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걱정으로 가득하면 머릿속도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 다. 우리는 내면의 평온을 깨뜨리는 그것이 속히 사라져주기 만을 바라기 때문에, 당장 일상의 브레이크를 밟고 내가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즉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기에(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주된 실존 형식은 걱정을 통해 세계를 찾고,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를 찾는 것이라고 말이다.
---「걱정한다는 건 최소한 외롭지 않다는 것」중에서
퇴사에 대한 고민 또한 이러한 실존적 불안의 연장선상에 있다. 퇴사 자체는 선택해도 되고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는 무거운 짐으로 변해버린다. 나 자 신 이외에, 도대체 누가 내 결정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족이나 친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조언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마지막까지 내 선택으로 남는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만 나의 결정에 대해 가족이나 친구 탓을 하지 않게 된다. 누가 무슨 말을 했든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의 결과 또한 나의 몫이다. 이러한 불안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 정도로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공포와 불안 사이에는 한 가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공포는 구체적 대상이 있어야 생기는 감정인 데 반해, 불안은 대상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일종의 의식 상태라는 것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실직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직장이 있든 없든, 누구나 삶이 왜 흔들리는지 몰라 불안해할 수 있다.
---「절대적 자유에는 절대적 책임이」중에서
퇴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직장인만의 고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맞닥뜨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 가운데 하나일 뿐 이다. 사르트르의 자유가 해방으로 느껴지든 속박으로 느껴지든, 자유와 불안은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모 든 사람의 선택을 에워싸고 있다. 인생의 방향이나 진로 때문에 방황하며 불안을 느낄 때, 불안은 인간의 자유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림자로 인해 빛의 존재를 더욱 의식하게 되는 것처럼. 퇴사를 두고 깊이 고민하는 까닭은 그것이 미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영원히 잘못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첫째, 퇴사 여부는 맞고 틀림이나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라는 문제가 따른다. 둘째, 만약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해도, 당신은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선택을 새롭게 다시 할 수 있다.
---「다시, 퇴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중에서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여러 얼굴들. 싫은 얼굴도 있고 좋아하는 얼굴도 있지만,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얼굴이 대부분이다.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다. 매일 보는 일상적인 풍경인데도 오늘따라 왠지 낯선 느낌이 밀려든다. 그래서인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다시 보게 된다. 그러고는 자신의 자리로 걸어간다. 손에 든 문서의 내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도 있고, 먹통이 된 프린터를 두드리며 욕을 퍼붓는 사람, 전화기 너머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람과 통화 중인 사람도 있다. 이렇게 죽고 사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정신없이 바쁜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의 의문부호는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드디어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앞자리의 빈 책상이 보인다. 얼마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동료의 자리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라면, 이렇게 매일 괴롭게 일은 해서 뭐 하나…….’ 여기까지 생각하는 데는 단 몇 분이 흘렀을 뿐이지만, 하루의 근로 의욕을 뚝 떨어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늘 의 새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부조리,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중에서
사실 한비자의 철학은 우리가 유가 사회 특유의 곤경에 처했을 때 균형을 찾도록 돕는 면이 있다. 성악의 세계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욕망의 세계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이기주의의 세상에서 무엇이 진실로 나에게 이익인지를 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직장에서도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협력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평소 위선군자의 사탕발림에 속아 지내다가, 그 안에 감춰진 칼에 불시에 찔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유가에서 추구하는 군자의 인격은 진실로 감탄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가짜 유가의 위선군자에 더더욱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한비자가 말하는 자기 잇속(self-interest)의 철학도 갖추고 있어야 성선을 말하며 후흑을 행하는 위선군자에게 대항할 수 있고, 직장에서도 행복과 정의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직장에 과연 도덕이 있을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