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상한 짐승은 김생원을 쏘아보았습니다. 눈에 푸르스름한 귀기가 돌았습니다. 이 세상 짐승 아닌 저 세상 요물이었습니다. 그때 벌렁 넘어져 있던 한 입 거리 선비가 일어났습니다. 역시나 한 쪽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요. 그는 이를 악물고 호통을 쳤습니다.
“영노! 이 양반 잡아먹는 괴물아. 오늘 너는 이 목멱산에서 최후를 맞을 것이다.”
--- pp.21~22
어느덧 그의 코에 선선한 밤바람이 닿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영노는 사라졌습니다. 대신 한 입 거리 선비가 누런 종이 한 장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 종이가 바람에 펄럭이듯 꿈틀거렸습니다.
“아까 내 이 종이를 주머니에서 찾다가 그만 공격을 당하였소.”
“그 종이가 왜 자꾸 흔들리는 것이오?”
한 입 거리 선비가 다가와 김생원 앞에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 종이에 쓰인 붉은 글씨가 보이시오?:
종이에는 빙(氷)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빙자에 눌린 영노는 자벌레처럼 작아져 있었습니다. 꿈틀대는 긴 대가리와 긴 팔다리도 보였지요. 그는 종이를 둘둘 말아 다시 도포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이걸 귀신 잡는 빙지라 하지요.”
“그걸로 귀신을 잡는다고?”
--- pp.24~25
고요한 밤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해시에서 자시가 넘어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생원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였습니다. 이날 그가 잠 못 이룬 까닭은 다른 밤과는 달랐습니다. 그의 나이 열아홉, 관례까지 올렸지만 장가를 들지 못한 총각이어서 밤이면 마음이 산란했지요. 하지만 이날 밤은 달랐습니다. 머릿속에 영노를 때려눕힌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구미호를 닮은 한 입 거리 선비가 영웅이라 칭해준 것도 은근 기분이 좋았습니다.
“꽃을 보러 갔다, 괴물을 보았다. 그러다 영웅이 되었다. 참으로 기이한 밤이로다.“
--- pp.32~33
김생원이 빠른 걸음으로 쫓았지만은 영노란 놈도 날쌔기가 담비보다 빨랐습니다. 영노는 세월을 날 듯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달렸습니다. 그러면서 세 번 네 번 계속 재주넘기를 했습니다. 재주넘기를 할 때마다 선비의 꼴이 점점 영노의 꼴에 가까워졌습니다. 김생원은 검은 그림자 같던 선비가 몸피 있는 괴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갓이 떨어지고, 상투에서 뿔이 자라고,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시커먼 두루마기가 펄럭펄럭 나부꼈습니다. 김생원은 돌을 주워 힘껏 돌팔매를 날렸지만 소용없었지요. 김생원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가쁜 숨이 사라지자 어느새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습니다.
‘저 괴물, 원래 나와 같은 선비였던 것인가?’
--- pp.42~43
그날 밤 오라비와 여동생 사이에 고성이 오갔습니다. 김생원은 여동생이 한낱 무꾸리가 된다는 말에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순덕 역시 고집을 부렸습니다. 굿하고 치성을 드리는 무당이 아니라 귀신도 찾고 돈도 벌 수 있는 일 아니냐며 우겼습니다.
“더구나 알고 보면 가업 아니겠습니까? 제가 방울을 들고 춤을 춥니까, 아니면 엽전을 들고 점을 봅니까? 그저 한양 곳곳에 숨어 귀신이나 괴물을 찾아 돈을 번다는데 그게 그리 못할 짓입니까?”
“양반 가문의 여인으로 그게 할 짓이란 말이냐?”
“다 쓰러져 가는 가문에서, 시댁에서 쫓겨난 여인이 할 일이 있는 줄 아오. 그냥 죽을 때까지 뒷방 신세거나 보쌈으로 팔려가는 게 전부지. 나는 그렇게 살긴 싫습니다.”
--- pp.79~80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직접 만나보시겠습니까?”
순덕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천한 망나니의 신령이라 양반가의 아씨께서 만나기가 불편하시려나?”
“아니오, 어쨌든 왜 한양에 영노가 창궐했는지 들어야만 하니까.”
“그치, 그건 우리 망나니 할매나 알 수 있소. 나야 뭐 그냥 괴물하고 귀신만 때려잡던 놈이니 뭘 더 알겠소. 뭐, 영노들이 지독한 놈이란 건 알고 있지만.”
“영노가 뭐가 지독하오?”
김생원이 싸늘하게 물었습니다.
“글공부만 하던 괴물이라서인지, 벽창호에 이기적이고 답답하기까지 하오. 거기다가 또 다른 괴물하고 다르게 머리는 좋아서 잡기가 쉽지 않단 말이지. 물괴나 불가살처럼 좀 큼지막한 괴물이면 싸우는 재미라도 있지, 그냥 벼룩처럼 튀어서 도망 다니는 놈을 잡자니 영 신명도 나지 않고 그렇다고.”
--- pp.161~162
다행히 백두산에 새벽이 올 때까지 호랑이 울음소리나 귀신들이 다가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나였지만 조금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는 혼령이자, 인간이자, 삯귀인 나도 알지 못하는 무서운 것들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조선의 밤입니다. 또한 조선에 귀신 잡이 빙고선비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죠. 나라님도 무서워서 못 건드리는 것들과 우리는 싸우니까요.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신령한 백두산 천지 앞에 섰습니다. 문득 그 말이 떠올랐죠. 이곳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하면 저승까지 들린다는 황철 영감의 말.
“나 우팡이, 아니 빙고선비입니다. 내가 귀신 잡는 선비가 됐다고요. 내 목소리 잘 들려요? 잘 가요, 황철 어르신, 나를 다시 인간 세상에 살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걱정 말고 훠이훠이 떠나세요.”
나는 큰 소리로 그에게 말을 한 뒤 큰 절을 올렸습니다. 내가 발길을 돌려 산을 내려가려 할 때였습니다. 잠시 뒤, 백두산의 미명이 밝아오는 하늘에서 쿠쿵, 노인의 기침 소리 같은 마른천둥이 들려왔습니다. 이제 산을 내려가 다시 사대문 밖 성저십리의 나의 집으로 돌아갈 때였습니다. 귀신 잡이 황철 영감의 집이였으나, 이제는 조선에 하나뿐인 삯귀 괴물 빙고선비의 집으로요.
--- pp.273~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