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인생에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을 때, 우리 두 사람의 인생에 사하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기꺼이 인생의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이자 변곡점이 되어주었다.
‘사하라!’ 일단 그 이름이 주는 첫인상도 남달랐다. 매일 지지고 볶는 문제투성이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마치 우주의 정반대 편에 있을 것만 같은 경이로운 이름. 그곳에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달리며 이생의 막막함과 지난함을 관조했다. 죽도록 괴로운 문제나 미칠 것 같던 고민들도 ‘사하라의 체험’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만한 일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고맙고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 독자 여러분도 울고 싶을 때는, 우리처럼 사하라로 떠나라고. 그럼 다 된다고. ---p.5
독일어 중에 ‘앙스트블뤼테angstblute’라는 말이 있다. 이는 환경이 열악해져 이듬해에 죽을 것을 예감한 전나무가 유난히 화려한 꽃을 피우는 임상학적 현상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말은 ‘불안’을 뜻하는 앙스트(angst, anxiety)와 ‘개화’를 뜻하는 블뤼테(blute, blossom)의 합성어다. ‘앙스트블뤼테’는 결국 두려움 때문에 피어난 꽃의 만개滿開이며, 완전한 소멸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극명해지는 살아 있음의 항거인 것이다. 생명체가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순간이다.
가장 불안한 시기에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전나무의 꽃처럼, 위업을 달성한 사람들은 모두‘역경’을 뒤집어 아름다운 ‘경력’으로 만들어낸 사람이다. 불안한 때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열망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힘과 에너지를 집중해 온몸을 버리고 피워내는 절정의 꽃, ‘앙스트블뤼테’를 경험하는 시기이다. 불안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의 의지와 힘을 짜내 꽃을 피워내는 전나무들처럼, 창조는 불확실한 한계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탄생한다.---p.84
자꾸 발목이 잡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밖에 있기보다는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깨달으면 화도 덜 나고 불평도 줄어든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볼 수 있는 것,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믿는다.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은 보지 않으며, 믿고 싶지 않은 것,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거나 자신이 믿고 있는 사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봐도 못 본 척한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싶으면 다르게 체험하라.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이미 내가 본 것이다. 지금 내가 사막을 바라보는 것도 내가 이제까지 생각하고 믿은 것 안에서 보고 싶은 사막만 본 것이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p.62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가 정말 누구인지를 모르고 100년을 사는 것보다 내가 정말 누구인지를 알고 지금 당장 죽는 게 나아요.”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꿈꾸고 싶은 미지의 세계는 과연 어떤 세상인가? 그것
조차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그 꿈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내가 누구인지, 가장 신나는 일이 무엇인지, 내 꿈의 목적지는 어디인지 모른 채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현실은 녹록치 않다. 수많은 걸림돌이 있고 장애물이 즐비하다. 삶은 ‘살지 말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p.42
내가 지고 가는 배낭의 짐은, 버리지 못하는 욕심의 짐이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짐’의 반대말은 ‘줌give’이라고. 남에게 내어줄수록 나에게 더욱 가벼워지는 것. 욕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나의 짐은 곧 줌이 된다는 말이다.
사막 레이스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 중의 하나는 바로 ‘짐’의 무게다. 아마추어의 배낭은 일단 프로보다 크다. 프로의 배낭은 아마추어의 배낭보다 현저하게 작다. 최소한의 음식과 물건만 챙기고, 나머지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심리적 자세와 각오면 충분하다. ---p.51
나는 모든 순간에 솔직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힘들면 힘들다,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인정하면 몸이 스스로 처방을 내려주고 완급을 조절해준다. 오지레이스는 그런 면에서 내면에 숨겨진 자신을 만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내가 아직도 사막을 달리는 것은 여전히 진짜 내 모습을 찾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나를 만나는 수없이 많은 시간들을 통해서도 어쩌면 결국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시 목숨을 걸고 오지를 달리고 작은 프레임 안에 나를 담으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적어도 그 순간에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낀다.---p. 166
나는 12년 동안 사막을 달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회 중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가장 먼저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려 한다. ‘지금 나의 상태가 어떻고, 문제가 무엇이며, 버틸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문제를 더 크게 만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한 자세로 자신과 만나야 한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목소리를 들으려 애쓴다. 물론 언제나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나는 게 현실이라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그러니 매번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바보처럼.
분명한 것은, 사람이 내면의 자신을 만나는 상황에 닥치면 생각지도 못한 에너지가 분출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위기를 극복하게 만드는 ‘긍정 에너지’라 부르고 싶다.---p.173
“돼지새끼가? 마라톤 풀코스 한 번 뛰어보지도 않고 무슨 사하라? 죽으려고 환장했나?”
2001년 7월. 나는 키 179cm에 몸무게가 90kg이나 되는 다소 돼지 모양새를 띈 사람이었다. 외관은 더욱 무거워 보였다. 그 당시 나는 10년 전에 자전거를 타고 2개월 간 전국일주를 해본 것 외에는 특별히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사하라 사막을 달리겠다고 하니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당연지사. 그것이 내 도전의 시작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 대해 ‘운동이라곤 지지리도 못하는 인간’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미쳤다.”는 반응과 “관두라.”는 얘기들이 내 앞에 쏟아졌다. 특히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 나는 굉장한 이단아로 보였나 보다. 간혹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절대 다수가 내 도전에 부정적인 반응뿐이었다. 내가 내 돈 내고 사하라를 달리겠다는 왜들 그러지? 마라톤 풀코스를 안 뛰어본 사람은 하면 안 되는 건가? 그리고 좀 뚱뚱하다고, 그렇게까지 사람을 끌어내릴 수가 있나?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p.181
‘내가 이 아름다운 사막 위를 달리고 있다!’ 주변에서 탈락자가 생기면 이러한 생각도 사라지고 그다음부터는 온통 장애물만 보인다. 낭만보다는 고통이, 즐거움보다는 짜증이 밀려온다. 간혹 오지의 사막 위를 달리며 쌍욕 방언이 터질 때도 있다. 참으로 다양한 한국말의 표현법을 터득하게 되고, 거기에 무엇이든 갖다 붙여 욕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피식 웃겠지만,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심지어는 기쁠 때도 여지없이 욕이 터져 나온다. 이것은 오지를 달려보지 않은 사람에겐 상상하기 힘든 일일지 모른다.---p.210
사람들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나는 조금은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다.
“인생, 최선을 다하지만 최선을 다하지 말자.”
매순간, 모든 걸 바쳐 치열하게 사는 것은 중요하다. 꿈도 열정도 다 좋다. 하지만 매번 내가 가진 100%를 쓰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다. 최선을 다하지만 절대 내가 정한 ‘최고’의 선을 넘지는 않는다. 나는 항상 80%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나머지 20%는 결정적인 때를 위해 남겨두려 한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기준과 생각,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기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비행기는 엔진의 힘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기류의 흐름을 잘 이용해야 하지 않던가. 그러면 좀 더 쉽게 기름도 아끼면서 멀리 날아갈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때때로 자신의 힘이 아닌 남의 동력을 이용해야 할 시기가 있다. 가끔은 그 전체의 흐름에 자신을 맡길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타협이 아니다. 비굴해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힘을 아끼는 현명함이다.---p.218
인생도 마찬가지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쌓이고 쌓여 전체의 인생이 완성된다. 그러기에 살아남아야 한다.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세상을 만드니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룰을 하나둘 무시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바라보며 나만의 색깔을 찾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을 때 나에게 맞는 선배, 소위들 말하는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건 나 스스로가 그 롤모델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택한 방법은 ‘남들보다 반보만 앞서가기’다.
나라고 해서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배워가고 있기에, 심오한 이야기는 해줄 자신이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 길이 옳다고, 이 길로 가자고 할 때 의문을 가지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과감성만 있다면 분명 누구든지 자신의 길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