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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건축사

서울건축사

: 건축으로 읽는 629년의 사회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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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676쪽 | 1332g | 178*248*40mm
ISBN13 9788940806654
ISBN10 8940806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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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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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의 서울이 탄생한다. 조선은 1392년 역성혁명의 성공으로 건국했는데 이때에는 태조와 조선 조정이 아직 개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보통 조선이 처음부터 한양에서 건국한 것으로 알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 태조가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바꾸고 천도하게 된 것은 건국 초기 나라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경은 500년 가까이 고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왕 씨 왕족을 비롯한 기존의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세력이 아직 굳건했다. … 그러던 중 고려 때부터 남경으로 지리적 중요성을 인정받던 서울이 떠올랐고 1394년 한양을 새 도읍지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는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국사(國師)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무학대사(無學, 1327~1405)의 주장이 크게 작용했다. 일설에는 당시 풍수지리계에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무학대사는 서울 지역을 근거지로 한 파에 속해서 이 일대를 제안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로써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 탄생하게 되었다.
---「1부 제1장. “한양 천도와 태조의 건축 활동”」중에서

한양 건설은 전통시대 동아시아 도읍지의 기본 시설을 차례대로 갖추면서 진행되었다. 왕실과 국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궁궐과 종묘사직이 있어야 했다. 한양 역시 이 세 시설을 가장 먼저 지었다. 모두 1395년에 준공되었는데 종묘사직이 경복궁보다 한 달여 앞서 준공되었다. … 태조는 한양 천도를 무사히 마친 뒤 곧바로 추가 시설 건설에 나섰다. 궁궐과 종묘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시설은 문묘, 성곽, 성문, 봉수대 등이었다.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삼았기에 유학 교육기관인 문묘는 가장 먼저 지어야 할 시설 가운데 하나였다. 도시를 방어하는 성곽과 성문은 원론 차원에서 전통시대 어느 도시에서나 필수 불가결한 시설이었고 여기에는 봉수대도 포함되었다. 한양은 실제로 이런 시설들을 지어가면서 도읍지의 기본 구성을 갖추었다.
---「1부 제1장. “한양 천도와 태조의 건축 활동”」중에서

경회루는 물길을 중심 영역 옆으로 끌어내 만든 커다란 연당 가운데 서 있다. 이 물길은 금천교로 이어지는데 금천교 역시 태종이 경회루 중건과 함께 정비했던 곳이다. 이는 태종이 물길 관리에 정성을 들였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금천교로 이어진 물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궐 밖으로 나간다. 하나는 광화문 앞 육조거리 중간이고 다른 하나는 동십자각 옆이다. 현재 광화문 광장과 교보빌딩 뒤에는 이 두 물길이 복원되어 있다. 교보빌딩 뒤쪽은 ‘중학천’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가진 작은 개천이었다. 도 2-9 마지막으로 이 두 물길은 광교에서 만나 청계천의 시발점을 이룬다. … 한양도성 전체로 보면 경복궁을 나온 두 물길과 청계천은 내수를 이루고 이것이 다시 한수로 흘러 들어가 외수를 이루게 되는데 경회루는 경복궁과 도성의 ‘내수-외수’를 이어주는 끈 같은 것이 된다. 식수부터 빨래와 목욕, 나아가 뱃길 교통로에 이르기까지 물길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기에 경회루의 완성은 궁궐이 물길의 시작점이라는 선언인 동시에 실제로도 물길을 궁궐이 쥐고 있는 형국을 완성한 것이 된다. … 이상을 종합하면 북악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따라 법궁과 도읍지의 핵심 시설이 포진한 것이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근대화기를 거치면서 물줄기는 모두 복개되어 도로 아래로 사라졌지만 알고 보면 물줄기는 수도 서울을 최초로 형성한 숨은 뼈대가 되는 것이다.
---「1부 제2장. “태종과 세종의 건축 활동”」중에서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은 모두 중요해서 순서를 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으나 굳이 정해 보자면 왕릉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건축 유형이다. 자칫 정식 건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뛰어난 묘지 건축으로 조선의 왕실 건축을 대표하는 또 다른 유형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만 봐도 세계적으로 문화적 가치와 역사성을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궁궐 가운데에서도 창덕궁만 등록이 되었고 경복궁은 아직 미등록 상태인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1부 제3장. “문종 이후 ( 1 ) | 궁궐, 왕릉, 종묘, 서울 한양도성”」중에서

조선 말 개화기의 상황은 패러다임의 전환에 해당하는 큰 변화였다. 유구한 한반도 역사에서 외래문명의 유입은 여러 번 있었지만, 개화기의 변화가 가장 컸을 것이다. 두 가지 이질성이 합해진 변화여서 그러했을 텐데, 그간 접해온 외래문명은 우리와 같은 주변 동아시아권의 것이었으며 전통시대 내에서의 변화였던 데 반해 개화기에는 서양문명과 근대 산업문명이 합해진 변화가 밀려왔다. 모두 우리로서는 처음 접해보는 완전히 이질적인 문
명이었다. 이 시기를 ‘1차 전환기’라 부르고자 한다. … 건축에서도 건물의 기본 개념과 공간미학이 함께 변하는 천지개벽의 전환기였다. 향후 서울건축, 나아가 한국 건축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대변혁이었다. 외세가 한반도에 진출하고 외래문명이 밀려들어 오면서 외래 양식의 건축도 함께 들어왔다. 수도 경성은 외래 양식의 각축장이 되어 갔다.
---「2부 제5장. “1차 전환기(1880~1907) 개항과 서양 건축의 등장”」중에서

고종은 근대 문물을 도입하면서 경성을 근대적 도시로 발전시킬 계획을 실행했다. 전기 도입이 대표적인 예로, 고종은 청나라 차관으로 1885년에 ‘서울-인천-의주’의 전선을, 이어 독일의 차관으로 아예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해서 1888년에 ‘서울-부산’과 1891년에 ‘서울-원산’의 전선을 각각 완성했다. 이로써 한반도 전역을 잇는 근대적 전기통신망을 완성했다. 1887년에는 경복궁에 전등불이 켜지면서 전등이 보급되었고 1899년에는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잇는 전차가 개통되었으며 이를 위해 종로에 전신주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졌다. 이런 물리적 기반 이외에도 도시공원이 새로 조성됐다. 고종의 노력으로 탄생하여 현재까지 서울에 남아 있는 도시 인프라의 대표적인 시설은 탑골공원, 장충단, 뚝섬수원지 제1정수장 세 곳이다.
---「2부 제6장. “근대 형성기(1880~1945) 고종의 건축 활동”」중에서

일제강점기 이전 시기 한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외세는 서양 세력이었다. 서양 세력은 속한 문명권과 나라가 여럿으로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조선에 입국했다. 이들은 한양에 정착하여 그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모으고 확장했으며 이에 따라 여러 건물을 짓게 되었다. … 건축적으로도 근대 형성기에 서양 세력이 구축한 유럽 역사주의 양식은 안정적인 특징을 보이면서 이후 콘크리트의 일반 건축으로 발전할 근대적 보편성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의 배경 아래 근대기 초반 한양에 진출해서 서양 건축을 이끈 주축은 크게 공사관, 프랑스 가톨릭, 미국 개신교회와 선교사학, 영국성공회와 구세군 등 네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더하여 특정 세력에 의해 주도되지는 않았지만 서양 세력과 함께 등장한 서양식 주택도 근대 형성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2부 제7장. “근대 형성기(1880~1945) 서양 세력의 진출과 서양 역사주의 양식의 정착”」중에서

일제강점기의 식민 지배는 길고도 엄혹했으며 이에 비례해서 항일 독립운동도 치열하고 끈기 있게 진행했다. 그 갈래도 여럿이었다. 큰 방향만 봐도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투쟁, 일제 원흉의 암살, 해외에서의 외교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농민·노동자·광부 등의 무장 파업, 국내에서의 교육·문화·종교 등을 통한 자강계몽운동과 언론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등을 들 수 있다. 항일 민족건축은 이 가운데 국내 독립운동의 일부였다. … 항일 민족건축도 이런 비폭력 문화운동에 포함할 수 있다. 우리 건축을 보존하는 일은 일단 그 자체로 문화적 의미가 있다. 나아가 도시에 들어서는 건물은 그 앞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시민에게 무언의 영향을 끼치는 데다 화제성이 있는 건물이 서면 그 배경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는 등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우리 건축을 통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민족건축에 속하는 건물을 짓는 일 자체가 종교, 교육, 언론 등을 통한 문화투쟁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2부 제9장. “근대 형성기(1880~1945) 일제강점기의 항일 민족건축”」중에서

1945년, 드디어 해방이 왔다. 하지만 완전한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한반도는 연이어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해방 후의 근대 한국을 이끌 중심 세력이 없었다. … 어렵던 시절에도 서울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만한 건축 활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의미는 거시적으로 보면 우선 암울한 국가 현실에 대한 자각이 형성된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식민의 질곡을 탈피해서 지각 근대화를 만회해야 한다는 인식이 싹튼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아직 국가와 사회 전체로 확산하지는 못했지만, 일부 선도적 생각을 하는 개인들 사이에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분야별로 보면 건축에서 이런 인식이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곧 서울건축의 2차 전환기의 거시적 의미에 해당한다. 근대화라는 것이 공장을 짓고 산업을 일으키는 거시적 차원의 변화 이전에 일상생활에서 먼저 시작하는 측면이 강했으며, 이렇듯 생활의 변화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건축에서는 일찍부터 근대화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고 있었다. 건물은 개인생활과 국가산업이라는 양극의 중간 스케일에 해당하는 분야로 근대화의 실험을 먼저 감행하기에 적합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기 서울건축은 1960년대부터 전개될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저변의 토대를 먼저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전개될 급성장과 급팽창을 준비하는 심리적 동의를 가장 먼저 형성한 분야가 건축이었다.
---「2부 제10장. “2차 전환기(1945~1960) 해방공간과 1950년대”」중에서

근대 건축의 시대가 시작했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 자체가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도 피땀 어린 노력 위에 근대 건축이 조금씩 완성되어 갔다. 앞서 진행한 근대 형성기와 2차 전환기 동안 쌓은 내용을 기초로 삼아 완성기로 진입했는데, 크게 두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국제주의 양식으로 1960~1980년 기간에 진행했다. 다른 하나는 건축적 창의력을 시도하던 작가주의로 1960~1990년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두 양식이 나타났던 근대 완성기는 1960~1990년에 해당한다. … 미시적으로는 힘든 고난의 시기를 겪으면서 안전하고 위생적인 공간 환경에 대한 동경이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한 문제로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새로 자리 잡은 서구식 생활 방식과 공간 환경이 편리하고 위생적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한옥을 밀쳐내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공간 환경을 창출하는 분야가 바로 건축이었다. 1950년대는 아직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지 않았던 시기라서 서양의 근대 건축이 성장주의와 연결되기 이전이었으며 성장보다 더 근본적인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2부 제11장. “근대 완성기(1960~1990) 국제주의 양식과 고도성장의 신화”」중에서

삼일빌딩으로 상징되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고층 사무실 건물 모델의 완성은 역사적 의미가 컸다. 중소 규모 건물 중심으로 진행된 르코르뷔지에의 백색 빌라보다는 아무래도 파급 효과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당시의 서울 시민 나아가 한국민 전체에 자긍심을 심어줬다. 다수의 서울 시민들이 최초의 이른바 ‘모던 체험’을 하게 된 건물이었다. 그것도 카페 같은 서양식 실내 공간에서 하는 새로운 경험이나 생활 차원의 ‘모던’이 아니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높이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는 물리적 구조물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하는 ‘역사적 모던’이었다. 도 11-16 당시 서울 시민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이 건물을 보러 몰려들 와서 건물의 층수를 손가락 짚어가면서 확인했고 다시 머리를 젖혀 그 높이 끝과 창공을 맞춰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유리를 잡아주면서 하늘을 뚫을 듯 치솟는 가늘면서 일면 묵직한 금속 띠는 근대화의 성공 가능성을 매우 실증적으로 확신시켜주는 물리적 증거였다. 국민들은 이 건물을 보며 자긍심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2부 제11장. “근대 완성기(1960~1990) 국제주의 양식과 고도성장의 신화”」중에서

국제주의 양식이 성립됨과 동시에 서울에서도 본격적인 근대 건축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토건업이 경제성장의 핵심 분야가 되면서 건축 작품을 시도할 기회도 꾸준히 증가했다. 중간에 ‘10.26 사건-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 등 혼란기도 있었지만, 경제는 성장을 이어갔고 건축도 본격적인 작가주의의 시대에 돌입했다. 앞 장에서 소개했던 근대 건축 2세대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작가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1세대에 해당했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근대 건축을 운용하는 근대 완성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 물론 이 시기 건물들이 지금은 다소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현대기 이후의 건물들이 외관 형태나 표피 중심으로 현란한 기교에 의존하는 것과 비교하면 묵직한 작품성이 느껴지는 비교우위의 특징도 찾을 수 있다. 더하여 설계와 건설 현장에서 낮은 임금에도 몸을 던져 희생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다수 건축인의 몫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족한 기술력, 낮은 설계비, 정치 권력의 간섭, 늘 쫓기는 시간 등 모든 작업 환경이 열악했던 가운데에서도 작품의 창의성을 위한 열정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2부 제11장. “근대 완성기(1960~1990) 작가주의, 형태주의, 공간주의”」중에서

1990년은 서울의 도시건축에서 현대기가 시작한 중요한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콕 짚어서 1990년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적 시기 분류는 보통 이른바 ‘꺾어지는 큰 수’를 기준으로 하는 편이다. 실제 현상을 봐도 199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서울의 도시건축에는 이전 시기와 달라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이전까지 형태주의에 치중했다면 이 시점부터 다원주의로 부를 수 있는 다양화 경향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1990년 이전의 근대기와 비교하면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대전환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전환기’라 부를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크게 도시주의(Urbanism, 어바니즘), 다원주의 시대의 건축 순도 문제, 스키니즘과 파사디즘(Facadism), 후기산업사회와 자본주의 건축의 성장, 공공 영역과 고전의 역할 등의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모두 근대기에는 없던 새로운 현상들이며 동시에 현대 건축을 이끈 대표적인 경향들이다.
---「3부 제13장. “3차 전환기(1990~2000) 현대 다원주의를 향한 첫걸음”」중에서

도시재생이란 수명이 다한 오래된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고쳐서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공장, 창고, 산업시설 등 근대화 시절에 산업화를 담당했던 국가시설을 비롯하여 혐오시설과 방치된 시설 등이 주요 대상이다. 주로 문화시설로 많이 사용하는데 유럽에서는 1980년대부터 활발하게 진행했으며 서울은 2000년경부터 처음 시작한 이래 2010년부터 그 수가 늘며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다. … 도시 역사가 다층화되는 장점을 좀 더 살펴보자면, 멈춘 시간을 공간화한다는 점에서 도시의 역사성 측면에서도 중요성이 크다. 수명을 다한 오래된 산업시설은 일상에서 쓰임이 없어진 것이고 이는 시설이 가졌던 시간성이 화석화되었다는 뜻이다. 폐쇄된 시설을 살리는 길은 멈춘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으로, 화석화된 시간성에 생명을 불어넣어 일상의 시간으로 다시 편입시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도시 역사의 켜 하나를 새롭게 더한다. 세계 건축 전체에서 보아도 ‘시간의 공간화’ 혹은 ‘도시 기억의 공간화’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도시의 역사성을 더하는 이러한 경향이 최근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3부 제14장. “현대기(2000~) 도시주의의 탄생”」중에서

구성미는 형태주의 다음으로 근현대 서울건축 전반에서 많이 나타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형태주의와 함께 근대기의 작가주의를 대표하는 경향 가운데 하나였으며 주로 이희태가 이 경향을 이끌었다. 3차 전환기부터 앞서 13장에서 본 것과 같이 세 방향으로 분화, 발전했으며 현대기에는 다시 여섯 방향으로 한 번 더 분화, 발전했다. … 구성미는 건물의 주안점을 2차원 입면에 집중하는 경향이다. 이는 건물을 3차원 조형물로 보는 15장의 ‘건축의 기본 요소-공간, 구조, 형태’와 반대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건물을 2차원으로 본다는 것은 스킨(skin), 즉 피부나 외피에 치중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스키니즘(표피주의)’이라 부를 수 있다. 스킨이 건물에서는 입면, 곧 파사드에 해당하므로 ‘파사디즘’이라 부를 수도 있다. 이런 경향은 전형적인 후기산업사회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이다. 수많은 건물이 난립한 고밀도 도심에서 다른 건물들과 차별화하여 눈에 띄기 위한 조형 전략이란 뜻이다.
---「3부 제16장. “현대기(2000~) 구성미, 스키니즘, 포스트모더니즘”」중에서

현대기 서울건축의 소비상업 양식은 번화가 상업 지역을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규모의 업체가 다양하게 주도하고 있다. 우선 대형 백화점이 비록 아직 업체 아이콘이라 할 수준의 통일된 양식을 창출하지는 못했지만, 고급화 추세에 따라 건물 외관에도 정성을 들이면서 조금씩 상업 건축의 풍모를 자아내고 있다. 멀티플렉스라 불리는 대형 영화관도 이 흐름을 이끄는 대표 업종 가운데 하나이며 이 외에 소형 프랜차이즈 브랜드들도 컨테이너 건축을 사용하는 등 자신들의 대표 양식을 형성해가고 있다. 이 주제에서는 작품성이나 건축 양식을 논할 정도의 사례가 많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소비상업 양식의 사회적 의미 중심으로 살펴보자. 서울의 소비상업 양식은 일단 아쉬운 점이 남는다. 후기산업사회의 소비자본주의를 가장 먼저 주도한 미국에서는 건축가들이 이에 맞는 소비상업 양식을 창출하며 보조를 함께했다. 그런데 서양 건축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조차도 이런 건축 양식을 직접 수입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아마도 국민 정서와 시간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만의 소비상업 양식을 창출하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매출 압박이 심하다 보니 건축은 밀려나고 간판과 외피 조작 위주로 요란하게 눈길을 끄는 쪽으로 굳어졌다.
---「3부 제17장. “현대기(2000~) 후기산업사회와 자본이 주도하는 건축”」중에서

3차 전환기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변화가 나타났다. 사회 전체로 보면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공적 개념’, 즉 공공 영역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사회에서 근대기의 공적 개념이 공권력이었다면 현대기로 오면서 점점 ‘대국민 서비스’와 ‘시민 활동의 영역’으로 변화, 발전하는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공공 건축은 좁은 의미의 관공서 양식을 벗어나 강화된 공적 개념을 담아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해서 관공서 양식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점차 권위주의적인 신기념비주의를 벗고 일반적인 건축 흐름을 따르기 시작한 점이다.
---「3부 제18장. “현대기(2000~) 공공 영역과 고전의 역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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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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