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힐이 강조하는 대림절의 정신이란 나약하고 유한한 피조물로서 비천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원한 시선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데까지 올라서려는 기대와 희망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한 기대와 기다림이라는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힘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옭아매는 물질적, 지적, 영적 조급함과 불안함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언더힐의 글들을 모아놓은 이 묵상집은 이러한 대림절의 의미를 되새기는데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것입니다.---대한성공회 의장주교 김근상 바우로 | 머리말
“영성”이라는 단어는 언더힐이 활동했던 20세기 초보다 21세기 사회에서 훨씬 더 친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언더힐이 영적 성장에 대한 지금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선구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성”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생각과 실천을 포함하는 것과 달리, 이블린 언더힐의 작업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위대한 전통에 단단히 기초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삶이란 단어는 위험할 정도로 모호”하며 많은 사람에게 “나만의 내면에서 사는 삶”으로만 받아들여진다고 그녀는 말합니다. 언더힐에게 영성이란 인간을 만나고 변화시키기 위해 현실 세계로 들어오시는 하느님과 실재에 관한 것입니다. 기도와 성사,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삶이 그녀의 가르침과 실천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녀는 중세 신비가들, 정교회 전통, 현대 정신의학의 통찰을 자유롭게 끌어 쓰는 한편 정원을 가꾸는 일이나 음악, 등산과 같은 평범한 일상을 재료로 삼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삶의 모든 국면에 현존하시며 들어오신다고 그녀는 믿었습니다.---크리스토퍼 L. 웨버 | 편저자의 글
그리스도는 단호하게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게서 완전히 벽을 치고 하느님과 단 둘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다른 소리들이 섞여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일상은 그렇게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되지 않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삶의 일정 부분은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자기 내면의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면서 신문, 후원 중인 단체의 보고서, 결혼 앨범, 편지 뭉치들까지 움켜쥐고 들어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문 밖에 내버려 두어야만 합니다.
요지는 오직 하느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자기를 찾는 여행 따위가 아니라 그분과의 일치, 즉 그분의 생명과 사랑을 새로이 만남으로써 우리의 상처가 나을 수 있도록 그분 안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견실하게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다섯째 날 문을 닫아라
오늘날 사람들은 무력합니다. 집중력도 없습니다. 산만하고 반항적입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석하고 이해할 능력조차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발을 디디고 있어야 할 영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발을 디디고 있을 때 우리 각자의 삶은 의미를 얻고 방향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평안해집니다. 이는 눈앞에 있는 문제와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저 영원을 즐기기 위해 현실에서 물러서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궁극적인 요구에 이르기까지, 영원의 빛 안에서, 영원에 발을 딛고서, 영원에서 오는 궁극적인 안심의 차원을 의식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듯 추상적인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생생한 실재를 우리가 사로잡고,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변치 않는 그 무엇이 기회를 얻는다면, 그 끊임없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우리는 진정한 집이자 종착지인 하느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고통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불안해하거나, 흔들리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스물둘째 날 존재한다는 것
고귀함에 도달한 인간은 하느님의 방법이 지닌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단순함 앞에 자신을 스스로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두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분은 영적인 것들만 밝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만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은 황소와 당나귀, 참새와 꽃들에까지 닿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무한을 바라보면서도 난해하지 않으며, 자연적 존재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종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마태 18:4) 입니다.
삶에 관해 지나치리만큼 영리해지는 것은 별다른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때에만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는 삶은 쾌락, 갈등, 야망, 갈망, 좌절,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같은 덧없는 것들의 묶음에 불과합니다.
---마흔째 날 세상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