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시장에서 일한다는 건 대개 구매자나 판매자 가운데 어느 한쪽 일을 한다는 의미일 때가 많습니다. 운 좋게도 저는 20년간 양쪽 역할을 모두 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구매자로서는 연간 약 100억 원 가까운 규모로 작품을 구매해본 것, 그리고 미술관과 기업의 관점에서 컬렉션의 방향성과 타당성을 수립하고 실현해볼 수 있었던 것이 제게 큰 경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외에도 갤러리와 미술관 전시 기획, 한국 작가의 국내외 시장 개척, 작품 판매와 프로모션까지 미술 시장에서 정말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영국, 독일, 미국 등 세계 각지의 작가를 만나러 다니고, 이들과 연결할 컬렉터를 만나고, 또 미술계를 움직이는 다양한 관계자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국제 미술계의 흐름으로 보면 제가 현장에서 뛴 최근 20년이 국제 미술계가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한 시기였습니다.
---「프롤로그 글로벌 미술 시장 NOW」중에서
작품의 가치는 특정 작가나 작품이 지닌 역사적·조형적·사회적·금전적 가치를 모두 포함하는데, 특히 역사적 가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미술 시장은 반복적인 거래를 통해 작품 가격이 올라가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 쉬운 예가 있습니다. 대단지 아파트와 단독 주택을 비교해보죠. 집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북한산 자락의 드넓은 단독 주택이 천편일률의 강남 아파트보다 훨씬 비싸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인근 편의시설이나 학군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매매가 반복되지 않아 가격이 상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독 주택 가격이 아파트 가격 상승에 미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거래 자체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모든 특성이 동일하다고 간주할 때 작품 수가 많은 작가와 적은 작가의 작품 가격 차이를 보면, 작품 수가 많은 작가의 작품 가격이 더 많이 올라가곤 합니다. 희소성이 클수록 가격이 높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차이가 있죠. 핵심은 시장을 활성화시킬 정도의 적정 수량이 존재하느냐 여부입니다. 희소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수가 너무 적으면 아예 시장 자체가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것과 대중성」중에서
2020년까지 테이트 미술관에서 흑인 여성 작가가 개인전을 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요? 사실입니다. 최근 2년 동안 작품을 전시한 여성 작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전시된 여성 작가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랍니다. 소수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지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하던 일입니다. 고흐가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고 대중의 조롱거리였던 뒤샹이 현대 미술의 아버지가 되는 변화, 인정받지 못하던 것이 어느새 주류가 되는 흐름을 우리는 흑인 여성 작가 대세론에서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린 걸까요? 1970년대 시작된 페미니즘과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이 하나로 묶여, 흑인 여성 작가가 주류로 떠오르기까지 꼬박 반백 년이 걸렸네요. 흑인 여성 작가 대세론 앞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럼 이제는 무엇이 소외되고 있을까요? … 주목을 받는 그룹 뒤편에는 그렇지 않는 그룹이 있게 마련, 중요한 것은 지금의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을 발굴하고 싶다면, 이 순간 모두가 관심을 갖는 작품보다 소외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순수 미술에 반기를: 포스트모던의 다양한 목소리들」중에서
워홀은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였고 작품도 매우 잘 팔렸지만 비평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습니다. 미술계 주변에서는 1980년대 이후 그가 작품 활동을 했는지도 의문이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워홀은 전통적인 의미의 작품보다 TV, 영화, 광고 사업 등을 했고 직접 모델로 나서기까지 했습니다. 어찌 보면 워홀은 작품보다는 1970~1980년대 미디어를 기반으로 성장한 대중 소비 사회와, 그 안에 내재된 소비와 소유의 욕구를 몸소 보여줬습니다. 뒤샹이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 체스 플레이어로서 반예술이라는 신념과 가치를 실천했다면, 워홀은 1960~1970년대의 반예술과 달라진 사회의 욕망을 직접 실천함으로써 대중매체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워홀은 작가로서 연예인이 된 ‘셀럽 아티스트’의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지도를 작품 판매와 연결시킬 줄 알았습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상류층 모임에서 어울리다 보면 굳이 작품을 사라고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자기 초상화도 그려달라는 요청을 하더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상류층과 어울리는 것이 바로 워홀의 세일즈 전략이었죠. 소비 중심의 대중문화를 배경으로 등장해 그 속성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활용한 최초의 아티스트가 바로 워홀입니다. 미술계는 워홀을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유명했습니다. 워홀의 유명세는 작품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워홀의 작품이 당대에 가장 고가에 판매된 건 아닙니다. 워홀조차 더 비싼 가격에 작품이 거래되는 다른 작가들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는군요.
---「팝아트 vs. 대중적 예술」중에서
현 시대 미술 갤러리들 중 대표적 슈퍼 갤러리는 가고시안, 페이스, 하우저&워스, 그리고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입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 세계에 지점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 지역을 넘어 다양한 지역의 작가들과 일하고, 이미 작고한 작가에서부터 젊은 작가까지 골고루 보유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은 이들이 모두 블루칩 작가들을 다룬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가고시안 갤러리는 사이 트웜블리, 데이미언 허스트, 에드 루샤, 다카시 무라카미 등의 작가를, 페이스 갤러리는 알렉산더 칼더, 빌럼 드쿠닝, 이우환 등의 작가를, 하우저&워스는 루이즈 부르주아, 폴 메카시, 신디 셔먼 등의 작가를, 그리고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는 네오 라우흐, 야요이 쿠사마, 바버라 크루거 등의 작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술 시장에서 국제적 작가로 높은 위상을 가지면서 동시에 상업성도 높은 작가를 전속하고 있는 곳이 주로 이 네 갤러리입니다.
---「블루칩 갤러리의 대명사, 가고시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