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민에는 또 다른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다. 고통이 인간 경험의 일부라는 사실과 내가 고통받을 때 내 옆에는 고통받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네가 겪는 고통보다 더한 고통도 있어” 혹은 “너만 고통받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존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목표는 하나다. 결국, 이런 고통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것임을 깨닫는 거다. 실제 내가 고통받는다면, 나만 혼자 그런 것도 아니고, 내가 비정상이거나 예외라서 그런 것도 아니며, 내가 실패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과 같은 인간미를 공유하고 있을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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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지혜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호기심, 뒤로 물러서기, 친절, 세상과 인간과 삶에 대한 사랑 등등. 이 모든 것이 행복해지는 데 도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것은 잠이 그렇듯, 모든 감정이 그렇듯, 행복한 상태도 돌연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소환할 수도, 선언할 수도 없다. 그저 촉진할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이 찾아오는 데 필요한 조건을 다 찾아 모으면 행복이 올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뭐,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다. 지혜는 행복의 직접적 원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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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부족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의 경우, 해결책은 자신을 계속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떼어내버리는 것과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중요한 건 강박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떼어내버리는 게 아니라,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폴 발레리(Paul Valery)가 남긴 유명한 문구처럼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미워했고 나 자신을 좋아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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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기쁨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예”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런 기쁨을 대체 왜 충만이나 피상과 동일시하는 걸까? 다행히 스피노자는 기쁨이라는 정서가 인간이 더 완벽한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임을 상기시킨다. 삶이 영역을 넓힐 때마다, 내가 발전하는 순간 그 즉시 기쁨이 내 심장을 부풀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환희를 느끼는 것은 분명 자아다.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은 《제8요일》에서 ‘우리는 다른 누군가인 척, 또는 무언가를 아는 척할 때마다 우주를 이루는 기본적인 기쁨을 어두워지게 한다’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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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BC 방송에 나왔던 한 소녀가 인터뷰 때 했던 말이 종종 기억난다. “나에게 자유란 누구의 비난도 받지 않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다 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은 결국 자진해서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모든 야만적인 생각의 노예가 되겠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조금도 존중하지 않은 이 소녀의 관점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정신을 생각에 따라 표류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선택한 목적지를 향해 자유롭게 항해하는 선원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배를 암초에 좌초시킬 수도 있는 바람과 해류에 따라 표류하게 두지 않고 통제한다. 달리 말해 자유롭다는 것은 조건화에 의해 단련된 습관적 성향과 자아의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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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생각에 멈추는 순간, 그 즉시 생각의 흐름 또한 멈춘다. 이것을 우리는 집착이라 부른다.’ 명상하는 동안 정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생각과 관념이 우리를 관통하더라도, 머릿속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 같은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마음이 온통 과거에 갇혀 있거나 미래를 상상하더라도,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이것이 바로 명상의 본질인 가변성이다. 하지만 자아는 반대하고, 화내고, 경직한다. 바로 이로부터 어마어마한 고통, 저항, 거부, 불안이 생겨난다. 현실을 받아들일 것, 그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것! 이것이 우리의 도전 과제다.
--- p.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