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은 우리 인생에서 맞는 두 번째 스무 살입니다. 가슴 설레면서 다시 출발하는 첫길이지요. 늘 가던 사무실이나 식당도 처음인 듯, 서른 살에 그냥 지나쳤던 풍경도 처음인 듯, 그렇게 새로 도드라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곧 마흔의 걸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p.7
삶의 끝자락에 누운 뒤 처음으로 편한 잠 주무시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저는 병실 창가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무연히 콧등이 시큰해져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다보니 아, 무슨 꿈을 꾸는지 어머니가 가뭇가뭇 웃으셨습니다. 저도 따라 웃다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발을 살며시 만져드렸습니다. 햇살을 받아 눈부신 두 발이 옛집 마당가의 분꽃보다 더 희고 고왔습니다. 병실이 다 환해졌습니다. ---p.16
‘사람이 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지요.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고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린 갈피를 어루만지는 바람의 손길로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부드럽게 보듬어 안을 때 비로소 그의 일생도 달라질 것입니다. ---p.39
후회는 꼭 뒤늦게 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삶의 ‘노다지’인 줄 한참 뒤에야 깨닫고 땅을 칩니다. 그때 ‘더 열심히 파고들고’ 그 사람에게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늦게나마 알았으니 다행입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땅에서도 꽃을 피워 낼 수 있지요. ---p.47
근심에 잠긴 사람에게는 눈앞의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지요. 희망의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이나 ‘별들 반짝이는 강물’까지라면 더욱 좋지요. 그 여유가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춤추는 맵시, 입술에 번지는 미소를 발견하게 해 주고 진정한 인생의 의미도 깨닫게 해 줍니다. ---p.51
남해 유자의 향은 유난히 짙으면서도 은은합니다. 척박한 땅에서 세찬 해풍을 견디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아프면서 크는 나무,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향기가 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도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고 가장 애틋한 사랑도 위태롭게 흔들리면서 깊어졌으니, 어디 빛나는 꽃과 사랑만 그런가요. 아주 작은 이슬에도 젖고 빗줄기에도 휘청거리는 우리 역시 비바람 속에서 더 따뜻한 잎을 피워 올릴 수 있습니다. ---p.79
산다는 게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저 산의 품새. 세속 도시에서 날마다 ‘밥’과 싸우며 높은 곳으로 단숨에 오르려던 ‘나’를 불러 세우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비탈길에서 높이에 대한 선망으로 하루하루 허덕이던 그 삶이 더 가파른 고비였다고, ‘내가 넘는 것은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어깨를 낮추며 스스로 길을 열어 보이는 산의 눈빛이 순하디 순합니다. ---p.89
모든 결실의 과정에는 아픔이 스며 있습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저 대추의 몸속에도 숱한 상처와 흉터가 새겨져 있지요. 우리의 가을을 더 풍요롭게 해 주는 대추 한 알. 그 안에 태풍과 천둥, 벼락의 순간들이 얼마나 뜨겁게 새겨져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마음이 붉어집니다. 저 둥근 아름다움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무서리와 땡볕, 초승달의 나날이 녹아 있는지. 찬 이슬을 맞고 가장 붉게 몸을 말린 대추를 홍조紅棗라고 부르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p.99
잘나갈 땐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줄만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이파리 없는 줄기가 어디 있으며, 줄기 없는 뿌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그림자에 가려 발밑도 하늘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을 맨몸으로 견디는 순간에야 ‘저만큼 멀어진 친구’나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을 발견하게 됩니다. ---p.101
그에게 아버지는 ‘하늘의 손이 머리를 꽝 쥐어박는 듯한 느낌’과 함께 새로운 시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한때 하늘이었다 흙으로 돌아간 그분이 지금도 온전하게 자신을 지켜 주는 ‘빛’이라고. 저도 그랬습니다. 올해 어버이날도 안부 인사드리려고 전화번호 누르려다 아, 이젠 안 계시지…. ---p.107
우리가 완전한 사랑에 빠졌을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기 안의 타인을 밀어내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강물처럼 밀려드는 사랑 앞에 모든 걸 내주고, 자신마저 버릴 때, 마법 같은 합일의 순간은 찾아오지요.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순간, 사랑 역시 우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을. ---p.123
하지만 제아무리 좋은 것 앞에서도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외로울까요. 이럴 때 시인은 ‘눈’ 대신 ‘귀’를 엽니다. 외로움은 그리움의 등을 때리는 결핍의 종소리라는 것, ‘진짜 외로운 사람’은 그 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더 아파야 한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p.143
여태껏 ‘나의 밝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그 빛에 이끌려’ 그대가 온다고만 믿었는데, 아하 비로소 알겠습니다. 사랑이란 ‘그대, 나의 그늘을 보시고도/ 기꺼이 내게 오셨다는 걸’ 이렇게 천천히 깨달아가는 일이라는 것, 그대의 그늘 속으로 나 또한 기꺼이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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