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의 어느 젊은이, 그는 북으로 가는 북파간첩이었다. 휴전선을 넘어가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공작임무 노트에 시를 썼다. 저녁노을을 보며, 자신의 깊은 가슴속에서 울리는 존재의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대자연에 무슨 남북이 있고, 어떤 이념이 있고, 상대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가 있겠는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도 자신의 목숨보다 고아 같은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이 절절하다. 이 시를 쓴 북파공작원은 형 안병기, 그 남동생 안병환은 당시 부산 문현동에 살고 있었다...
북파공작원은 바로 우리 이웃의 형과 동생, 누이였고, 자식이었다. 순박한 시골 청년과 가난한 서민의 자식들이 국가의 부름 아래 흔적 없이 산화해갔다. 농민, 노동자, 어민, 체육인, 교사에서부터 현역군인과 제대군인, 경찰까지 직업을 막론하고 소리 없이 ‘공작원’으로 동원되었다. 13세의 어린이부터 20세의 청년, 심지어 53세의 장년까지, 심지어 18세의 꽃다운 여성공작원들까지도 죽음의 고개, 휴전선을 넘어갔다...
조국을 위해 휴전선을 넘었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한 비극의 북파공작원이 무려 8천여 명, 정확히 7,987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믿겨지는가...”
---「머리말」중에서
“간첩, 첩자, 공작원? 어, 그거 북한 빨갱이들이 하는 짓 아니야. 남한에서 ‘간첩’ 하면 으레 ‘북괴 무장공비’ 또는 ‘빨갱이 간첩’을 떠올린다.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무장공비의 ‘공비’는 ‘공산비적’의 줄인 말이다. 그런데 남한도 북한에 ‘간첩’을 보냈다고? 그렇다. 북한이 남쪽으로 간첩을 파견했듯, 남한도 북쪽으로 간첩을 파견했다. 그것도 북한보다 훨씬 더 많이 보냈다. 다만 그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왔을 뿐. 지금까지 북한만 ‘간첩’을 보냈다는 ‘정답’은 이제 ‘오답’으로 처리돼야 한다. 북한이 남쪽으로 파견한 간첩을 ‘남파공작원’(남파간첩)이라 한다면, 남한이 북쪽으로 파견한 간첩은 ‘북파공작원’(북파간첩)이라 한다.”
---「북파공작원이란?」중에서
“남북이 서로 악마화했던 그들, 공작원들은 정말 악마였나?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갔는가? 그러나 그들은 머리에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의 형이고 동생이며 이웃이었다. 그들을 악마로 만든 것은 분단이요 이데올로기였다. 이제 “빨갱이만 간첩을 보냈다”는 냉전 시대 우상은 파괴되었다. 공작원 파견은 분단 시대의 아픔이고, 민족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북파공작원은 주로 농촌 청년과 가난한 도시 빈민의 자식들이었다. 그 외 농민, 노동자, 어민, 체육인, 교사에서부터 현역군인과 제대군인, 심지어 경찰 공무원까지 공작원으로 동원되었다. 연령별로는 체력적으로 왕성한 20대가 대부분이었으나 13세의 어린이부터 심지어 53세의 장년까지 동원되었다. 남자뿐 아니라 20세 전후의 젊은 여성공작원들도 적지 않았다. ”
---「누가 공작원이 되었나?」중에서
“북파공작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비밀 훈련소가 은밀히 세워졌다. 훈련 장소와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북파공작원 훈련소는 한 마디로 살상 무기를 만드는 인간병기 제조창, 살인병기 대장간이었다... 북파공작원 교육은 한마디로 지옥훈련이었다. 적을 죽이고 내가 살아야 하는 특수공작의 성격상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을 참아내야 했다. 그래야 공작임무를 완수하고 살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이 상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결코 특수공작도 성공할 수 없고, 더구나 무사 귀환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이처럼 휴전선을 넘어갔다 살아오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을 통과해야 했다.”
---「인간병기로 다시 태어나는 살인훈련」중에서
“암호명 ‘호랑이공작’팀은 우리 군 3사단(백골부대) 지역에서 제초제가 살포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휴전선(DMZ)으로 들어갔다. 그때 고인돌처럼 넓고 납작한 바위에 끔찍한 시신이 놓여 있었다. 오른팔과 왼팔, 두 다리, 그리고 목까지 절단된 끔찍한 토막 시신이었다. 눈은 죽어서도 한 맺힌 표정으로 부릅뜨고 있었다...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하고 쓰러져간 수많은 북파공작원들의 영혼이 이처럼 휴전선을 떠돌고 있다. 휴전선에는 음산한 기운을 몰고 오는 까마귀 떼가 유난히 많은데, 끄악~까악~ 하는 소리가 마치 허공을 떠도는 유령의 통곡처럼 들린다고 한다. 까마귀는 시체나 썩은 동물의 사체를 먹는 잡식성 새이다 보니, 휴전선의 해골들이 그들의 먹잇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승으로의 여행, 휴전선을 넘어라」중에서
“당시 철책선 공사를 하다 일어난 숨은 이야기... ‘당시 12사단에 근무하며 철책선 설치 작업을 하던 모 육군중위가 “누가 이러한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비무장지대(DMZ)로 나라가 분단된 것이 가슴 아픈 데 나는 양심상 여기에 철책을 치는 작업에 종사할 수 없어 떠나갑니다”라는 내용의 편지 1통을 써놓고 월북한 사건이 그것이다.’ ‘양심이 철책 작업을 허락하지 않아 북으로 간’ 아무개 중위처럼 1953년 휴전 이후 2004년 말까지 월북한 군인은 모두 450여 명에 이른다.”
---「육군중위, ‘양심상 철책을 칠 수 없어 월북한다」중에서
“경기도 의정부시에 사는 윤정순 씨(70·당시 26세)는 오늘도 옷장에 있는 이불 속에 언제 올지 모르는 남편 이준영 씨(당시 28세)를 위해 따뜻한 밥공기를 넣어둔다. 윤 씨는 밤마다 남편 사진으로 만든 영정 앞에 촛불을 태우며 살아 돌아오길 기도한다...윤 씨의 남편 ‘이준영’은 정보사가 보관하고 있는 육군첩보부대 사망자 명단(1960~1972년)에 그 이름이 올라 있다. 국가는 지난 40여 년간 윤 씨를 그렇게 속였다. 그러나 윤 씨는 지금도 남편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오늘도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윤 씨에게 남편은 여전히 스물여덟 청년이니까.”
---「망부석의 한」중에서
“한국전쟁 중 여성공작원들은 살인이나 파괴 등을 위한 무장공작원이라기보다는 군사정보 등을 수집하기 위한 이른바 스파이(간첩)으로서의 역할을 주로 했다. 특히 여성들은 전쟁 기간 중 의심을 덜 받기 때문에 정보수집 등에 유리하기도 하고, 남자공작원을 보호하기 위해 부부로 위장하는 데 필요하기도 했다. 여성공작원의 경우에는 북한군 고위 장교들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뒤 회유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캐내는 ‘마타 하리 공작’과 전선에서 신분을 위장한 뒤 적진의 위치와 규모 등을 수집하는 ‘전선공작’이 있었다.”
---「여성공작원의 아픔을 아시나요?」중에서
“소주잔에 해골 가루를 넣어 마신 기간요원들은 ‘훈련생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말고 악귀처럼 가르치라’는 주문에 따라 훈련병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당시 실미도부대 교관이었던 김성진 씨의 말이다. ‘어느 날, 교육대장이 전원을 소집했다. 교육대장은 ‘김일성의 목을 딸 정도의 특수공작원을 양성하려면 교관부터 강심장이 되어야 한다’면서 소주잔에 해골 가루를 넣고 그 위에 소주를 부은 다음 한 잔씩 마시게 했다. 교육대장이 우리들을 보고 ‘너희들은 인간의 뼈를 갈아 마신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너희들은 이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니까 훈련생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말고 악귀처럼 가르치라는 주문이었죠.”
---「실미도부대의 지옥훈련」중에서
“당시 실미도는 국가폭력의 현장, 인권의 무덤, 군내 차별의 지옥, 장기 불법감금의 현장, 집단 암매장의 공동묘지였다. 민주주의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권리를 위한 마지막 저항권이 있다. 실미도 훈련병들의 탈출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국가권력의 장기간에 걸친 불법적 행사에 대해 최후의 비상수단으로 행한 저항권이다. 억울한 실미도대원들은 이제 역사에서 ‘국가유공자’요, ‘정당방위자’로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 다른 북파공작원들과 똑같이 국가유공자로 보상을 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한다. ‘실미도 사건’도 이제 ‘실미도 난동 사건’이 아니라, ‘실미도 의거’라 불러야 한다.”
---「‘실미도 난동 사건’인가, ‘실미도 의거’인가」중에서
“그동안 사형수나 무기수 등 특수 범죄자 출신 부대로 알려진 ‘실미도부대’는 실제로는 ‘선갑도부대’가 잘못 알려진 경우이다. 그런 실미도부대의 오해 때문에 오히려 선갑도부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다. 선갑도는 실미도보다도 육지에서 서남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무인도이다... 선갑도부대원들은 안양교도소에서 한꺼번에 자원 형식으로 모집됐다...대원 대부분이 군 복무 중이거나 베트남전쟁 참전 중 살인, 전시 민간인 강간 등 범죄로 1심에서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심 등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거나 15년형의 장기형을 선고받은 범법자들이다. 첩보부대 역사상 형무소에 복역 중인 기결수로 만들어진 유일한 북파공작부대였다.”
---「진짜 사형수 출신 ‘선갑도부대’의 눈물」중에서
“중앙정보부는 당시 장 씨가 집안도 좋고 결혼해 딸과 아들 등 2명의 자식을 갖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자 변절의 가능성이 적다고 보고 장기 암약 간첩의 적임자로 찍었던 것이다. 장 씨는 북파되기 전 자신의 부인 길 아무개 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의 아내요.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란 어떤 표현도 있을 수 없으니 안타깝구료. 내 마음을 몽주리 뺏어가시오, 아내요. 이 밤에 평안히 잠드기 바라며 어머니와 어린놈들을 잘 돌뵈주기 바라오.’ 장 씨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알고 있었던 듯,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그렇게 40여 년 전 휴전선을 넘어갔다. 지금 읽어도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느껴지는 북파간첩의 마지막 러브레터였다.”
---「북으로 간 ‘고정간첩’이 아내에게 남긴 러브레터」중에서
“북파공작원의 영광 뒤에 숨어 있는 어두운 면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동해안 영흥만 일대의 섬에서는 일부 북파공작원들이 납치해온 북한 여성들을 ‘한국군 위안부’로 운용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문 아무개 씨 사례처럼 납치나 강요에 의한 ‘한국군 위안부’라면 명백한 국가 성폭력이다. ‘일본군 위안부’처럼 국가가 이들에 대해 공식 사과와 함께 배상해야 할 것이다.”
---「북파공작원과 ‘한국군 위안부’」중에서
“한 북파공작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국방부도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그럴수록 국가에 대한 유가족의 의심은 커져만 갔다. 실미도부대 훈련병 ‘임성빈’의 ‘두 번의 죽음’이다...한 번 죽는 것은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두 번 죽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바로 실미도부대 임성빈이 그런 경우다. 임성빈은
어떻게 두 번 죽었는가.”
---「두 번 죽은 ‘임성빈’, 죽고도 살아 있는 ‘임성빈’」중에서
“미제의 고용간첩 《두더지》, 본명은 공인택, 이 자는 미국이 준 간첩임무를 받고 우리 측 지역에 기여들다가 경각성 높은 인민군 군인들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1968년 3월 25일 미제가 또다시 판문점 담판장에 끌려나왔다. 우리 측 수석위원의 추궁에 뒤이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탁상우에 공인택이 가지고 있던 간첩용 살인 흉기들과 정탐 장구류들이 내놓였다...미국 측
수석위원은 얼굴이 새까맣게 죽었다... 당황한 미국 측 수석위원은 《모른다》는 한마디의 말을 거듭하다가 달아나고 말았다. 판문점회의장 안팎에서 폭소가 터졌다. 조선에서 새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정탐과 적대행위를 련이어 감행하는 미제침략자들을 저주하며 내외기자들은 도망가는 미국 측 수석위원의 몰골을 련속 렌즈에 담았다. 다음날 서방신문들에는 미제의 정탐파괴행위를 고발하는 이 사건이 크게 보도되였다.”
---「북한 책자에 나오는 ‘미제 고용간첩’(북파공작원) 이야기」중에서
“북한이 남쪽에 파견한 남파공작원 6,446명 중 생포된 사람이 3,177명(49%), 사살 1,644명(26%), 자수 275명(4%), 나머지 도주 1,350명(21%)으로 나타났다. 북한에 파견한 북파공작원의 생존확률을 남파공작원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경우, 행방불명자 4,849명 가운데 자수자는 139명, 생포자는 3,786명으로 추정된다. 물론, 북한 체제상 생존확률이 훨씬 떨어진다고 해도 북파공작원 행불자 중 많은 수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북파공작원들은 죽어서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군 당국이 북파공작원에 대한 북한의 시신 인도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전협정 위반을 시인하는 것이 두려워 자국의 공작원 시신 인도도 스스로 거부하는 ‘비인도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공작원은 북한에 살아 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