요한 건 협력이었다. 나라와 나라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기심 을 버리고 협력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협력은커녕 뒤죽박죽 상 황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더욱 단절돼 버렸기 때 문이다.
우리 신세도 한없이 처량해졌다. 집 안에 있는 사물들, 텔레비 전이나 의자, 커튼, 탁자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산 자 인지, 죽은 자인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무덤 같은 집만 이 우리를 담고 아무렇지도 않게 낮과 밤을 통과하고 있었다.
---「김은정 - 돈버는 유령」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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