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라 불리는 새벽 4시. 한때는 이 시간에 퇴근을 하는 것도 다반사였지만, 최근에는 오롯이 잠의 시간으로 보내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불면증 혹은 걱정증이 있어 지금처럼 종종 거실의 불을 켜고 앉아 SNS 창을 뒤적이거나 멍하니 풀벌레 소리를 듣거나 차를 한 잔 타서 예민한 신경을 달래보곤 합니다.
불안, 걱정, 시샘, 욕심, 질투는 모두 제가 데리고 사는 아이들입니다. 어려서 부터 어쩐지 이런 감정들과 친했고, 주변의 많은 이들을 시샘하고 질투하다 보니 그렇지 못한 자신을 다그치게 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곤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 낼 만큼 능력이 출중해서 원하는 스펙을 쭉쭉 쌓거나 질투하는 이들을 앞서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량화된 것들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은 언제나 저에게는 멀리 있었고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좀 더 열심히 해 봐’ 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지만 전 사실 그보다 더 할 수는 없을 만큼 제 딴에는 최선을 다했기에 ‘더’ 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좌절도 많이 하고 일희일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제가 속하고 속하려 하고 달리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았고, 오롯이 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것, 남보다 조금 잘 하는 것을 보기로 했고 저의 걸음대로 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퇴사였고, 처음 잘 할 수 있는 것에 매달려 본 것이 그림이었고, 다시 내 방식대로 가 보기로 한 것이 우리 회사였습니다.
---「불안걱정시샘욕심쟁이」중에서
친구 소개로 강남역 서울극장 앞에서 만난 이철은 모든 것이 무성의했다. 그래도 소개팅인데 예약해 놓은 식당에서 만나진 않더라도 만나서 갈 식당 정도는 알아보고 나왔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기에 우리는 12월23일 차가운 공기를 헤집고 뒷골목으로 어영부영 걸었고, “뭐 좋아하세요” “아무거나요”라고 아무 말이나 하다 눈에 보이는 우동집을 들어갔다. 하필 그 식당은 자율배식 방식이었고 먹기 좋아하고 내숭 질색인 나도 차마 첫 만남에서 식성껏 담을 수 없다 보니 한 두 접시 쟁반에 올려 담았다. I의 첫인상은 어쩐지 고지식하고 깐깐해 보이는 모습보다 식사장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식의 자율배식 식당이 더 강렬했다.
불평불만을 반찬으로 삼아 씹어낸 우동을 소화시키기도 해야 했고, 여기서 끝내면 이 소개팅 남은 ‘자율배식남’으로 남을 것 같아 “간단히 술이나 한 잔 해요” 하면서 뒷골목의 꼬치오뎅집으로 이끌었다. 사실 남자가 일방적으로 스케줄 잡아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데리고 다니는 데이트를 질색했고, 뭘 하고 싶고 뭘 먹을지 물어봐 주거나 선택권이 나에게 있는 관계를 더욱 좋아한다.
---「시작은 연인」중에서
사실 나는 왼손잡이였다. 어릴 적 나는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 어릴 때 엄마와 외출하려 지하철을 타면 엄마와 오빠는 잘 가는데 나만 항상 개찰구에서 들어갈 수 없었다. 당황한 나에게 엄마는 “왼쪽 칸으로 들어와야지~” 라고 말씀하시면 들어갈 수 있었다. 왼손잡이인 나는 표를 왼쪽에 넣고 오른쪽에서 들어가니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기억은 많다.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나는 종종 동 호수를 반대로 읽어 낭패를 봤다. 142동에 가야 하는데, 자꾸 241동이라 읽었고, 도대체 왜 241동을 142동이라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이렇게 뼛속까지 왼손잡이였으니, 그림도 글씨도 자도 가위도 왼손으로 썼다.
그런데, 이런 나의 왼손을 아버지는 지독하게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기필코 글씨와 밥은 오른손으로 먹게 하셨고, 유년기에는 그것만 오른손이었지만, 점차 오른손으로 모든 것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잘하는 게 없어져간 때가.
---「왼손잡이야」중에서
O가 운영하는 불필요상점이라는 곳이 있다. 세상의 진귀한 빈티지들을 모아 판매하는데, O는 ‘생활에는 불필요하지만 삶에는 필요한 것들’이라는 의미로 필요한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O의 이런 캐치프레이즈에 반 해 이런 것들에 눈을 떴다. O는 사실 J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센스와 안목이 탑클라스인 J가 믿는 곳이라 신뢰가 갔다.
그렇게 소개 받은 O의 피드에는 각각의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출처와 소개 글이 하나하나 에세이 같았고, 선택하는 물건들에 대한 애착이 보였다. 그렇게 피드를 통해 보아오다 용기 내서 첫 주문한 아이들은 작은 도자기들이었다. 일본에서 온 아이들이었는데, 집에 있는 주병과 같이 놓기도 좋고 해서 구매했다. 그렇게 사무실 한 켠에 작은 도자기 세 점이 놓였는데 명인의 도자기와는 달리, 때론 꽃을 꽂고 때론 향을 피우는 등 편안한 즐거움을 주었다. 다음으로는 그릇을 데려왔는데 취향에 맞는 그릇들을 백화점에서 사려면 대단히 비싸 번번이 포기하던 차에 O를 통해서 작은 그릇들을 사게 되었다.
---「생활에는 불필요하지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