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폭력과 평화
‘평화’라는 낱말이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를 묻는 2019년 통일연구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첫 번째 이미지는 비둘기, 두 번째 대답은 통일이었다. 비둘기는 예전에 올림픽이나 국제경기에 자주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된 연관 이미지인 것 같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비둘기의 이미지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도시의 공원과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며 배설물로 오염시키는 존재에게서 평화의 이미지는 어떻게 작동될지 궁금하다. 두 번째 이미지인 통일 역시 우리의 일상을 세밀히 살피지 않는다면 내 삶과 크게 관련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만큼 평화는 모든 인류가 바라고 꿈꾸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모호하고 막연하여 구체적 일상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에서 경험하고 심화 되어가야 할 실질적 평화는 상실된 채 폭력적 경험만 심화 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저 멀리 있는 평화를 모두의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요 과제임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화와 관련된 이미지의 두 번째 대답은 통일이다. 실제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평화라는 낱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듣는 분야는 한반도 남북관계로서, 평화체제 평화선언 등의 표현이 자주 회자되고 있다. 현재 남북은 종전이 안 된 채 전쟁을 잠시 멈춘 상태만을 유지하는 반-평화조성(peacemaking)의 상황이다. 이것은 더 큰 제삼의 힘에 의해 무력충돌이 일시적으로 멈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유엔평화유지군(UN Peacekeeping Force)은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분쟁지역에 들어가 더 큰 무력으로 양측을 제압하여 충돌을 멈추게 하고, 그 후 분쟁 중단상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무력으로 제압하여 충돌을 멈추게 하는 행위를 peacekeeping, 그 후 협정과 감시 등으로 충돌중단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peacemaking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잠정적으로만 무력충돌이 멈추어진 채, 위태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peacemaking의 상태이다.
힘에 의한 평화의 유지는 불안하고 위태롭다. 충돌의 원인을 해소하지 않은 채 더 큰 힘으로 양측을 제압하는 것은 양측 모두로부터 불만을 갖게 하며 양측은 언제든 다시 충돌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더 큰 제 삼의 힘이 활동하는 방식이다. 이 힘은 물론 평화를 유지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지만 이 힘이 언제나 평화로운 방식과 목적으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엔평화유지군의 불법적인 힘의 실행은 양측을 향한 것이든 민간인을 향한 것이든 많은 문제를 일으켜왔고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논란거리를 품고 있다.
힘은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는 힘일 수 있지만, 부당하게 약자를 억압하고 차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때 힘(power)은 폭력(violence)으로 전화된다. 평화운동은 이러한 힘의 작동방식에 주목하고 폭력에 저항하며, 평화의 문화를 형성하는 비폭력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하겠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폭력을 물리적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으로 구분하여 유형화하고 있다. 물리적 폭력이란 신체에 가해지는 직접적 폭력이다. 체벌이나 고문, 성폭력 등을 포함한다. 그런 면에서 물리적 폭력은 여전히 우리 일상의 음지에 숨어있는 현실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체벌이나 위계에 의한 교사의 폭력, 또한 직장 내 성폭력은 여전히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또한 경찰이나 검찰에 의한 피의자 고문 역시 그리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물리적 폭력은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고문이나 강압에 의한 수사 담당자는 법적 처벌이 미약하여 오히려 법적으로 보호되고 장려되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하는 반면, 약자의 처지에 있는 피의자에 대한 법적 보호는 매우 미약하다. 이것이 구조적 폭력의 현실이다.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수 있기에 우리 안에 자기검열이 일상화 되어있다. 여성만 처벌하는 낙태처벌법은 제정 66년 만에 결국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다. 이러한 합법적 폭력과 차별이 용인되어온 것은 바로 문화적 폭력에 기인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민의 정서와 합치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제정이 미루어지고 있다. 이때 국민의 정서란 무엇인가? 유럽백인과 아시아이주민을 대하는 태도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남한사회의 인종차별, 범죄 유형별 가피해자 성비 보고에 의하면 성범죄의 98%가 남성이고 그 피해자의 93.5%는 여성이라는 사실은 우리사회의 물리적, 구조적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폭력이 배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 갈퉁은 폭력에 있어서 물리적 직접 폭력만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이 있음을 분석함과 더불어, 평화 역시 직접적 폭력이 없는 소극적 평화만이 아니라 비폭력 적극적 방식으로 갈등과 폭력을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를 역설하였다. 평화학에서는 이러한 적극적 평화실천의 과정을 peacekeeping 또는 peacemaking과 구분하여 peacebuilding으로 표현한다. 1992년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Boutros Boutros-Gali)는 보고서 ‘평화의 의제(An Agenda for Peace)’에서 유엔이 기존에 해오던 평화재건 활동과 역할을 전환하자고 제안하면서 전쟁 및 무장 충돌의 종식활동(peacekeeping), 정전 유지와 평화조약의 실행을 감시하는 활동(peacemaking) 이후의 역할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장충돌 이후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갈등과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총제적 제도와 역량을 구성하는데 주목하자고 촉구하며 peacebuilding을 제안하였다. 물론 이러한 세 접근은 기계적 순차적 단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충돌 당사자를 우선 긴급 분리시키고, 상호간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고 타협하며, 마지막으로 적상대자들 양자가 동의하는 평화적 시스템 안으로 상호초대하고 결합시키는 것”이 평화형성(peacebuilding)의 길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유효하다.
안전한 공간과 원형 모델(Circle)
파커 파머(Parker J. Palmer)가 존재의 이중성을 경험한 곳은 학교였다. 그에게 학교는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그에게 학교는 자신의 진짜 모습보다 더 강하고 더 똑똑하게 보이려는 태도와 방식을 익히는 공간이었다. 숨겨진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란 용어가 있다. 예를 들면, 수학 과목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교육과정은 1학기 방정식, 2학기 함수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수학 수업을 1년, 2년 참여하면서 학습자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 수학은 어렵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부럽다.’ ‘나는 능력이 없고 쓸모없는 존재다. 그러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 혹시 이러한 열등감과 무력감, 비교와 시기의 태도들이 깊이 내면화되는 과정은 아닐까? 명시적인 교육과정의 목표는 방정식과 함수 익히기이지만, 교육의 실제적 결과는 비교하기, 잘난 척하기, 무시하기, 그리고 내면의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는 내면태도 등이 교육과정 참여의 학습결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파커 파머는 숨겨진 커리큘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안전한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제Ⅰ부 평화의 인문학을 향하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