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구 목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십자가 목자다. 그는 독일 선교사시절 수집한 천 개가 넘는 각종 십자가로 ‘세계의 십자가전’을 개최했는가 하면 그 감동과 생각을 모아 2011년에는 묵상집 「십자가 사랑」을 내기도 했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이번에 다시 십자가 그림, 조각 등을 ‘생명’, ‘정의’, ‘평화’ 3부로 분류해 도판을 배치하고 이에 대한 성경적, 목회적, 영성적 해설을 달았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10월 30일부터 개최되는 제10차 WCC 부산 총회의 주제인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에 맞게 도판을 분류하는 시의적절하고도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WCC 총회에 오는 외국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과 영어로 수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세계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그것들과 나란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십자가를 수록한 것이 이 책의 아름다운 점이다. 저자는 한국 작가 20여 명을 직접 찾아다니며 작가와 작품을 발굴한다. 그들은 모두 한결 같이 십자가를 단지 예술작품으로 만들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재료를 찾았고, 일용할 양식처럼 십자가를 표현했다는 게 저자의 증언이다. 그들이 십자가를 순례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그들의 삶의 자리를 순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장은 각각의 주제를 13꼭지로 풍성하고 다채롭게 펼친다. 첫 장인 ‘생명’ 부분에서 이미애의 ‘수의 십자가’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감싼 세마포를 형상화한다. 세마포 수의는 온 몸에서 배어나온 피와 땀과 물을 흡수하고 감싸준 거룩한 옷이 아니던가. 사진작가 권산은 구름이 빚어낸 형상, 뚝섬 숲의 하늘, 모닥불, 전봇대와 전깃줄이 만든 십자가 형상 등 자연이 그려낸 십자가의 흔적을 포착해 낸 작품들이다. 그는 카메라를 통해 이 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바꾸는 영혼의 눈을 갖고 있다. 슈바르츠발트의 팔이 잘려나간 팔 없는 십자가는 매우 인상적이어서 죽은 몸도 움직일 것 같은 통증을 마음에 일으킨다. 소재에서 이진근의 느티나무 십자가와 변경수의 풀꽃으로 만든 십자가는 살아 있는 식물이 십자가의 소재가 되었다는 점에서 십자가 구속의 의미를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연과 온 생명체까지 생각하는 계기를 주며, 홍콩의 타오 퐁 샨의 연꽃 십자가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 위에 세워진 십자가라는 의미에서 불교의 토양에서 자란 기독교, 곧 불교적 기독교의 심벌이라 할 것이다. 천 조작들을 이어 만든 이해은의 조각보 십자가는 한국인이 다용도로 쓰던 보자기를 연상케 하면서 십자가에 대한 풍성한 영감을 자아낸다.
둘째 장인 ‘정의’ 부분에서 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 파독 광부로 산 황재형의 광부 십자가, 막달라 마리아처럼 십자가를 끝까지 따라간 세계 여성들이 만든 십자가, 강원도 고성에서 목회하면서 10여 년 동안 6,000개가 넘는 십자가를 만든 채현기의 다릅나무 십자가, 조작가이며 용접공이기도 한 정혜레나 사모의 인간 십자가는 보는 이의 마음에 긴 파문과 공명을 일으키며, 특히 가톨릭의 김진규의 진복팔단 십자가는 한국적 정서에 부합하는 십자가로서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민주화와 사회 정의, 경제 정의, 생태 정의 등 정의를 향한 외침과 투쟁에서 생산되거나 사용된 십자가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노동의 현장에서 나온 “노동자의 12자 기도문 십자가”가 있어 위안이 된다. “모든 사람을 위한 밥과 빵과 옥수수”, 정의의 출발점이다.
마지막 장은 ‘평화’의 십자가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며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사귐이다. 여기 십자가의 형상에는 사랑과 사귐을 통한 평화의 혼이 웅숭깊게 담겨 있다. 특히 세계 교회의 일치와 세상을 섬김으로써 교회의 일치뿐 아니라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세상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에쿠메네 십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청년들의 고민과 아픔을 담아낸 반전 십자가인 “위그넹 십자가”,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페터 피셔의 “철조망 십자가”, 한반도의 남과 북이 통일을 염원하면서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면서 KNCC가 만든 “희년 십자가”, 통일을 꿈꾸면서 1989년 작시한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서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를 읊음으로써 온 국민에게 다시 통일의 꿈을 지핀 문익환 목사의 흉상이 들어간 십자가, 발칸 반도 코소보 내전의 비극을 고발한 “코소보의 총알 십자가”는 피와 죽음의 구렁에서 평화를 희망하는 인류의 소망을 웅변하는 십자가 형상들이다. 평화를 향한 길 위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꿈꾸는 한 마당에서 이영우의 “찬양 십자가”의 노래 소리는 온 땅에 기쁨과 환희를 선사한다.
모든 생명을 가진 생명체는 고통을 느낀다.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며 이 고통은 인간의 고통만이 아니라 새 창조가 되고자 하는 온 생명체의 고통이기도 하다. 로마 병정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거기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인간과 온 피조물의 죄를 속하는 피이며 정화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영원한 생명수이기도 하다. 현대의 세계적인 작가들이 종교적 삶 없이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뒤틀고 왜곡하여 이상하고 역겨운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 이름을 날리려고 한 반면, 이 저서의 작가들은 영혼 깊은 곳에서 만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한 땀 한 땀 수놓고, 한 획 한 획 붓질하고, 한 끌 한 끌 마음에 새기는 심정으로 나무에 조각하거나 뜨겁게 달아오른 구리를 마음에 붓는 심정으로 청동으로 조형했다. 이들이 모두 세계적인 이름난 작가는 아닐지 몰라도 “종교예술은 종교적 삶으로부터만 우러나온다”는 말씀은 이 그림들을 감상하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심광섭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조직신학·예술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