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정복하는 인생
중세 사람들은 포르투갈이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항구도시인 리스본에 있는 큰 바위에 이런 글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여기가 끝이다. 이 너머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1492년에 한 사람이 이 항구에서 작은 배에 오르면서 외쳤습니다.
“이 글은 사실이 아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저 너머엔 위대한 희망의 세계가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탐험가 콜럼버스입니다.
그 후에 콜럼버스는 사람들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넘어서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 불가능의 지역을 정해놓고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여기가 끝이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도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불가능에 매이고, 꿈 한번 꾸어보지 못한 채 자기 인생을 제한합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너머에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어두운 비관주의에 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불가능을 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정해놓은 생각의 한계, 사랑의 한계, 열정의 한계, 인내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복음으로 말미암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인생은 불가능을 정복하는 만큼 성장합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만큼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고,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 앞에 체념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무한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변화와 성장을 이루지 못합니다. 늘 자기 인생을 한탄하며 주어진 환경에 불만과 불평을 토해놓을 뿐입니다.
우리는 불가능을 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쉽고 편한 길만 찾으며 길이 없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라도 헤쳐나가며 불가능의 산을 넘어서야 합니다. 문제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생각 그 자체에 있습니다.
불가능에 매이는 사람은 ‘그래서’의 인생을 삽니다.
‘재능이 없어서, 환경이 열악해서,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피곤해서, 어려워서, 힘들어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남 탓, 환경 탓을 잘하고, 남의 노력에 얹혀살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불가능을 정복하는 사람은 ‘그러나’의 인생을 삽니다.
‘재능은 없지만, 환경이 열악하지만, 시간은 없지만, 돈은 없지만, 피곤하지만, 어렵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없지만’ 모든 것을 초월하여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진취적인 인생을 살아냅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래서’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러나’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본래 인생의 한계는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크기대로 결정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내시는 가능성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끝없는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러나’의 믿음을 소유하여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딸이 고쳐질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며 냉정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그래서’의 믿음이 아니라 ‘그러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으니 자신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셨고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막 7:24-30).
우리는 ‘그러나’의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영의 눈을 열고 영의 귀를 열어 하나님이 여시는 새 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너머의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영원 위의 영원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성령님의 권능으로 한계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대로 응답해주시고, 믿음의 크기만큼 사랑의 지경, 자유의 지경, 능력의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윌리엄 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 일을 도모하라”라고 외쳤습니다. 또 필립 브룩스는 “당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라고 말했습니다(시 81:10, 요 14:12).
독일의 루터교회 목사였던 본회퍼는 반 나치 운동을 벌이다가 1943년에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2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5년 5월에 사형당했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감옥에 갇히고 사형 언도를 당하는 순간에도 불가능을 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는 불의와 타협한 안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면서 옳은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에 속한 일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영혼 구원, 제자 양성, 세계 선교를 향해 전진하며 시간의 한계, 능력의 한계, 물질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죄성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철저히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불가능을 정복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초월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