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이성이 없고 본능에 따라 살고 훈련받은 데로만 행동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흔하지만 인간-동물 관계를 실천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안다. 키우는 강아지의 여러 가지 표정, 소리, 몸짓을 지켜보면서, 이건 무슨 뜻이고 저건 무슨 뜻인지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pp.10~11
오랫동안 인간은 동물이 뜻하려는 것을 인간이 알 수 없다고 단정해왔다. 그러면서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무시하거나 몇 가지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해온 것이다. 이제 새롭게 인간-동물 관계를 생각하고 실천하려는 시도는 바로 그렇게 단정해온 방식, 한 가지 해석만을 고수했던 태도를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 p.11
인간과 동물의 관계적 지평에 관한 지적 관심 뒤에는 특정한 역사적 환경과 배경이 있다. 당연히 역사결정론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들에 갖는 관심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만든 세계, 즉 인간의 조건과 그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의 표현이다.
--- p.22
지난 20세기 상징·표상으로서의 인간-동물 관계가 사회이론의 토대가 되었다면, 21세기에 들어서서 인간-동물 관계는 이 책의 여러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존재론적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는 근대성 비판이나 근대 이데올로기의 인간중심주의 비판 등 여러 결들이 있지만, 새로운 애니미즘적인 측면도 있다.
--- pp.39~40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을 포함한 신유물론은 인간-동물 관계와 그 윤리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다. 또 역으로 동물연구를 통해 이런 이론적 접근은 보다 풍부한 내용을 지닐 수 있다. 이 모두는 관계적 행위성의 개념, 그러한 행위성과 연관된 공간적 윤리, 그리고 동물의 타자성을 감지하려는 세심한 노력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마주침들은 공간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민감한 접근을 통해 연구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들과는 다른 타자의 신체들, 타자의 스케일들, 타자의 공간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는 인간과 동물의 마주침들에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
--- pp.59~60
동물을 감정의 정제된 은유이자 공감의 매개체로 사용한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애니미즘과 같은 종교적 관습이 아니더라도 동물은 신화와 문학에서 상징적 존재로 항상 등장해 왔다. 그렇지만 정작 동물의 감정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 p.71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오랜 시간 인간과 장소를 공유하며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친근한 가족 구성원으로, 때로는 동력원이나 재산으로, 상황에 따라 식량으로 혹은 그 밖의 다른 형태로 관계를 맺어 왔다. 이와 같이 동물이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일상적 삶의 방식이나 사회구조의 구성에 크게 영향을 미쳐 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은 지금까지 사회학의 탐구 대상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일면 의외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사회학의 역사 속에 꾸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 p.98
문명과 학문의 발달에 힘입어 동물에 대한 지식을 집대성한 성과는 생물학과 수의학, 그리고 농학과 같은 전문 학술 분야로 쌓여 왔다. 그러나 동물은 단순히 죽이고 관찰하고 이용하는 대상만은 아니었다. 인간은 ‘길들임’이라는 독특한 이종 간의 관계(multi-species relationship)를 발전시켰다. 인간 사회에서 동물은 다양한 종류의 노동과 관계에 참여한다. 이 관계 안에서 인간은 동물과 소통하고 동물을 이용하며, 동시에 보호하고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개별적 그리고 집단적 경험과 인식은 문화가 된다.
--- p.130
그렇다면 동물의 입장은 어떨까? 인간과 접촉한 동물의 일부는 인간 사회로 깊숙이 관여되어 들어왔고, 일부는 인간과 정기적으로 접촉하며 어떤 형식으로든 상호작용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또 일부는 인간과 접촉을 두려워하며 가능한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있기를 택한다. 동물은 인간과의 경험을 통해 인간-동물 관계를 어떻게 학습할까?
--- pp.149~150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문제의 근본적 이해는 결국 인간-동물-병원체의 삼각관계에 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삼각관계는 맥락의존적이고 우연적이다. 인간-동물-병원체의 관계의 양상을 가시화시킬 수 있는 지점이 바로 ‘방역전략’이다.
--- p.165
이 글에서 제안했던 대로 질병을 단순히 고정되고 고립된 병원체-환자(숙주)의 관계에서 보는 것을 넘어 유동적이고 수행적인 형태의 질병, 즉 ‘질병경관’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점은 메르스의 경험에서도 드러난다. 상당히 과학주의적 입장에서 만들어진 가이드라인으로 취급되어 온 세계보건기구의 표준지식(매뉴얼, 가이드라인 등)도 실제로는 불확실성을 내재하고 있는 지식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병의 공간과 현장에서부터 세계보건기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수들이 상호작용하는 관계로 만들어진 질병경관을 통해 질병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 p.196
생태정치의 장은 다양하다. 반려동물과의 관계 문제, 공장식 축산의 문제, 야생동물의 문제, 도시에서 인간과 새의 공존의 문제 등 그 범위가 무척 다양하다. 현재까지의 인간 중심적 세계는 비대칭성을 통해 한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했다. 한 예로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주 전염원으로 멧돼지가 지목됐을 때 수많은 돼지들이 살처분되고 멧돼지들은 무차별하게 살상되었다. 인간은 이 돼지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프리카돼지 열병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농민, 살처분 노동자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은 돼지들의 입장 역시 헤아려야만 한다. 나아가 공장식 출산에 의존해 육식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본원적 한계를 인정하되 모든 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 pp.232~233
살아 있는 곰에게서 웅담을 채취하는 것이 문제라는 뉴스는 잊을 만하면 나오는 단골 뉴스다. 앵커의 멘트가 끝나면 한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익숙한 장면이 등장한다. 불안정한 카메라 앵글이 흔들거리며 녹슨 철제 기구가 털 사이에 박힌 맨질맨질하고 까만 털가죽을 비춘다. 꿈틀거리는 반달가슴곰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고통의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동물학대와 비위생적 보신문화라는 비난이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나오지만, 수십 년 동안의 공분이 정책이나 법으로 가닿지는 못했다. 그리고 2021년에도 여전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 p.238
곰보금자리프로젝트는 2018년 가을, 네 명이 시작했다. 세 명이 수의사고 한 명은 환경운동가였다. 이들은 사육곰 문제에 집중하는 조직이 있다면 사육곰 산업의 규모나 한국의 경제적 수준, 동물보호 인식의 성장을 감안했을 때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오히려 이제껏 해결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540여 마리의 곰이 34개 농장에 살고 있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곰보금자리프로젝트는 5년 안에 생추어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가장 먼저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사육곰 생추어리를 찾아가 생추어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묻기 시작했다.
--- p.245
곰보금자리프로젝트는 동물권행동 카라의 도움을 받아 화천 농장의 사육곰 15마리를 매입해 돌보면서 1년 내에 곰 생추어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 생추어리에서는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야생동물들이 사람의 관리를 받으면서 죽을 때까지 그들이 하도록 진화한 본연의 행동을 보장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화천에서 구조된 곰들은 대부분 노령에 접어들었고 두 마리는 이미 죽었다. 이들이 죽기 전에 너른 들판을 달리고 나무를 오를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이 곰들의 복지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곰들의 삶이 바뀌고 그 모습을 사회에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 반성의 과정에 함께하기를 바란다.
--- pp.251~252
2011년 7월 14일 해양경찰청은 불법 포획된 남방큰돌고래 26마리를 구입하고 불법 유통해 온 혐의로 제주 퍼시픽랜드와 관계자들을 불구속 입건했다. 1990년부터 2011년까지 구입한 남방큰돌고래 중 공소시효에 따라 2009년 5월 이후 불법 취득한 11마리에 대해서만 법 위반이 적용되었다. 그중 10마리는 2011년 당시 퍼시픽랜드에서 보유 중이었고 나머지 1마리가 서울대공원에 있던 ‘제돌이’였다.
--- p.257
돌고래 야생 방류는 우리 사회가 동물을 대하는 시각과 방식을 다시 생각하고 스스로 변화하게 했다. 인간은 욕망에 따라 동물을 인간의 방식으로 지배하고 이용하는 데 익숙했고, 이러한 가해를 의도적으로 묵인하고 은폐해 왔다. 즐거움과 안위를 위해 동물의 자유와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를 정당화했다. 이미 수족관으로 들여온 돌고래는 인간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다로 돌아간 돌고래의 모습은 인간의 교만한 인식을 흔들었다. 자유를 되찾은 돌고래들은 자신들이 고유한 생명의 주체임을 증명했다.
--- pp.269~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