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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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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150g | 125*200*20mm
ISBN13 9791192333267
ISBN10 119233326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더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오래 펼쳐진 잠과 얼룩들은 소나기에 젖은 책처럼 부풀고
창문이 만져지는 구름은
그러나 보이지를 않는군요
물 항아리처럼 출렁이는 오후를 멀리서 그냥 듣기만 할 거예요
(……)
최대한 많은 이름을 여름에 빌려주고 싶었지만
아주 간절해지는 것들은 때로 지루해져
구두를 벗습니다
책장에서 여름의 목록을 정리하고
저녁이 내리는 오후의 테이블은 이제 낭독회를 열 준비를 합니다
---「금요일의 문장」중에서

양의 울음이 언덕 너머 멀어지지 않도록 소매에 달아 놓았습니다
장화를 신은 허름한 걸음 사이로 해진 자투리 천을 모아 버려진 팔들을 넣었습니다
튀어나온 어깨를 다듬어 맞추고
베개 커버를 뜯어내어 몰려오는 밤안개를 덮고도 우리 심장은 따뜻합니다
---「알바니아 의자」중에서

목이 긴 하얀 초를 꽂고 또 꽂아도 여름은
발톱을 세우지 못한 머릿속처럼 자주 정전이 되었다
(……)
마지막이지
죽은 자들의 손톱 같은 흰 문장을 다듬으면서
슬픈 냄새를 길러내는 이곳은 언제부터 늪이었을까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늪이었을 거야, 아마도」중에서

어떤 감정들은 식탁 가장자리에 놓인 빈 접시 같아
젓가락과 숟가락은 서로의 비밀과 안부를 묻습니다
비밀은 숨바꼭질하다 잠들어 깨어난 아이처럼 되돌아오고
식욕은 왕성했으니 먹어도 먹어도 내일은 자꾸 태어납니다
---「콜링 유」중에서

고양이가 태어난 게 분명하다
고양이가 울었으니까
소리로만 짐작할 뿐이지만
귀는 벽이 되어 있어
내 귀는 꽈리처럼 쪼그라들어 고양이를 가둬 놓는다

언제나 이맘때면 되돌아오는 그런 날이 있다
녹아 버려서 울음이 될지도 모르는 날들
마른 울음 한번 터트리지 못한 첫아이는
물컹 내 속을 빠져나갔다

매일매일 울음은 저녁 무렵을 통과했다
벽을 사이에 두고
고양이 소리가 더 큰 벽을 만들어 지붕을 씌운다
귀를 기울일수록
벽이 있었으니까
꼬리가 사르르 사라질 때까지
내가 태어나고 있었다
---「벽」중에서

우리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지만
잘 알고 있습니다

밤이 오면
염료를 끓입니다
흑해를 건너온 울트라마린은 긴 여행이 필요했죠
바다 건너 이 작은 냄비에 끓여지기까지
문장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을까요

염색공의 손바닥은 넘기면 넘길수록
마음에 자꾸 지나가는 구절들만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밤에는 넓은 잎을 가진 목화송이들이 기쁘게 피어날 것입니다
---「염색공」중에서

늘 북쪽에서 살았어 이상하게 북쪽은 물가와 집값이 싸고 넓었으니까
고백이라면 내가 누웠을 때 멀리서 여름이 찾아와 오늘 일을 하고
주말에는 혁신도시에 나가 대형 마트에서 바코드를 찍었지
마술 같은 일이었어
꿈을 꾸다 깨지 않아도 즐거운 작업이 될 텐데
어느 시인이 말해 주었지 샤갈은 시인의 얼굴에만 녹색을 칠했다고
야옹, 점심엔 점심의 고양이가 찾아오고 양배추와 감자는 완성되어 갔지만
낯선 동네에 있을 때 불안하지
아무도 없을 때 통증이 찾아왔으면
통증이란 빛바랜 낡은 가방 속 흰 알약들이 우르르 쏟아질 때처럼
순간과 영원의 반복이었으니까
이제 미안한 일도 지루한 일이지만
서랍 속을 열고 색색의 야광 펜들을 하나둘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면
나무들은 모두 보호수가 되었을 텐데
다음 생에도 난 자몽 색 고양이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오래된 베개 속에 말린 팬지꽃을 넣어 두었지
---「자몽 고양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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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의 시집은 원색으로 가득 채워진 팔레트다. 안이한 정서나 지적 포즈에 길들지 않은 염색공이 붓과 펜을 번갈아 집어 들고 간절한 호흡으로 은종을 울리고 있다. 심장 소리, 고통의 변주, 슬픔의 기억들이 햇빛에 반사되는 색채 이미지로 화하는가 하면 감각적인 언어로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은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걸어가
당근 색 페인트를 사 올 수 있다면
흰 벽을 칠하고 당나귀 두 마리를 키울 거야
- 「잠」 부분

구태여 반발하거나 어떤 대결 의지를 보여 주지 않고도 산뜻하고 이채로운 언어들만으로 살아 있는 벌판이다. 그리고 그이의 팔레트 벌판은 조요照耀한 저녁에 가벼이 이르기도 한다. 제 몸속의 화가가 제 몸속의 시인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내지르는 심미적 탄성이다. 여기 가을비처럼 은밀한 시인 하나가 떠오르고 있다.
- 문정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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