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건칠관음보살상이 1447년(세종 29)에 중수된 것은 소헌왕후의 1주기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소헌왕후는 1446년(세종 28) 음력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1주기를 맞아 아들 영응대군 이염, 신빈 김씨, 영해군 등이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상을 중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 p.68
세조는 의경세자의 병 치유를 위해 여러 조치를 했다. 1457년 7월에는 승려 21명을 초청해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설행했다. 동년 8월 2일에는 김수온 등을 각지에 보내 향과 축물을 내려 세자의 병 치유를 기도하게 했다. 동년 8월 4일에도 승려 4명을 내전 서청(西廳)에서 기도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경세자는 동년 9월 2일에 세상을 떠났다.
--- p.92
“조선 국왕 이(李)는 삼가 선왕 · 선왕후와 조종의 영(靈)과 죽은 아들 의경(懿敬)이 극락에 오르고 아울러 법계 중생의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소원을 위하여 대장경 50건을 인쇄하고 표지는 이미 끝났으므로 이달 10일에 해인사에서 법회를 특설하기로 했습니다. …… 그러나 공사가 막 끝나고 고승들을 초빙해 펼쳐보게 되니, 공전(空前)의 법연(法筵)은 하늘이 열었고 일대(一代)의 아름다운 설법은 샘이 불어난 듯하여, 진실로 대승을 판별할 수 있고 묘력(妙力)을 힘입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선왕 열성(列聖)의 영과 죽은 아이와 고혼의 무리가 직접 대자대비의 제도를 받아 극락세계에 오르고 속히 정각의 힘을 이루어 상적광토(常寂光土)에 들어서, 일체의 번뇌를 모두 버리고 그지없는 복을 널리 받아지이다. 경건히 기도하는 마음 금할 길 없어 삼가 아룁니다.”
--- pp.93~94
세조는 1466년(세조 12) 상원사 중창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족을 비롯한 중요 대신들을 거느리고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 등을 둘러본 후 양양 낙산사를 거쳐 오대산 상원사에 도착했다. 상원사 낙성식에는 세조 · 왕비 · 세자 · 효령대군 등을 비롯한 종친과 영의정 신숙주(1417-1475), 상당군 한명회(1415-1487) 등 수많은 관료들이 참석했다. 이 중창 법회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상원사 문수전 목조문수동자상이다.
--- p.128
세조는 상원사 중창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인 어첩(御牒)에서 자신을 ‘불제자’로 칭하고 있다. 억불숭유 정책를 폈던 조선에서 스스로를 불제자라고 칭한 왕은 세조뿐이다.199 조카인 단종과 동생인 안평대군 · 금성대군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심신의 병이 깊어지자 불제자를 자처할 정도로 절박하게 불력에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 p.129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불상 조성에 참여한 효령대군은 조선 전기 왕실 주도 불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조선 전기 불상 가운데 효령대군과 관련이 있는 불상은 견성암 약사삼존상(1456년),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상(1458년) 그리고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불상(1466년)이다. 효령대군은 왕실 어른으로서 불력(佛力)에 의지해 선왕 · 선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한 불상 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 p.145
“주상은 애통해하였고 자전(慈殿, 명성 왕후)은 더욱더 상심함이 끝이 없었다. 저승길에 명복을 비는 데 부처만한 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 p.280
인목대비가 조성 발원한 수종사 불상의 미소 띤 얼굴은 조선 전기 불상의 근엄한 모습이나 조선 후기 불상의 경직된 이미지와는 다르다. 이 불상들은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고 어깨와 하체는 좁고 낮아 신체 비례의 균형이 맞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형상의 불상을 조성한 이유는 가슴에 묻어 둔 영창대군의 모습을 불보살상에 반영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 p.294
백담사 아미타불상 조성발원문에는 영조와 정성왕후 서씨(1693-1757), 그리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다. 또한 당시 강원도 관찰사였던 홍봉조(洪鳳祚)와 평강 태수였던 유언술(兪彦述)도 관직이 오르고, 살아서 정토를 맞기를 발원했다. 만(卍)자가 새겨진 노랑 삼회장저고리는 궁중에서 사용했거나 왕실과 관계된 사람의 것으로 추측된다. 18세기 불상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백담사 아미타불상은 당시 불상 가운데 빼어난 작품으로 18세기 불교조각을 연구하는 데 기준작이 된다.
--- p.441
“삼가 주상전하께서는 장차 남산 같은 수를 누리시기를 바라오니 운수가 어찌 백 년 천 년에 그치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영원한 안녕을 살피옵건대 국운이 틀림없이 만 년 억 년에 이를 것입니다.”
--- p.455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은 조성 시기가 각기 다른데, 본존인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707년에 숙종의 후궁 소의 유씨(昭儀 劉氏, ?-1707)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왕실 인물과 관련된 불상이다. 미타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금속제 후령통은 1707년(숙종 33) 조성 때 납입된 것이고, 1744년(영조 20) 중수 때 납입된 것은 한지에 싸여 있어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복장 납입법과 유사하다.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도 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조선시대 왕실 발원 불상의 조성과 중수 때의 복장 납입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 p.494
세조의 딸 의숙 공주와 그녀의 남편 정현조가 지혜로운 아들 낳기를 발원하면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을 조성했다면,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남편의 병 치유와 딸 내외의 득남을 위해 1466년에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을 중수하였을 것이다. 보현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의 황초폭자와 금속제 후령통은 1466년에 조성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의 후령통 및 후령통 내부 물목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때 납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 p.498
상원사 목조제석천상 중수발원문(1645년)에서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한 소현세자의 명복을 기원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상원사 목조제석천상의 중수발원문에는 소현세자(1612-1645)와 민회빈 강씨(1611-1646)의 3녀 경숙군주, 4녀 경녕군주, 5녀 경순군주 등이 참여하고 있다. 소현세자의 딸들은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부인 민회빈 강씨가 딸들을 앞세워 남편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 p.548
용문사는 세조와 관련된 왕실 원찰이고 봉원사는 영조의 장손인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1752)의 원당(願堂)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1704년(숙종 30)과 1858년(철종 9)의 복장 납입법은 왕실 원찰 또는 원당의 불상 복장 납입법을 계승하였을 것이다. 봉원사 명부전 존상의 목제 후령통과 청초폭자는 조선시대 불상의 일반적인 복장물과는 다르고, 왕실에서 발원한 옥수동 미타사 아미타삼존상의 복장 납입법과 유사한 면이 있다.
--- p.691
건칠관세음보살상의 상호는 방형에 가까우며 눈썹과 눈 사이의 간격이 넓은 편이다. 보관에는 현대의 쇠못이 박혀 있어 근래에 수리된 흔적이 남아 있다. 보관 중앙에는 화불이 표현되어 있고, 화염문과 화문이 보관을 장식하였다. 왼손을 들어 설법인을 한 수인은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조선시대 삼존상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표현법이다.
--- p.776
조선 초기부터 문수신앙과 함께 나한을 신앙했던 상원사는, 영산전을 새로 건립하고 1886년(고종 23)에 경상도 예천 운복사 영산전 존상을 옮겨 왔던 것이다. 이처럼 19세기에 왕실과 관계가 깊은 사찰에서는 존상을 새로 조성하지 않고, 폐사되었거나 사세가 기운 사찰 가운데 왕실과 인연 있던 곳의 존상을 이운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 p.795
오대산 상원사 영산전의 총 21존상 밑면에 이중으로 부착된 중수발원문에는 1886년(고종 23, 光緖 12)과 1958년에 중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886년 중수발원문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내탕고(內帑庫) 천금(千金)으로 단청과 불사를 했고, 음력 5월 15일에는 상원사 영산전에 존상을 봉안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즉, 1885년(고종 22)에 왕실에서 하사한 내탕고 천금은 상원사 영산전 단청과 불사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왕실 사유 재산인 내탕고의 재물이 1885년에 상원사에 하사된 것은 조선 초 세조에 의한 중창으로 형성된 왕실과의 관계가 19세기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 p.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