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문제는 그 생생한 예언들이 성취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황폐해진 땅은 피어나는 장미꽃 같은 활기를 띠지 못했고, 이방 민족들이 시온으로 몰려오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윗 왕조는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바로 “작은 일의 날”이었다(슥 4:10). 그러므로 그날을 위해서 신실한 예배를 회복하고, 신실한 일을 실행하며 또 신실한 삶을 다시 확립해야 한다.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의 빛을 비추는 것과 더불어, 그날은 분명히 올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라 서론」중에서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서구 교회가 처한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회복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찬 예언들이 넘쳐나고, 승리주의자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시온의 회복을 목격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용기를 잃은 채 피곤하고 지쳐 있으며, 앞으로 교회가 세워져 갈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조롱과 무관심에 직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에스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계속 하나님의 집을 세워 나가야 한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그 집의 구성원이 되게 해야 하며, 이미 그 집안에 속한 이들은 계속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로 그 일을 뒷받침해야 한다.
---「2장 이름이 가진 의미」중에서
이것은 성전의 재건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의미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임재가 선택 가능한 추가 사항이라고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학개서에서 더 자세하게 다룰 작정이다.) 그러나 여기에 정반대되는 위험성도 존재한다. 곧 그들에게 성전이 증거하는 실재보다 성전 건물의 외관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성전은 그들의 기쁨과 한데 섞인 채 역사 속의 오래된 성전에 대한 향수를 반영한다. 이제까지 모든 일은 잘 진행되었고, 또한 제사 제도도 세심하게 다시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성전 재건 사역은 앞으로 완성되어야 했다.
---「4장 성전의 기초 작업」중에서
더욱이 하나님은 고레스를 사용해, 포로들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며, 성전 재건의 권한을 부여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이미 1장의 해설에서 성전 그릇들과 세스바살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논의했다. 그러나 또다시 첫 번째 성전과의 연속성에 대한 의식이 강조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인이시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좋은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곧 고레스의 핵심 역할은 지금 등장하는 왕, 다리우스에게 강조된다.
---「6장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는다」중에서
이 장을 다시 살펴보면, 중심에 다음 세 가지 사항이 놓여 있다. 첫째, 그 당시 일어나고 있던 일은 공동체의 특성을 드러낸다. 에스라는 자기 혼자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릇들을 나르고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들의 무게를 다는 평범한 일을 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것은 진정으로 공동체 전체의 수고였다. 그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은 저마다 자기의 역할을 담당해 냈다. 성경에서 종종 보이는 이런 단락들은 그 일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에 대한 참된 지도자의 관심을 보여 준다.
---「9장 구원의 날」중에서
학개서는 그 자신의 시대를 포함해서 모든 시대에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관점은 주로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광이 그 성전을 가득 채울 때(2:7), 성전 건축 프로젝트가 종결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에스겔은 회복된 성전과 그곳에 주님께서 거하시는 장면을 훨씬 더 자세하게 묘사해 준다. 언약의 축복은 다윗의 보좌에서 다스리실 메시아 안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 바울은 모든 나라가 와서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롬 15:12)에게 순종함으로써 이 언약이 성취될 거라고 이해한다.
---「학개서 서론」중에서
바빌로니아 추방의 비극을 단지 외적 측면으로 살펴보자면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과 파괴된 도시와 성전으로부터 이동시킨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점이다. 에스겔 10장에 묘사된 예언은 이 점을 매우 예리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장소는 거룩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고, 하나님의 복도 임하지 않을 것이다. 학개가 전하는 예언의 음성은 주님께서 여전히 은혜의 계획들을 품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표시다. 그러나 이 계획들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위한 장소를 마련해야 했다.
---「1장 언제 지어야 하는가」중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성전이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 건물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마음과 삶으로 지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경제생활도 손상을 입었다. 다신론의 치명적인 유혹은 삶이 많은 부분으로 나뉠 수 있으며, 어떤 ‘신’(god)도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전적인 헌신을 의미한다.
---「3장 백성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중에서
첫째, 전적으로 일관된 주장으로, 하나님은 듣는 사람들의 영적 성숙도와 관련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들은 그들 가운데서 우상숭배와 관련된 많은 요소를 제거했지만, 생명력이 있고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들은 무감각했다. 그들을 무감각과 나태로부터 깨워 일으키기 위해서는 미래의 축복에 대해서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중요한 원리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방법과 특별한 강조점들은 듣는 사람들의 수용 능력에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학개는 처음에 그 문제점을 이 땅에서의 소유물과 안전에 대한 애착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사로잡았다고 확인했다(1:4). 학개는 첫 번째 단계는 “판벽한 집들”에는 전혀 안전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사실상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5장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