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유교적 컨텍스트를 감안할 때 “불교에도 효가 있느냐?”는 질문은 “인도-불교에도 중국-유교와 같은 효가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유교적 컨텍스트 속의 효가 어떤 함의를 갖는 개념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제기된다. 그런 연후에, 과연 그와 같은 효 개념이 인도-불교에서도 있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유교의 효가 가족윤리의 효로서 출발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중국-유교의 효는 다만 가족윤리라는 한계 안에 머물지 않는다. 첫째, 충과 함께 말해지고 효로부터 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진다. 둘째, 중국-유교의 효는 천하를 질서 짓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능을 하였다. 셋째, 효는 묵가의 겸애설과는 달리 우리 집, 우리 아버지부터라고 하는 가족중심주의/별애설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인도-불교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효는 충과 함께 말해지는 것도 아니고, 천하를 질서짓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는 것도 아니었으며, 가족중심주의와 연결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불교는 동체대비를 말하면서, 가족중심주의를 넘어서 있는것이다. 뿐만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효가 차지하는 중국-유교 사상 체계 내에서의 위상이다. 중국-유교의 효가 “효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효보다 더 앞선 것이 없다”라고 말해질 수 있는 가치임에 비하여 인도-불교의 효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연기보다, 무아보다, 삼법인보다, 사성제 … 등의 근본교리 그 어느 것보다도 더 크고 더 앞서는 가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진대 “불교에도 효가 있느냐?” 라는 질문에, 아무런 한정도 없이, 이러한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이, 그저 가족윤리의 효가 있다고 해서 “불교에도 효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출가, 가부장제의 탈피」중에서
만약 탈권력이야말로 은둔의 본질이라 한다면, 비록 시정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은둔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혜숙, 혜공이 보여준 동진(同塵)과 은둔이 동의어라 말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렇기에 나는 결사가 은둔이라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 역설,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조의 결사가 은둔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타마 붓다의 출가 역시 은둔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출가와 결사는 은둔을 매개로 만난다. 보조는 결사, 즉 은둔을 바로 붓다의 출가정신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인식하고 전개하였던 것이다.
---「탈권력, 결사와 출가의 공통 본질」중에서
간디가 비록 자이나교의 무소유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법정이 그러한 간디로부터 부끄러움을 경험하면서 삶과 수행의 방향을 재정립했다고 해서, 간디와 법정이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를 따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이나교에서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공의파라 하더라도, 살아 있는 생명인 벌레를 쓸어내기 위한 ‘벌레털이’나 물을 마실 수 있는 ‘물 주전자’ 같은 것은 갖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법정이 무소유가 되지 못했다고, 그의 삶과 가르침 사이에 모순이 있다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 그러나 존재 양식은 소유양식을 떠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물질 위주의 생활에서’라고 하는 말이 물질적인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무소유 개념은 소유 개념과는 서로 부정(否定)의 관계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글자 그대로의 ‘무소유’를 실천할 수 없다고 해서, 무소유를 소유의 긍정(肯定) 위에 놓을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법정의 무소유 역시 ‘적절하게 소유하는 것’을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를 줄이고 줄이라’는 명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더욱이 ‘적절하게 소유’하는 것의 범위에 대해서는 개인 개인마다 다를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이 볼 때, ‘지나친 소유’라고 보이는 것도 그 당사자의 판단으로는 얼마든지 ‘적절한 소유’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고 만다. 그렇기에 무소유를 말하는 맥락은, 가능하면 생활상의 소유를 줄이자는 것이라고 본다.
---「간디의 무소유와 법정의 부끄러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