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난 지금의 내가 딱 좋아. 고치고 싶지도 않고, 고칠 수도 없어. 내가 이렇듯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고집스럽게, 다른 사람들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으니, 이런 나를 적어도 엄하게 꾸짖으며 벌을 주는 것이, 입맞춤이나 하며 음악 같은 것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보다 옳고 마땅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결코 초록 마차를 타고 다니는 집시족이 아니라, 점잖은 사람들, 크뢰거 영사의 가족들, 크뢰거 가문이니까……
--- pp.17~18
그는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처럼 일하지 않았다. 일밖에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일했다. 생활인으로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창작자로서만 주목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는, 분장을 지우고 연기하지 않는 배우가 아무런 존재감 없듯, 그림자처럼 눈에 띄지 않게 돌아 다녔다. 그는 말없이 격리되어 보이지 않게 일했으며, 예술적 재능을 사교적인 장신구쯤으로 여기는 소인배들을 한없이 경멸했다. 그들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거칠고 해진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든 맞춤 제작한 나비넥타이를 매고 사치를 일삼든, 행복하고 사랑받고 예술가풍으로 사는 것이 최고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좋은 작품은 오롯이 역경을 견디는 삶의 압박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생활인은 창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진정한 창작자가 되려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 pp.46~47
예술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초인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어, 인간적인 것과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멀고 냉담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인간적인 것을 가지고 놀고, 그것과 함께 놀며, 그것을 효과적이고 품위 있게 표현할 수 있고,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게 되죠. ― 양식과 형식, 표현을 위한 재능은 이미 인간적인 것과는 상당히 차갑고 까다로운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정말이지, 그 어떤 인간적인 메마름과 황폐함을 전제로 합니다. 어쨌든 건강하고 강한 감정에 취향이 없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예술가가 인간이 되어 뭔가를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예술가로는 끝장입니다.
--- p.54
이 도시의 몇몇 집은 고향 도시의 낡은 집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활처럼 둥글게 휘고 사다리 모양으로 층이 진 합각지붕까지 똑같았다. 이 집들 문패에서는 그가 옛날부터 익히 잘 알고 있던 이름들도 발견했다. 그 이름들은 그에게 부드럽고 귀중한 무언가를 일러주는 듯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질책, 한탄, 그리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사색에 잠긴 호흡으로 축축한 바다 공기를 마시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토니오는 어디에서나 지극히 파란 눈, 지극히 밝은 금발을 보았다. 그들 같은 유형이나 생김새는 그가 고향 도시에서 보낸, 그날 밤에 이상하게 아프도록 후회하며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넓은 거리에서 마주친 시선 하나, 단어의 울림 하나, 웃음 하나가 그의 뼛속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 p.101
리자베타, 언젠가 나를 시민이라고, 길 잃은 시민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는데, 아직도 기억하나요? 내가 전에 다른 고백을 하는 데 푹 빠져서, 나도 모르게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 사랑이라고 했을 때, 당신이 나를 그렇게 불렀죠. 그런데 그 말이 얼마나 근사하게 진실을 짚어냈는지, 얼마나 근사하게 시민성과 ‘삶’을 향한 나의 사랑이 하나이자 같은 것임을 짚어냈는지, 당신은 알고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이번 여행이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어요……
--- p.124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어요. 그 어느 세계에도 안주하지 못하여, 그래서 좀 힘이 듭니다. 당신 예술가들은 나를 시민이라고 부르고,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려고 했죠…… 어느 쪽이 내 마음을 더 쓰라리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은 어리석고, 당신 미의 숭배자들은 나를 무심하고 그리움이 없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당신들은 저 깊은 곳에서, 태어날 때부터 아예 운명적으로, 일상의 환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 어느 것보다 더 달콤하고 가장 많이 느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도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 p.125
눈을 감아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희미한 형체로 된 세계가 보여요. 그 세계는 정돈되어 다듬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한 그림자 무리도 보여요. 그 형상들은 마법을 걸어 구원해 달라고 손짓합니다. 비극적인 것, 우스꽝스러운 것, 그 둘을 다 가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 나는 이 형상들을 진짜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사랑은 금발과 파란 눈의 사람들, 밝고 활기찬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리자베타, 이 사랑을 나무라지 마세요. 이는 선하여 열매를 맺는 사랑입니다. 그 속에는 갈망이 있고, 우울한 질투와 약간의 경멸, 그리고 온전하고 순결한 축복이 있답니다.
--- pp.126~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