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의 나이는 참으로 애매하고 어정쩡하다. 청년도 아니고 노년도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은데 그렇다고 충분히 늙지도 않았다. 살던 대로 살기에는 남은 날이 너무 많은데,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슬슬 체력과 에너지가 달린다. 그뿐인가. 매달 끔찍했던 월경량이 줄어드는 게 오히려 걱정되고, 귀찮을 정도로 많았던 머리숱이 줄어드는 걸 느끼면서 공포에 휩싸인다. 넘쳐흐르던 것들이 아쉬워진다.
---「내 나이는 슬랙일까 밴드일까」중에서
우울해서 망한 게 아니라 인생이 총체적으로 망한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여 버렸다. 망했나? 망했겠지. 안 망한 척하지만 사실은 망한 것 같은데. 걸어온 흔적들은 하나같이 한심하고, 현재는 초라하고, 미래는 막막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불안하다가, 또 어떤 날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졌다. 지금의 삶도 이만하면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이미 늦은 자의 자기합리화는 아닐까? 번듯한 집과 차를 사기는커녕 투기 열풍 사회에서 벼락거지로 전락해버린 자의 자기 세뇌는 아닐까? 40대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살아가야 하는 나이라는데, 여전히 내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일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날이 오면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 바리스타 자격증이라도 딸까? 아니야, 카페 아르바이트도 젊은 직원만 뽑던데. 10년 후쯤에 아무하고라도 결혼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면 어쩌지. 그때는 정말이지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쩌지.
---「실은 마흔앓이 중인데요」중에서
그렇게 덕질의 당사자이자 관찰자가 되면서,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다. 바로 아이돌 팬덤에서 나이 든 여성을 취급하는 방식이다. 슬프게도 정말 ‘취급’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목격한 바에 의하면 팬덤 세계에서 아줌마를 줄인 ‘줌마’는 꽤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멸칭이었다. 실제로 몇 살인지는 중요치 않다. 온라인 세상에서 내가 열다섯인지 쉰다섯인지 알게 뭔가. 정밀하게 구축된 팬덤 세계의 질서와 정서를 흩트리는, 혹은 흩트린다고 여겨지는 모두가 ‘줌마’로 불렸다. 그 세계의 가장 강력한 공격 언어였다. 심지어 어떤 팬들은 남이 후려치기 전에 먼저 나서서 자신을 ‘할미’라고 칭했다. 흔하게 떠도는 자학개그라지만 개운치가 않았다.
---「취향에도 나이가 있나요」중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 뻔한 상황에 나를 몰아넣으려 하지 않고, 가까워지지 못할 성향의 사람은 초기에 차단한다. 심지어 편의점에서 음료 하나를 살 때도 실패 확률을 줄이며 내가 좋아하는 밀크티와 탄산수를 재빠르게 고를 수 있다. 쇼핑몰에 가면 어차피 고르고 골라 처음에 입어 본 옷을 사는 나를 알기에, 초반에 대충 괜찮다 싶은 옷을 발견하면 그냥 산다. 그래야 시간과 에너지는 줄이고 만족감을 높일 수 있다. 경험이 가져다준 선물, 그러니까 나이를 먹으며 얻게 된 크나큰 성과다. 평화롭다. 이건 20대에는 결코 가질 수 없던 장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스트릿 우먼 파이터〉라는 프로그램으로 스트릿댄스 열풍이 불면서 동네 커뮤니티에서도 원데이 댄스 클래스가 열렸다. 춤이라면 소싯적에 도전해봤지. 그리고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업 신청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는 언제나 새로운 무언가를 취미로 즐기고 있는 ‘시작 천재’ 초롱 작가가 뜬금없이 스탠딩코미디를 같이 배워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공식 석상에서 자기소개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파워 내향인에 노잼 인간인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단번에 도리질을 치고 돌아섰는데 뒷맛이 어쩐지 찜찜했다. 댄스에 미련에 남았거나 은밀히 감춰둔 스탠딩코미디 열망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고, 불현듯 ‘이래서 나 요즘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나?’ 싶어져서.
---「이제는 내가 나를 너무 잘 알아서」중에서
역시 인간의 고민은 거기서 거기다. 나보다 앞서 같은 고민의 길을 걸은 사람이 남겨둔 질문이 있었다. “혼자 사는데 냉장고 어느 정도 크기가 적당할까요? 800리터는 너무 큰가요?”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아래 어느 현자가 남긴 진리의 말씀을.
“혼자 산다고 수박이 사과만 해지는 거 아니니까 큰 거 사세요.”
그 길로 고민 없이 800리터 양문형 냉장고를 주문했다. (중략)
이 땅의 딸들이 모이면 고해성사처럼 은밀히 나누는 바람이 하나 있다. 바로 엄마가 아빠보다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 아빠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여기서 ‘아무것도’는 옷을 깨끗하게 세탁하고, 정돈하고, 청소하고, 설거지 후 싱크대까지 정리하고, 한 끼를 차리기까지의 전 과정을 해내는 등의 살림력과 타인까지 돌보고 보살필 줄 아는 돌봄력이다. 혼자 남은 아빠의 집을 대신 청소하고 반찬을 해다 나르면서 옷 좀 단정하게 입어라, 먹었으면 바로 치워라, 냄새 안 나게 자주 씻어라 잔소리를 해야 하는 미래를 상상하면 결국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이기적인 바람을 갖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충격적인가? 내 딸은 설마 그런 생각할 리 없다고 믿는가? 젊어서 안 해봤다고 지금도 살림에 손 놓고 있는 전국의 아빠들은 충격을 좀 받을 필요가 있다.
---「어른의 조건」중에서
그렇게 몸을 사리게 되면서, 불현듯 어떤 감각이 떠올랐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종종 내 몸을 침범하던 낯설고 무례한 손길의 감각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불쑥 내 팔이나 몸통을 잡는 거친 손길을 만날 때가 있다. 차가 급정거하거나 흔들릴 때, 빠르게 타고 내려야 할 때, 수많은 인파에 휩쓸릴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내 몸을 기둥 삼는 노인들의 손이다. 그들을 주로 “아이고” “어어”와 같은 정체불명의 의성어로 다급함을 드러낸 후 반복되는 “아이고” “어어”로 대충 머쓱함을 표한다. 대부분 여성이기는 하나, 동성이라고 해서 허락 없이 내 몸을 침범하는 타인의 손길이 괜찮지는 않다. 매번 소스라치게 놀랐고 대체로 짜증 났다. 그런데 빙판길 하나에도 걱정의 날을 세우는 경험을 해보니, 무례한 손들의 행태가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미안함과 수치심보다는 공포가 훨씬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일 그 손이.
---「문제는 느리고 늙은 몸이 아니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