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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종교개혁 9개조 논제

제3 종교개혁 9개조 논제

: 한국인 교회에 대한 진단과 그 대처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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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71쪽 | 544g | 150*225*20mm
ISBN13 9791195141043
ISBN10 119514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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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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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의 신앙 유형에 대한 분석

진보진영의 실천신학자 박근원은 한국에 있어서 종교적 영성의 맥을 이어준 영성의 원목을 샤마니즘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신라의 화랑도를 발족케 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 땅에 들어온 모든 외래 종교들이 바로 그 영성의 원목에 접목이 되어 우리 민족의 종교로서 동화되어 발전되어 왔다고 일렀다.68) 이에 더하여 자유진영의 조직신학자 윤성범은 화랑정신과 한국 샤마니즘의 연구를 통하여 그 자체가 한국인의 ‘멋’이라면서, 그 밑바탕에는 한국의 샤마니즘이 있었다고 하였다.69)

그와 같이 강렬한 주체세력이 되는 샤마니즘을 두고 초지일관 부정적인 언어로 탄핵만을 일삼고 있는 한, 한국 교회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 이유는 서구 유럽의 교회들처럼 소멸되어 갈 확률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여전한 문제는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에 대한 올바른 진단을 내릴 수 있을 때만이 주도면밀한 대처 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는 현실을 간파해야 하는데 있다. 이에 먼저 확실히 해둬야 할 절대적인 명제가 있다.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가 그 어떤 신학 내지 교리를 내세워 이리저리 난도질한다 할지라도, 그 신앙은 변함없이 건재하다는 것을 포용하는 태도 지향이 바로 그 명제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 교회의 신학자들보다 오히려 불교학자 조명기의 견해가 더 학문적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정당하다.

“자문화와 타문화 간에 상호 색채를 버리고 완전히 합류(合流)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 현저한 실례를 몽고의 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불교는 몽고의 본래 문화를 수용하여 융합시킴으로 말미암아 신문화가 되는 라마를 창출하였다. 이후에 라마는 생활 전반을 아우르게 되었는 바,형식은 불교이었으나 내용은 모두 습합된 몽고문화이었다. 한국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한국 문화에 접목되어 있는 데도, 이것을 두고 금일의 두뇌로 이것은 고유한 것이니 저것은 외래의 것이니 하면서 각각의 요소를 분석하여 찾아내려고 한다. 이런 행태는 마치 누룩과 곡물을 합하여 양조한 청주(?酒)를 다시 누룩과 곡물의 원형을 분출(分出)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현재 한국 문화에 접목이 되어 하나의 문화로 형성이 된 이상, 그 모두가 다 한국인의 것이 된다. 여기에서부터 한국 문화를 새롭게 창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70)

이렇다고 할 때에, 과연 이미 한국 교회에 기층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샤마니즘적인 기복신앙과 융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학이나 교리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각각의 요소들을 색출해낼 수 있는 자신들이 있을까.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한국 교회가 생태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샤마니즘적인 기복신앙과의 혼합주의는 더 이상 거역(betray)될 수 없는 한국종교사의 필연적인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71)

이런 보편적 현상을 확인해준 이로서는 미북감리회 소속 선교사 헐버트(Homer Hurbert)가 있다. 그는 이르기를 논리적으로 보면 한국인은 수세기에 걸쳐서 모든 종교들에 두루두루 통함으로써 하나의 종교적인 혼성물을 이루어왔다고 간파하였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사회생활할 때는 유교도이고, 뭔가를 생각할 때는 불교도가 되기도 하다가 고난을 받아 정작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정령을 숭배하는 귀신숭배자(a spirit worshipper)가 된다는 것이다.72) 이렇다고 보아 그 절대적인 명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고 용인하는 순간에,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바로 그 샤마니즘적인 기복신앙은 졸지에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이에 좀 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정예전통들의 학문적인 소양으로부터 나오는 신학적인 천편일률적 사고방식 가지고는 결단코 그 애물단지를 정리할 수가 없다.

논자는 앞서 병들어 있는 종교를 치유하는 특효약으로 작용하는 종교학의 방법론(Religiological method)은 다원적인 총체적 연구를 지향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 애물단지가 되는 문제의 그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에 대한 관건은 종교사적인 방법에 이어 종교신학적인 방법 또한 동원이 되어야 해답을 얻어낼 수 있다. 종교신학이란 종교적인 전문으로서의 신학과는 달리 종교전통에 대한(about) 전문으로서 중교학적인 시각을 신학에 접목시키는 학문이다.73)

이에 따라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에 대하여 논의하는 중에, 여기에서 종교신학적 방법론을 택한 이유는 그 신앙이 변함없이 항상 한국 교회의 신학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니 만큼, 중교학적인 시각을 접목시켜 그 해답을 모색해 보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에는 죽어 가는 한국 교회를 위하여 희망의 불씨를 어떻게 해서라도 되살려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책무가 내장되어 있다. 그럼 이제부터는 주어진 주제인 ‘세 가지의 신앙 유형에 대한 분석’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항목별에 따라 논의해 보기로 한다.

(1) 기복형의 신앙

종교학에서는 모든 종교에 있어서 신앙의 유형을 기복형(magic type)과 구도형(truth-questing type)과 개혁형(eschatological type)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각 신앙의 유형은 사상적 동기와 사회적 태도를 갖고 있다. 먼저 기복형은 사상적 동기에 있어서 생존 생계에 있으며, 사회적 태도는 일률적 행동양식을 띠는 가운데 극단적 보수주의 성향으로 현상 유지를 위하여 현세적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믿음의 태도다. 이런 기복형에 대하여 한국 교회의 정예전통들은 이미 살펴본 대로 만장일치해서 부정적으로 탄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종교학은 그 시각이 전혀 다르다.

윤이흠은 이르기를 실제로 모든 종교경험은 기복동기를 갖고 있고, 이 동기가 완전히 배제된 신앙체계는 이미 종교적 신앙이 아니라 철학이나 정치사상으로 변해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74) 이렇게 종교학에서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 신앙으로 갈구하는 인간적인 생존 생계의 추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현세적 조건을 위한 총족 또한 인정하고 있다. 좀더 해제하자면, 기복형의 신앙은 두 가지의 동기를 그 안에 담고 있는 신앙체계다. 하나는 세속적 욕망을 총족시키는 동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적인 동기다. 아마도 어떤 이는 종교란 모두 그런 두 가지의 동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런 지 모른다. 맞는 이야기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성육신하시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대중들의 배고픔을 오병이어로 해결해 주었으며 각양각색의 병든자와 귀신들린 자까지도 치유해 주셨다. 그런데도 그 분은 분명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동기와는 무관한 삶을 보여 주셨다. 그 분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십자가상에서 단명도 마다하지 않은 그야말로 허망할 정도로 폭망한 참 사람(Vere homo)이었다. 그 분은 그렇게 병을 치유하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셨지만, 그것을 빌미로 삼아 어떤 경우에도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동기를 동반하지 않았다. 이는 그 분이 일체 기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75)

이처럼 주 예수님은 고전종교의 모습을 삶으로 몸소 직접 보여주셨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전종교란 교리체계와 함께 도덕 윤리적으로도 완벽한 삶이 제시되어 인간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모본을 보여주었던 성현들의 종교를 일컫는다. 여기에는 석가모니의 불교와 공자의 유교 등이 해당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련의 고전종교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기복이 있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잘 사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이 두 가지의 길은 나란히 평행선을 유지할 수도 있고, 서로 갈라질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는 잘 산다는 기준을 물질적인 풍요에다 촛점을 두고 있다. 이런 외형적인 삶의 풍요를 확보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우리의 정치계와 정부가 노력하고 투쟁해 왔던 것이다.76) 이에 따라서 한국 교회들이 공동보조를 맞추어 왔던 셈이다. 여기에 바로 문제가 있었다. 일언해서 기복신앙이란 소시민적 욕망을 추구하는 행위의 신앙이다.77) 배 부르고 등을 따뜻하게 하고 사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기본적인 생존 생계의 소시민적 욕망이다. 산업화 이전의 인간 사회에서 그 같은 소시민적 욕망이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고매한 고전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의 한국 교회가 기복신앙과 평행선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는 데도, 그것을 지금까지도 여전히 잘못 읽음으로 말미암아 기복신앙을 때려 잡겠다면서 내내 허공을 치고 있는 모양새다. 이것은 마치 한국 교회가 등에 기복신앙을 업은 채로 기필코 기복신앙을 찾아내 반드시 소멸시키고야 말겠다는 것과 흡사하다.

이에 즈음해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실이 하나 있다. 언급한 대로 교회의 구성원에는 정예전통과 대중전통이 있다고 한 바 있다. 본시 ‘대중’(Popular)이란 함석헌에 의하면 우주시대 사람의 이름으로 피플(people)이 아니라 매스(mass)에 가깝다고 하였다.78) 그래서 종교는 대중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매스는 덩어리로 살아가고 있기에 코뮤니티(Community)가 되는 셈이다. 이에 반해서 아예 탁석산은 대중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그에 의하면, 대중은 흔히 상업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에,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과 동의어처럼 쓰이고 있다고 하였다.79)

그와 같은 의미를 정리해 보자면, 교회라는 공동체에 모여 있는 신도들은 우선적으로 보아 상업성이 강하다는 말이 성립된다. 따라서 그대로 기복신앙은 상업적이란 의미에서 대입(代入)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건대, 대중전통이 생존 생계를 해결하려고 현세적 조건에 만족시키고자 상업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적인 태생적 본능이다. 이와는 다르게 정예원통은 엘리트(elite)로서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이다. 이 엘리트가 다른 영역에서는 대중이 될 수는 있겠으나, 양들의 터전이 되는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만큼은 결단코 대중이 되어서는 안된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정예전통들이 교회안에 있는 대중전통들보다 더 기복신앙에 매몰된 채, 상업적으로 온갖 신앙병폐현상들을 합병증세로 이렇게 저렇게 야기시키고 있다는데 있다. 이런 합병증세를 일으키게 하는 중병은 맘모니즘(Mammonism)이다. 그래서 도저히 묵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주 예수님은 당시 대중들에게 기복을 채워 주시기는 했으나, 정작 스스로는 어떤 경우에도 기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똑바로 상기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에 정예전통은 실천에 옮김으로써 양들인 대중전통들에게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예전통이 제3 종교개혁을 주도하는 선도적 주체세력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 영향을 받은 대중전통들도 삶의 변화를 일으켜 사회의 진정한 누룩과 소금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위(정예전통)에서 아래(대중전통)로 하강하는 종교개혁인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만큼은 결코 대중전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까닭에 제3 종교개혁이 안되고 있는 결정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정예전통에게 있는 셈이 된다.

이제까지 알아본 바,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일단은 기복신앙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태도가 요청된다. 신학은 호교론적으로 가치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학문으로서 해제작업이 필요하지만, 종교학은 종교현상에 대하여 어떤 선입주관을 제거하고 공평한 입장에 서서 가치중립적인 태도와 객관성 및 보편성을 갖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이해의 종교학이 많이 강조된다. 이에 종교학은 창조적인 해석학(creative her- meneutics)을 지향한다.80) 여기에서 이 말을 언급하는 이유는 기복신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해석학을 구축함에 있어서 일반론자(generalist)의 입장에 서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만일에 신앙인이 기복신앙에만 정체된 채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여지없이 샤만교 신자(shaman)다. 이어 그 사람이 허울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에,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굿당이고, 예배는 굿판이고, 담임 목회자는 무당이고, 내는 헌금은 굿돈이고, 병 고침 받는 것은 우환 굿이고, 감사기도를 받는 것은 추원이 되는 격이다. 이럴 수는 없다.

그 다음 단계의 신앙인 구도형으로 발돋음해야 한다. 이 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할 때는 기복신앙에서와 같이 바로 그 창조적 해석학에 따른 일련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 구도형의 사상적 동기는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자아를 완성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태도는 삶의 현존적 조건과 이상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며, 이와 더불어 고행과 극기를 통해서 엄격한 도덕생활을 감내한다. 따라서 극단적 보수주의를 취하고 있는 기복형과는 달리 구도형은 낭만적 보수주의를 취한다. 이 구도형의 다음으로 이어지는 최종 단계의 신앙으로서는 개혁형이 있다. 이 개혁형의 동기는 황금시대를 대망하는데 있다. 그 사회적인 태도로서는 현존 사회, 문화질서와 이상사회와의 괴리(gap)에 대한 각성을 치열하게 하는 열정이 있다. 그리고는 급진적(radical) 사회개혁을 부르짖는다. 여기에서는 이상과 같이 구도형과 개혁형에 대한 서두를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만 마무리하고,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설명은 각각 다음에 이어지는 별도의 항목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2) 구도형의 신앙

일단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을 받아들이기는 하되, 그 기복신앙을 넘어서는 그 다음 단계인 구도형에서 비롯되는 구도신앙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고전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징은 자아의 존재론적 각성에 있다. 이에 따라 먼저 진리의 추구를 선도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정비된 우주관과 세련된 형이상학 체계를 개발하고 그에 입각하여 인간과 자아의 의미를 추구하게 된 기독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 바, 인간 문화의 지혜의 연원은 이루고 있다. 이것은 삶의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두려움과 당혹감에 대한 자기방어적인 생존 본능에서부터 인간이 이상적 자아를 성취하려는 능동적 자아완성의 추구(quest for self-fulfillment)로 전향하게 된 것이다. 이로 본다면 존재론적 각성에는 사상적 동기로 진리의 추구와 함께 자아의 완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리하여 구도 신앙인은 최우선적으로 존재론적 각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을 성경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구원론적 기능에 이어 그 은사론적 기능(갈 5:22~23 참조)이 증대되는 성화론적인 성찰이 되겠다. 독일의 신비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인간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이기 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성찰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하였다. 그리고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의 존재양식을 일상적 경험상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으로 나누었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그 밑바탕에 뭔가 이윤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강렬하여서, 나 자신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는 주체성이 본질적으로 상존해 있다는 것이다.82) 이리하여 그런 사람은 소유에 매달려 있는 이로서 특성상 항문애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있다.83)

한편 심리학자 프로이드(Sigmund Freud) 역시 에리히 프롬과 맥을 같이하여 소유지향의 지배적 특성은 완전한 성숙기 이전에 나타나며, 그 특성은 이후의 삶에도 계속 두드러지면 그것은 병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까지 하였다.83) 환언하면 이런 사람은 소유와 점유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위인이기 때문에, 결국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며 신경증 환자라는 것이다.84) 이에 따라 구도신앙에로 성숙하지 않고, 기복신앙에만 함몰되어 있는 사람은 항문애적 성격이 우세한 자로서 그 자체가 병주머니라는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와는 달리 존재적 실존양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능동적으로 자율적이며 덕목과 화음을 도모하는 가운데 베풀고, 나누고,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85) 이런 구도형적인 신앙인이야말로 새로운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구심력이 있는 신앙인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이어가고 있는 에리히 프롬은 존재적 실존양식의 모범적인 사례를 아브라함과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찾아냈다. 즉 구약성경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떠나라, 모든 속박으로부터 너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라, 존재하라’면서 아브라함(창 12:1)을 그 사례로 들었던 것이다.86) 이어 신약성경은 소유지향적 삶에 대한 구약성경의 반론(反論)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면서, 일체의 물질적 재산을 공유하려는 자발적 소망의 공동체였던 초대 예루살렘교회(행 2:43~47, 4:32~35)를 그 사례로 들었음이다.87) 이와 같은 존재적 실존양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구도신앙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구도신앙인은 자연스럽게 진리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이때의 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4:6, 17).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로서 사랑의 영웅이며 권력 없는 영웅으로 아무것도 소유하려고 하지 않은 영웅이었다.88)

그 분은 존재의 영웅으로서 베풀고 나누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정신학자 존 B. 콥(John B. Cobb)은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차축시대적 존재를 언급하는 중에, 기독교적 존재를 사랑안에서의 자기초월적인 영적인 존재로 규정한 바 있다.89) 이로써 우리가 직시할 수 있는 것은 구도신앙인은 진리를 추구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배워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랑을 몸소 실천(praxis)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 계명(마 22:37 ~40)에 따라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순교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이 사랑은 성령의 열매(갈 5:22~23)에서 비롯된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두고 에리히 프롬은 기독교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극찬하였다.90) 이 영웅이야말로 자아를 스스로 능동적으로 자율해 완성을 위하여 뚜벅뚜벅 걸어가는 순례자(pilgrim)인 것이다.

이제는 구도신앙인의 사회적 태도에 대해서 해제해 보기로 하겠다. 진리의 추구와 함께 자아의 완성을 일궈낸 구도신앙인은 신앙발달상 이미 중생하였으며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구원의 확신이 서 있기에, 자연스럽게 눈을 외부(outside)로 돌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삶의 현존적 조건과 이상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현존적 조건이란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일컫는다. 이 삶의 정황에 대한 기복신앙인의 태도로 볼 때에, 정예전통들은 단지 교회성장주의적인 전도 대상으로만 간주하고 있으며, 대중전통들은 그저 생존 생계를 위한 경쟁의 정글(jungle)로만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도신앙인은 삶의 정황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그들이 보는 시각은 ‘민주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그 삶의 정황을 디자인한다. 여기에는 정치학과 경제학이라는 학문적인 탐색이 반드시 병행되어 있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설명하자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이고, 자유주의의 핵심가치는 시장경제와 사유화, 경쟁, 이윤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단계별 발달과정으로 보아 자유방임주의(1.0: 19세기 초~1930년대) → 수정자본주의(2.0: 1930년대~70년대) → 신자유주의(3.0: 1970년대 말~2000년대) → 공동체: 공생의 생태계(4.0: 2000년대 말)로 정리할 수 있다.91) 이로 볼 때, 우리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의 정황은 정치체제로서는 자유민주주의이고, 경제체계로서는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구도신앙인이 그리고 있는 이상(Ideal)과 조우하면서 각성할 때의 그 이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 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한 점진적 계시에 따라 진행되어온 그 발달과정은 다섯 단계로 이루어져 왔다. 즉 최초로 수립된 하나님 나라 (에덴동산의 원초상대) → 언약된 하나님 나라(아브라함) → 예표된 하나님 나라(왕조시대) → 성취된 하나님 나라(주 예수님의 초림) → 완성될 하나님 나라(주 예수님의 재림)가 그것이다.92)

이렇다면 현실적으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정황은 이미 확고히 정립되어 있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으로는 신자유주의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공생의 생태계를 지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때이고, 신앙적으로는 이미(already)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때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은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있는 순례자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에 더하여 구원의 확신을 확고히 하고 있는 구도신앙인은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93) 온갖 고행도 마다하지 않으며 극기를 통한 엄격한 도덕생활을 영위한다.
신약학자 이한수는 “윤리적인 사람이 반드시 신령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로 영성의 사람은 반드시 윤리적일 수 밖에 없다”94)고 설파하였다. 이렇다고 할 때에 오늘날에 와서 한국 교회에 그토록 많은 도덕적 불감증세를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저곳에서 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영성을 지닌 구도신앙인이 거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공동체주의자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까지도 민주사회에서 도덕적인 가치는 매우 중요한데 그런 중에도 종교인은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일갈하였다.95)

이리하여 도덕 윤리적인 생활을 감내하는 구도신앙인은 성령의 구원론적인 기능에 따라 구원의 확신을 반석위에 세운 사람으로서,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사론적 기능에 따라 성령의 열매(갈 5:22~23)도 맺은 사람이다. 이 열매는 단수 ‘칼포스’로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사랑은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8 가지의 맛을 낸다. 이 사랑을 품은 구도신앙인은 기복신앙인과는 달리 말틴 루터의 말대로 돈지갑부터 회심한 사람이기에, 존재적 실존양식으로서 아낌없이 물질을 베풀어주는 각성자다.
영국 라브리공동체 창설자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ffer)는 이렇게 말하였다.

“물질의 소유나 필요의 영역에서 생활에 필요한 요소와 관련되지 않은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과 함께 우리의 물질을 나누지 않는 사랑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96) 이어 백작 니콜라우스 루트비히(N. Ludwig)는 “한 알의 살아 있는 신앙은 한 파운드의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가치가 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한 방울의 사랑은 바다같은 과학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97)

진영논리상 사회적 태도에 있어서 구도신앙인은 - 웨슬리의 말대로 한 줄의 구슬이 기독교의 경건이 아닌 것처럼 한 줄의 의견만을 줄기차게 내세우고 있는 - 극단적 보수주의와는 달리 낭만적 보수주의를 지향한다. 이 낭만적 보수주의는 문학용어 낭만주의와 정치용어 보수주의가 합성된 정치적 개념이다. 먼저 낭만주의는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와 18세기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 일반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특히, 감성과 초월성 등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것이 후에는 시각예술과 음악 및 문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한편 보수주의는 한마디로 현상을 유지하고 변화에 반대하는 의식체계로서의 역사, 전통, 관습 및 사회질서와 그 기능을 수호하려는 정치적 태도 또는 사회적 조류라고 할 수 있다.98) 이 보수주의를 일반적으로 심리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로 대별한다. 그러나 종교학에서 낭만적 보수주의라 할 때의 그 의미에는 구체적으로 비물질적인 유물론으로 물질적인 태도를 뛰어넘자는 초월성이 내장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사고방식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도신앙인의 한계점이다. 그럼에도 초보적인 항문애적 기복신앙보다는 구도신앙 자체가 훨씬 진일보한 신앙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3) 개혁형의 신앙

16세기에 이룩한 제1 종교개혁에 근거를 두고 있고, 그 이후 18세기 제2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변함없이 항상 외쳐지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불변의 표어가 하나 있다. 이것은 “교회는 개혁되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quia reforma)는 표어가 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혁형을 영어로는 ‘Eschatological type’라고 부르는데, 이를 쉽게 풀이하면 영어 그대로 종말론적인 유형이 되겠다. 종교학에서는 개벽형이라고 번역해서 사용을 한다.

개혁형으로 제3 종교개혁자가 선도적 주체세력이 되고자 할 때는 총망라적으로 사상적 동기와 함께 사회적 태도에 대한 일련의 온갖 지식을 포섭해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융합된 지식(harmonious knowledge)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태도가 구도신앙과 다른 점이다. 이에 개혁형에 있어서 사상적 동기는 황금시대에의 희망인데, 이 황금시대에 대한 이해는 앞서 논한 바 있는 이미(already) 성취된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재림 때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따르는 중간기의 삶에 대한 분석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 작업을 전 이해(pre-understanding)로서 정리해 놓아야 문제투성이로 작동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유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하고, 공동체자본주의에로 나가는데 있어 한국 교회가 선두에 서서 모본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개혁신앙인밖에 없다.

이리하여 개혁신앙인은 사회적 태도로서 급진적(radical) 사회개혁주의 정신에 따라 현존사회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문화질서와 이상사회와의 괴리에 대한 각성을 치열하게 난 후에 로드맵(road map)을 설정하는 선두주자인 것이다. 이 로드맵을 설정해놓은 것이 바로 그 〈개혁을 위한 입문 :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한 일련의 9개조 논제〉였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개조 01 : 한국 교회 전체의 왜곡된 기복신앙에 대한 시각 교정’을 살펴보았으니, 이후에 ‘개조 02 : 반드시 재설정되어야 할 상황화신학 작업’부터 시작해서 차례차례 순서에 따라 ‘개조 09 : 새로운 시대의 제3 개혁교회’에까지 구체적으로 상세히 논의해 보기로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논의하는 접근 방법이 기존의 신학 방법론과는 - 보수, 자유, 진보진영을 막론하고 - 전혀 다르게 전개하겠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 때문에 〈개혁을 위한 입문〉의 4에서 ‘교회의 성역화와 공론적 논쟁’을 제시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의 건강한 성장, 부흥을 위하여 재차 공론적 논쟁을 기대해 본다.

아무튼 우리는 세 가지의 신앙 유형에 대한 분석을 해오면서 기복신앙과 구도신앙과 개혁신앙에 따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한국 교회의 특색은 그 세 가지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환언하면 한국 교회의 그 특색은 기복, 구도, 개혁의 세 가지 유형의 삼자관계(triadic relation)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 삼자관계는 신앙체계의 구조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99) 당연히 그 세 가지의 유형이 한국 교회안에 동시에 공존하면서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조화된 한국 교회의 모습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100)

이에 오늘날 한국 교회 전체의 심각한 문제는 온통 기복형의 신앙에만 몰입한 채, 허우적거리며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므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왜곡된 기복신앙에 대한 시각을 하루빨리 교정할 때이다. 이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안다는 주장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얕은 지식을 갖고 최고 최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경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오만이다. 이러하기에 무지와 편협한 신학 내지 교리, 일방적인 이미지, 제한적인 지적 능력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더 깊은 지식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때 희망이 보인다.101)

이제야말로 일대 방향전환이 절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교회가 경계선상에 서서 신앙은 보수주의요, 행동은 자유주의가 내장된 급진주의라는 깃발을 올릴 수 있어야만 한다.102) 이에 대한 첫걸음은 일단 기복신앙을 포용하고서 동시에 구도신앙을 거친 후에 개혁신앙으로 급기야는 개혁을 일궈내는데 있다.
--- pp.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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