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똑같은 날들의 연속인 듯싶었지만, 그래도 그 똑같은 날들의 반복에서 사소하지만 작은 희망이 생겨나는 날이 있었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일지라도 그 작은 기대감 때문에 유난히 기쁘고 즐거운 날들이 분명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든가, 긴 프로젝트의 마감이 다가오고 있다든가, 서먹했던 직장 동료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든가, ‘불금’의 약속이 생겼다든가, 월급날이 다가와서 점찍어 놓았던 베이지색 구두를 드디어 살 수 있게 되었다든가 등등. 그런 희망은 대개 목요일을 기점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요일은 피로의 정점을 찍은 후에 ‘희망의 주말’로 다가가는 분수령 같은 날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그런 여성들, 매일의 노동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더 나은 날’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후배들을 위해 썼다. 그 ‘더 나은 날’이 단순히 주말이건 아니면 지금보다 발전한 미래에 대한 기대이건 간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 즉 ‘희망’은 많은 순간 현재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최고의 수단이 되어주곤 했다. 그것이 비록 헛된 희망이라 해도 좋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피로하고 무미건조한 매일의 일상을 견뎌 나가겠는가.--- pp.8- 9 「프롤로그, 알프레드 롤 〈만다 라메트리의 초상〉」
불세출의 천재, 다재다능한 르네상스인 다 빈치는 평생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나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림 하나만 파고들었어도 3대는 먹고살 만큼 큰돈을 벌었으련만 ‘재주가 세 가지면 밥을 굶는다’던 옛말처럼 능력과 호기심이 넘치도록 많았던 게 다 빈치의 문제라면 문제였다. 인체를 해부하고, 새의 날갯짓을 연구하고, 비행기와 기중기, 대포를 만드느라 늘 바빴던 다 빈치는 청탁받은 그림의 마감 시한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다 완성을 시키지 못한 채 다른 일을 시작하곤 했다. 유명한 「모나리자」 역시 4년이나 그렸지만 결국 완성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다 빈치가 그린 여성 초상화 중에 현재까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모나리자」를 포함해 불과 넉 점뿐이다.--- p.46 「1월 다섯째 주, 레오나르도 다 빈치 〈흰 담비를 안은 여인〉」
어쩌면 이 비가 그치고 난 후에 또 한 번 추위가 몰아닥칠지 모른다. 4월에도 눈보라가 날릴 만큼 변덕스러운 게 바로 봄 날씨니 말이다. 그러나 결국 봄은 오고 말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따스할 것이고, 오늘보다 내일의 바람이 더 부드러울 것이며, 오늘보다 내일의 햇빛이 더 환해질 것이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올 더 좋은 날들을 기다릴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그것이 따스한 봄바람이건, 아니면 아직 나를 찾아오지 않은 사랑이건 간에.--- pp.107-109 「3월 넷째 주, 존 슬론 〈봄비〉」
아마도 르누아르는 국립 미술관에 ‘가장 완벽한 상태의 르누아르’를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원래 스케치의 달인인 르누아르가 이처럼 치밀하게 연습을 거듭한 결과로 이 그림은 물 흐르듯 유연한 소녀들의 포즈, 더 없이 화사하고 자연스러운 색감, 꼼꼼한 디테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는 이를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온화한 기운으로 가득 찬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19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다. 그러나 우리는 르누아르 외의 화가들이 그린 ‘피아노 치는 소녀’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르누아르처럼 음악에 몰두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형 상화해낸 화가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pp.138-139 「4월 넷째 주,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소녀들〉」
라르손의 삶을 보면 인생에는 늘 도전 못지않게 물러나야 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가 1870년대의 파리에서 마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카유보트 등 그야말로 쟁쟁한 천재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분투했다면 아마 그의 인생은 좌절과 실패로 점철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인생에는 용기와 도전정신 못지않게, 자신의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냉정한 시선도 필요한 것이다. 마치 이 뜨거운 날씨에는 무조건 바다나 계곡으로 향하는 것보다 느긋하게 집에서 쉬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듯이 말이다.--- p.253 「8월 첫째 주, 칼 라르손 〈벤치에 누워 있는 여인〉」
그림쇼가 밤 풍경을 즐겨 그렸던 것은 이런 딱한 처지와 연관이 없지 않다. 되도록 많은 그림을 빨리 그려야 했던 화가는 ‘밤 풍경’이 그나마 짧은 시간 내에 완성될 수 있는 주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밤에는 많은 사물들이 어둠 속에 묻히기 때문에 대상을 선명하게 묘사하는 데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밤 풍경 그림에는 또 하나의 이점이 있었다. 사용해야 하는 물감들의 개수가 적다는, 그림쇼의 처지에서는 나름 중대한 장점이었다. 다행히도 영국 중북부의 산업 도시들과 런던 도심의 밤 풍경을 그린 그림쇼의 작품들은 꽤 호응이 좋았다. 그림쇼의 스튜디오를 찾은 휘슬러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의 밤을 표현하는 데는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군.”
--- p.304 「9월 넷째 주, 존 앳킨슨 그림쇼 〈리즈, 보어 레인의 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