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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표류기 세트

호랑이 표류기 세트

[ 전2권, 완결 ] 제로노블(Zero Novel)-002이동
이동희 | 동아 | 2013년 10월 2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0 리뷰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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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0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840쪽 | 148*210*60mm
ISBN13 9791155110744
ISBN10 115511074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등 근육 한 번 죽여준다. 엎드려 있어서 남자의 견갑골 모양이 도드라져 보였다. 커다란 골격과 체형에 탄탄해 보이는 근육, 헬스보이처럼 쓸데없이 부풀기만 한 근육이 아니라, 날렵하면서도 깔끔했다. 이불을 조금만 벗기면 더 잘 보일 텐데.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하룻밤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 한 번 남자친구에게 사과를 했다. 진형아, 미안. 취해서 그런 거잖니.
남자는 외국인인 것 같았다. 조명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골격, 한국인, 아니 동양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조금 흔들어보았지만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기억이 몽땅 날아간 나도 나지만, 이렇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 보니 이 남자도 어지간히 취했던 모양이었다. 앗, 그럼 피임은 제대로 한 거야? 나는 이불을 들추고 내 몸을 살폈다. 흔적들이 아주, 참, 요란했다.
그냥 잠만 같이 잤을 것이다, 라는 가설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까지 확실한 증거라면 부정하기도 부끄럽다. 온몸을 물들인 울긋불긋한 마크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으음, 노 말레 주브앙?”
앗, 정신이 들었나 보다. 남자가 신음 같은 말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두꺼운 팔을 들어 올려 주변을 더듬는다. 역시 그는 외국인이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발음으로 보면 프랑스나…… 모르겠다. 영어도 가물가물한데 알 게 뭐야. 남자의 팔이 내 몸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움칠했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레 내 허리를 휘, 휘감는다? 어? 어어?
“으아? 이봐요!”
“시브레 농 키첸-.”
오, 오지 마! 덩치가 워낙 크니 조금만 움직여도 크게 느껴진다. 채 저항을 하기도 전에 그는 나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내리누르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비벼오는 달콤한 키스였다. 곧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내 경험이 그리 풍부하지는 않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남자, 선수다. 여자 다루는 데에 도가 터 있다. 키스는 강압적이지 않았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에이, 몰라. 이미 선은 넘어버린 거, 즐길 건 즐기자.
어둠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남자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외국인이라 그런가, 눈동자가 녹색이다…… 손에 닿는 머리칼은 조금 긴 편이었다. 어깨를 넘는 길이.
“키스할 때는, 눈을 감는 거야. 아기 고양이.”
“……!”
이 무슨 해괴망측한 상황인가? 나는 눈을 부릅떴다. 남자는 태연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짧은 키스를 해왔다. 이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어린 시절 읽었던 순정만화의 한 장면이었다. 키스로 인해 말문이 트인다는, 아주 편리하고 오글거리는 설정의.
현실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어쨌든 키스 한 번으로 영어를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만화 속 이야기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분명했다. 잘못 들은 거지? 아니면 이 남자가 한국말을 했거나.
“이번에는 귀여운 아가씨가 왔군.”
한국말이 아니야! 아닌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벙 쪄 있는 얼굴이 웃겼는지 남자의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색기(色氣)가 이런 것이려나. 지독하게 섹시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네?”
“저들도 참 재주가 좋아.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던데 어디서 다 조달하고 있는지.”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황당한 말들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옆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집어 들었다. 뭐지, 저 말은. 그러니까 내가, 내가 마치…….
순간 머리에 열이 확 뻗쳤다.
그래, 내가 술 마시고 하룻밤 실수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사불성의 여자를 모텔로 데려온 너도 잘난 건 아니잖아? 네가 날 창녀라도 되는 듯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 화를 잘 내는 편은 아니다. 이름값을 못한다고 놀림을 받을 정도로 순한 편에 속했다. 스스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하지만 순하다고 해서 성질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호랑이다.
침대를 더듬었다. 뭔가 손에 쥐고 던질만한 것을 찾았다. 베개 아래에서 작고 단단한 덩어리가 잡혔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남자의 뒷모습을 가격하여 있는 힘껏 던졌다.
물건은 남자의 어깨에 빗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이 무언지는 나중에 알았다. 침대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넣어놓는 그릇-각파(脚婆)였다. 잘못해서 머리에 맞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분노에 이성을 빼앗긴 상태였다. 각파로도 모자라다. 베개며 이불이며 냅다 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이 새끼! 네가 뭔데!”
“뭐? 잠깐, 아기 고양이, 진정해!”
“놔! 이거 안 놔? 어딜 잡아! 나도 잘한 건 없지만 너도 잘난 건 없어! 의식 없는 사람을 데려다 안아놓고!”
“그게 무슨, 윽!”
마구 흥분한 나는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발버둥 치던 나는 기어코 남자의 뺨에 벌겋게 손톱자국을 내놓고야 말았다. 두 손목은 남자에게 붙잡혔고, 그러고도 발버둥을 포기하지 않아 그는 나를 온몸으로 내리눌러 제압하고 있었다. 손이고 발이고 움직일 수 없게 되고서야 나는 저항을 멈췄다. 남자의 얼굴이 가까웠다.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탓에 얼굴에 피가 몰렸다. 흥분은 가라앉았으나 심장은 아직도 격렬하게 뛰었다. 의문이 떠오른 연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여자가 보낸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누구예요, 그 여자라는 게? 난 눈 떠보니 여기였던 말이에요.”
클럽을 가기는 하지만 즐겨가는 편은 아니었고, 원 나잇 스탠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남자친구와 제대로 된 연애 중에 관계를 가진 것이 전부였다. 연애 경험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요조숙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방종한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서로 거리가 가깝다 보니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의문과 호기심, 그리고 의심.
억울하다. 정말 억울하다.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면, 욕이 한 바가지 튀어나갈 것 같았다. 내 안에 무엇이 들었나,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남자는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연녹색 시선이, 나를 샅샅이 파헤칠 듯 오래도록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 제압하고 있던 내 팔다리를 풀어주고, 밑에서 이불을 끌어당겨 몸 위에 덮어주었다. 아, 나 그러고 보니 알몸이었구나…….
“제스! 제스를 데려 와.”
헉, 미친놈이었나? 아무도 없는 방향을 향해 크게 말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건 대답이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고 작지만 또렷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 나, 나 알몸이었는데! 벗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있었던 거야? 이불을 끌어당겨 가슴팍을 여몄다. 지금에 와서 가린데도 소용이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건 반사적 행동에 가까웠다.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남자는 쿡쿡 웃었다. 풍부한 울림을 가진 낮은 웃음소리였다. 그는 날카롭게 노려보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 여유로운 몸짓으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뭐, 조사해보면 알겠지. 이리 와, 아기 고양이.”
누가 아기 고양이야! 난 호랑이란 말이야. 어디 그 쬐끄만 짐승을 갖다 대.
어린 길고양이 부르듯 손을 까딱거렸다. 나는 으르렁거리며 경계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 수상하고 야리꾸리한 침실은 모텔이 아니고 그의 개인 침실인 것 같았다. 서랍에 손을 뻗어 담배를 꺼내는 행동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나는 시나리오를 조금 수정했다. 친구들에게 불려나와 술을 진탕 처마시고, 그리고……. 하여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 틀림없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이 남자가 최악의 살인마여서 나를 죽여 버리는 것이다. 지금이야 시침을 뚝 떼고 있지만 사람은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만약 지금 죽는다면,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몫의 간식을 노루 녀석이 홀랑 먹어버렸을 때 정도의 아쉬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무언가 강렬한 욕구를 느낀 적이 없었다. 흐름에 따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죽을 듯이 목을 매지 않아도 성적은 나쁘지 않게 나와 주었다. 연애도 무난했다. 적당한 사람을 만나 적당한 연애를 하고, 적당한 속도로 진도를 나가고, 식었다 싶으면 헤어졌다. 늘 그렇게 대충대충, 적당, 적당.
엄마아빠는 울겠지. 딸이 죽어 버리면 놀라고 슬퍼하실 것이다. 하지만 노루가 있었다. 내 빈자리 정도야 그 녀석이 잘 채워 주리라 믿었다. 짜증나긴 해도 좋은 아들이니까.
죽어버리면 남은 핸드폰 약정이나 할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핸드폰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깝다. 뭐 그 따위의 걱정이 들었다. 나는 어딘가 식어버린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앗, 그러고 보니 내 핸드폰은 어디 있지? 옷은?
적어도 지금 나를 해칠 기미는 없어 보였기에 나는 뉴스에서 종종 보았던 ‘여대생 실종 사건’, ‘20대 여성 무차별 살해’등의 가능성을 뒤로 밀어놓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 침대의 이불이 그리웠다. 이곳이 먼 곳이 아니길 바란다. 택시비 많이 나오잖아.
굵은 팔이 어깨를 감쌌다. 밀어내려 꾸무럭거렸다. 이불을 쥐어 잡은 두 손 덕분에 저항하기가 힘이 들었다. 푸흐흐……. 낮고 풍부한 웃음소리가 귓바퀴 바로 앞에서 흘러들었다. 아, 진짜. 이 페로몬 남. 색기 하나는 타고 났다.
나는 진형이에 대한 죄의식을 되새기려 애썼다.
“그 여자도 참 질기단 말이야. 덕분에 난 즐겁지만 말이야.”
“아까부터 누굴 말하는 거예요?”
누군데 날 여기 보냈대? 그나저나 좀 떨어져, 이 색남아.
결국 이불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팔을 밀어낸 나는 짜증을 섞어 물었다. 남자는 조금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당겨 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엘린 라몬 이오니아. 내 와이프.”
“……!?”
다, 당신! 유부남이었어?
“……가 될 여자. 아직 와이프는 아니야. 약혼녀지.”
다, 다행이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이 색남,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었다.
솔직히 원 나잇 스탠드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있어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래봬도 나는 도덕성은 갖춘 여자다. 나름 엄한 교육도 받고 자랐다.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위험했지만, 유부남이 아니었다는 사실로 만족하기로 했다. 엄마, 엄마 딸 죽다 살아났어. 불륜은 아니래. 그 뒤로도 남자는 계속 뭐라고 말을 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이 열리며 웬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이불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았다. 고개를 들어 슬쩍 새로 들어온 사람을 살폈다. 그리고 나는, 숨을 멈춰야 했다.
미친놈이다. 미친놈이 나타났다!
사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나는, 나는, 나는 보통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 아닌 듯했다.
지금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혹은 환각 상태가 아니라면 저 사람이 입고 있는 건 분명, 갑옷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치도 빠짐없이 철판으로 감싼, 진짜 갑옷이었다. 어설픈 가짜가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숨길 수 없는 쇳소리가 함께 났다.
“부르셨습니까?”
“어젯밤 이 아이를 들여보낸 사람이 너냐?”
“어제는 아무도…….”
남자가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엄마야!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만.”
사이비 단체인 걸까? 아니면 중세의 문화에 심취한 사이코?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코스프레에 환장한 미친놈이 한계였다. 어쨌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외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던 것도 환각 상태였다면 이해가 된다. 나는 알아들었다는 환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약? 약인가? 나 마약을 먹은 거야?
그제야 위기감이 경종을 울려댔다. 한심하게 침대 위에서 멍을 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우선 핸드폰과 내, 내 옷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내 가방을 찾아서,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택시를 잡기로 했다.
죽어도 곱게 죽고 싶지, 사이코에게 걸려서 못 볼 꼴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바에야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무조건, 가능한 빠르게 이곳에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내 때늦은 반항은 시도도 하지 못한 채 꺾여버리고 말았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빌어먹을 색남에게 팔목을 잡혀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왜 거기 누워 있었는지 그때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도망가거나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가까이서 감시하고 있던 거였다.
“뭘 찾아?”
“내, 내 핸드폰. 이거 놔요. 난 내 집으로 돌아갈 거야.”
조명이 어두워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불을 켜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하다못해 저 두꺼운 커튼이라도 열면 내 옷이나 가방이 어디 있는지 보일 텐데.
“또 무언가 던질 것을 찾나? 그건 곤란해. 꽤 아팠단 말이야. 제스!”
“네.”
“커튼을 열어. 어둡다.”
갑옷남이 척척 걸어가 커튼을 열었다.
대체 얼마나 호화로운 방인 것일까?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악취미였다. 지브라 이불만이 아니었다. 벽에 붙어 있는 동물 박제에 나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무려 수사슴 머리 박제였다.) 남자가 팔목을 놓아주기 무섭게, 나는 다시 베개 아래를 훑었다. 잘 때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으니까,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텐데.
그때였다. 베개 밑을 더듬던 내 손이 위로 올라가며, 몸이 남자 쪽을 향해 강제로 돌아갔다. 남자가 아예 내 손목을 잡아 위로 들어 올려 버린 것이다. 그는 지브라 이불을 내 몸에 단단히 감고, 제스라고 부르던 갑옷남에게 나를 넘겼다.
“이, 이거…… 야! 뭐하는 짓이야!”
“옷 입히고 씻겨서 데려와.”
“야!”
진짜다. 이건 진짜 위기 상황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그래도 반쯤은 설마, 라고 생각하던 내 자신의 안일함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멍청했다. 평생을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한 소시민의 끝은 이런 거야?
갑옷남은 그대로 나를 어깨에 짐짝처럼 얹어 메었다. 애벌레처럼 이불에 꽁꽁 싸인 터라 움직여도 발버둥이 고작이었다. 나는 내려놓으라고 소리치며, 방긋 웃는 남자의 연녹색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내가 노려보는 걸 알면서도 그는 여유롭게 웃을 뿐이다.
“고소할 거야! 당신, 신고할 거라고! 윽!”
혀를 깨물었다.

매우 기분이 나쁘다.
동물원 원숭이의 기분에 대해 리포트를 쓰라고 한다면, 지금 같아서는 100장 분량도 너끈할 것 같았다. 물론 교수님께서 그런 주제를 주실 리 없겠지만. 가끔 길눈이 밝은 혜진이를 신기하게 빤히 쳐다보았었는데, 돌아가면 먼저 진심으로 사과부터 해야겠다. 이런 기분일 줄 몰랐다. 내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혜진아.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두 쌍이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연녹색의 느끼한 눈동자 한 쌍, 제스라는 남자의 담담한 검은색 눈동자 한 쌍. 마치 신기한 동물을 관찰하듯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하자는 거죠?”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스라는 사람에 의해 강제로 목욕탕에 밀어 넣어진 나는 본의 아니게 다시 샤워를 해야 했고, 내 옷도 아닌 다른 사람의 옷을 끼워 입어야 했다. 이게 또 얼마나 찝찝한지.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잠들기 전에 나는 깨끗하게 씻었단 말이야. 머리도 감았는데 왜 또 씻어야 해.
어서 빨리, 이 황당한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몰래 카메라든 뭐든 좋다. 악질 장난이어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적어도 이들에게 나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고, 그렇다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10시까지 아르바이트하러 가야 하는데. 오늘은 풀타임으로 일해야 하는데.
“제스, 설명해 봐.”
“뭘요?”
“들여보낸 적 없는 이 아기 고양이가, 왜 내 옆에서 잠자고 있었는지.”
“…….”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고,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대신 대답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도리어 내가 묻고 싶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거니…….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사건의 경위가 아니라 다음의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빠지면 신용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돈이 줄어든다. 나는 가난한 대학생이었고, 인형 전시회에 가느라 다소 무리했으니 남은 방학 동안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다. 이들의 장난, 그리고 이미 지나간 수수께끼에 할애할 시간 따위 없는 것이다.
좋아. 옷은 포기하겠다. 가방도, 내가 뭘 들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잃어버린 셈 치겠다. 핸드폰은 이런 일에 대비해 미리 보험에 들어놓았다. 분실접수증이다 뭐다 절차가 꽤나 복잡하겠지만 과감하게, 감수해줄 용의가 있었다.
“돌아갈래요.”
“어디로?”
“당연히 우리 집이죠. 서울시 동작구…….”
남자의 얼굴이 또 이상하게 변했다. 뭔가 묘한 물건을 보는 것 같은 눈.
“제스, 저런 지명(地名) 들어봤나?”
“……저는 처음 듣습니다만…….”
그래, 너희들은 외국인이라 모를 수도 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출입문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우선 큰길로만 나가면 된다. 그리고 택시를 잡는 거다. 대한민국의 택시는 어디든지 있으니까.
길눈이 밝지 않은 나는(솔직히 말하면 방향감각도 썩 좋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길을 잃었다. 근처 지구대나 파출소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모두 나를 알고 계실 정도였다. 놀이터만 벗어나도 길을 찾지 못해 저녁 늦게까지 헤매다 결국 경찰 아저씨의 손을 붙들고 귀가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지금이야 근처 지리에도 익숙해져서 동네에서 길을 잃는 일은 없지만, 옛날의 인연으로 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추석, 설 같은 명절 때마다 파출소를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 덕분에 노루 녀석이 어찌나 놀려대는지…… 말도 못한다.
택시를 탈 줄 알게 되고부터 파출소를 찾는 일은 없어졌다. 늘 택시비로 현금 3만원을 챙겨 다니는 나는 택시비를 카드로 계산할 수 있게 되던 날 혜진이와 3만원 어치의 축배를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택시비로 얼마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우선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정 미터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나면, 적당히 아는 길에 내려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 나 카드도 없지. 그럼 집까지 가서 엄마한테 대출을 받는 수밖에 없겠다. 엄마 금융은 20%라는 무시무시한 이자율을 자랑한다. 나는 더욱 거지가 되겠군.
당당히 문을 열어 젖혔다.
원 나잇 스탠드만으로도 버거운데 미친놈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라니.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한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시련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그 즉시 오늘의 일은 머리에서 지워버릴 테다.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사실을 잊어버릴 거다.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지만, 웬만하면 작은 시련도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련을 이겨내면서까지 뭔가를 얻어내고 싶지 않다. 일생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가늘고 하찮은 삶을 이어나가는 게 내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내 소원은 하늘까지 닿지 않은 모양이다. 개미 떼만큼 많은 사람 중에서 특별한 사람의 소원만 추려내 들어줘도 모자랄 판에, 나 같은 범인(凡人)의 목소리까지 들어줄 여유는 없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
나는 또 길을 잃었다.
이번에는 파출소 아저씨의 도움도, 택시 아저씨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것 같다.
눈앞에 펼쳐진, 상식을 벗어난 풍경.
그건 이 세상의 것이라 볼 수 없을 만큼 푸르른, 그리고 드넓은 바다였다. 나는 그대로 문을 닫고 뒤를 돌았다.
“여기…… 어디죠?”
혜진아, 노루야……. 나 정말 미아가 됐나 봐.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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