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이 편지를 읽는 우리의 관심은 그저 시시비비를 가리는 올바른 교훈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굴곡진 족적을 더듬으며 그 ‘골치 아픈’ 삶 속에 역사한 복음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성경적 ‘추체험’(追體驗)을 통해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뻗어 있는 복음의 길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 편지가 오늘날 우리를 위한 말씀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공동체적 탐색의 전통에 참여하고자 하는 나 나름의 시도다.
---「들어가는 글」중에서
반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곧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불러 존재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는 과감한 신앙이다(롬 4:17-25; 10:9-10; 참고. 히 11:11-12, 17-19). 이런 믿음의 반대말은 자신의 도덕적 성과에 대한 의존이 아니다. 그럴듯하지만 무기력한 ‘세속적 가치’에 대한 의존이다. 물론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모든 가짜 가치들에 대한 거부, 곧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경쟁적 가치와 기득권과의 결별을 포함한다(빌 3:4-12). 세속적 기득권의 무력함을 깨닫지 못한 채 거기 매달리는 한,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니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 생명에 관한 바울의 물음은 ‘도덕적 행위냐 믿음이냐?’가 아니라 ‘인간적 조건에 따른 것이냐 복음의 능력에 따른 것이냐?’ 하는 것이다.
---「2. 은혜를 망각한 세속적 자랑」중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달하는 자신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나누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 선포의 가장 중요한 매체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다. 아니, 복음의 매체인 자기 자신이 바로 메시지였다. 나와 무관한 객관적 어조로 복음을 제시하고 보편타당한 진리로 올바른 삶을 말하는 것은 바울의 선교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선교는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삶에서 시작했다. 말로 선포하는 복음이 중요했던 만큼, 자신의 삶으로 복음의 진리를 실증하는 일 또한 중요했다. 복음과 복음 전달자를 나누려는 시도는 속임수의 시작이다. 자신의 행동거지를 통해 자기가 선포하는 복음의 실천적 의미를 실증하지 못한다면, 그저 사상의 빈껍데기만 전하고 끝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전도는 늘 ‘솔선수범’이었다.
---「5. 현재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선
초대교회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제의적 언어를 이어받아 이를 일상의 삶을 무대로 한 윤리적 평면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일상의 윤리를 말하면서도, 예전 성전에서의 제의적 언어를 그대로 유지한 까닭은 그 제의 속에 담긴 거룩함이라는 이상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성전 제의의 거룩함이 일상의 범상함으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예배로 새롭게 정의된다(롬 12:1-2). 따라서 교회는 세속 사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일상적 정체성과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라는 초월적 정체성 사이의 독특한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6. 타협할 수 없는 공동체의 거룩함」중에서
그 반대의 위험도 있다. 바울의 논리적 흐름과 의도를 무시한 채 결론에만 집착하면 “그 자리에 머무십시오”라는 바울의 권고가 자신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고 이 부당한 상태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종교적 무기로 오용될 수 있다. 서구의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바울의 이 논리에 호소했던 역사는 유명하다. 바울은 신분 변화가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황적 한계 내에서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표현 방식에 대해 고민했다. 바울의 권고 자체가 당시의 사회 조건을 전제한 상황적 숙고의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당시 상황으로 조율된 권고의 구체적 생김새가 아니라 그 권고의 신학적 토대, 곧 그리스도께 속한 종이라는 근본 정체성에 대한 숙고다. 이 깨달음이 본문에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집착하지 말라’는 권고가 될 수도,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라는 구체적 지침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 논리를 가져와 현대의 특정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이는 바울의 의도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태다.
---「8.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성」중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지식’이란 우리가 무언가를 앎을 넘어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 곧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지고 인정받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식, 알아주심이 우리가 소유한 어떤 지식보다 소중하다.
일견 우상 제물에 관한 논증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알아주심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는 바로 뒤 4절에 신명기의 “쉐마”가 암시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명기 6:4-5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에 관한 고백은 곧장 그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지적 깨우침의 상태로 머물지 않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언약적 책임과 얽힌다.
---「9.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관하여」중에서
구원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나름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다.…바울은 신자들에게 “여러분이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검증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한다. 내면적 심리 검사 요청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검증의 요구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검증에 실패하여] 버려지는 사람입니다” 하는 경고가 붙는다(고후 13:5). ‘버려진다’고 옮긴 단어는 고린도전서 본문에 사용된 단어(“실격당해서는”)와 같다. 이런 구절이 존재함에도 검증에 실패하여 버려지는 시나리오를 부정하고, 이를 그저 ‘경고’ 정도로만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선입견 또는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위험한 오만이다.…특히 오늘날처럼 교회의 ‘민낯’이 드러나는 상황은 교회가 자랑하는 ‘구원의 확신’이 무슨 의미인지 되묻게 한다. 세상은 교회를 욕하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구원의 확신에 집착할까?
---「10.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중에서
이런 사례들을 숙고해 보면 ‘나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는 자부심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깨닫는다. 과거 2천 년 전 고대 로마 도시의 일상에서 이루어진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한 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보정(補正)한다. 액면 그대로 받기도 하지만,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어조를 조절하기도 한다. 성경을 아예 버릴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식의 다리 놓기 작업은 불가피하다. 과거 유대 랍비들은 먼 옛날의 성경을 자기 시대에 실천할 수 있는 말씀으로 만들기 위해 오랜 세월 새로운 해석의 전승을 만들어 갔다. 바로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장로들의 전통”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과거의 성경을 오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전통들이 생겨난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해석의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좀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성경을 믿는 나와 안 믿는 너의 싸움이 아니라, 성경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방식들 사이의 대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옳고 그름의 기준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더욱 대화가 필요하다.
---「12. 신자들의 모임과 여성 신자들」중에서
소위 ‘미처 해결하지 못한 죄 때문에’ 성찬을 사양한다는 말은 무엇을 내포하는가? 지금 내가 너무 죄인이라 그 죄를 해결할 유일한 해결책조차 과분하다고 사양하는 형국이 아닌가? 그렇게 주의 몸과 피, 곧 그의 대속적 죽음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다른 어디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그 죄를 해결할 것인가? 지금 내 앞에 제공된 주의 몸과 피 말고, 나를 주의 몸과 피에 합당한 존재로 씻어 줄 다른 어떤 수단이 있다는 말인가?
---「13. 서로를 돌아보는 주의 만찬」중에서
우리 삶을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미래야말로 오히려 우리 현실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토대다. 메달의 희망을 품고 비지땀을 흘리던 선수가 큰 부상으로 운동을 접은 후 오랫동안 절망에서 허덕인다. 희망이 사라지면서 현재도 함께 힘을 잃는다. 현재는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산다. 그렇기에 우리의 과거를 향한 나의 시선도, 미래를 향한 나의 시선도 늘 내가 선 현재에서 출발한다. 과거는 나의 현재로 이어지는 여정이다.…바울은 미래 부활의 소망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그래서 현재 삶의 좌표를 잃고 방황할 위험에 빠진 신자들을 염려한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처럼 소망은 현재 우리의 삶을 표류하지 않게 붙드는 “영혼의 닻”이다(히 6:19). 현재의 의미를 잃고 표류하는 까닭은 미래를 너무 강조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소망이라는 올바른 방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17. 미래의 부활과 오늘의 삶」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