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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에 대하여

내 아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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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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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년 12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640쪽 | 745g | 153*224*35mm
ISBN13 9788925551685
ISBN10 892555168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고아는 완벽한 곳이었어. 그런데 당신이, 거기 살던 영국인이 자기 집에서 동네 사람한테 살해당한 기사를 읽고부터 너무 위험한 곳이 되었지. 겨우 살인 한 건으로. 뉴욕에선 그런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는 데 말이야. 불가리아는 처음에 멋모르고 갔을 때 물가가 거저나 마찬가지였고 좀 빈약하긴 해도 어쨌든 서구 세계에 속하는 곳이었어. 인터넷과 우편, 깨끗한 물도 있었지. 그런데 음식이 너무 밋밋했어. ‘음식’이 밋밋하다니. 그거야 우리가 마늘이랑 로즈메리 따위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 사이 집값이 폭등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지. 에리트레아도 그래. 거긴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었지. 자랑스러운 신생 국가, 따뜻한 사람들, 어디서든 에스프레소를 만날 수 있는 곳. 1950년대 건축양식은 또 하나의 자극제였고. 이제 에리트레아 정부는 엉망이 됐어. 당신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이겠지. 모로코는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들어했지. 기억나? 계피와 테라코타의 나라. 음식도, 풍경도 ‘밋밋하지’ 않았어. 그 정도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좀 더 있어보려고 했는데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지. 반나절만 일찍 도착했어도 임종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중략)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9?11 테러가 일어나면서 갑자기 이슬람 국가들이 전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어. 터키까지 거기 포함되었다는 건 나한텐 정말 슬픈 일이었지. 아르헨티나의 화폐 가치가 폭락했을 때 우리한테는 환상적인 기회였어. 그 전에 금융 위기에 처한 동남아에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었고. 하지만 이젠 그런 나라들도 전부 경제가 회복되어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30, 40년을 버틸 수 없게 됐어. 쿠바는 샴푸와 화장지 없이는 살 수 없어서 싫다고 했지. 크로아티아는 거주권 발급 절차가 너무 까다롭다, 케냐는 빈민가를 보면 너무 우울해진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백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미안하다. 라오스, 포르투갈, 통가, 부탄…. 이런 나라들은 뭐가 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하지만… (그의 빈정거림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신은 틀림없이 기억하겠지.”
지나치게 온화한 글리니스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프랑스를 제외시킨 건 당신이잖아.”
“그랬지. 세금 때문에 버틸 수 없을 테니까.”
“항상 돈이었어, 셰퍼드.”
--- 본문 중에서

“글리니스랑 나는 늘 빠듯하게 살았어. ‘두 번째 삶’을 위해 종잣돈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샴푸는 두 개 사면 하나 끼워주는 행사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 샀어. 화장지는 값싼 홑겹으로 열두 개들이를 사다 썼고.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도 칠면조 버거를 할인하면 그걸 사다 먹었지. 그런데 이젠 한 번에 500달러, 5천 달러씩 나가. 게다가 얼마인지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맘먹고 돈 쓰러 나온 것처럼 가격표도 없는 물건들을 카운터에 잔뜩 쌓아놓은 것 같아. 본인 부담 비율은 20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5천 달러의 가입자 우선 부담금을 낸 후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검사 비용 하나만 해도 화장지를 엄청나게 살 수 있는 돈이라고.”
(중략) 셰퍼드가 다시 말했다.
“최근에 온 청구서 더미를 해결하려면… 내가 계좌를 따로 갖고 있었잖아. 만물 수리상 넘긴 돈에서 세금 떼고 넣어놓은 거 말이야. 그건 ‘두 번째 삶’에 쓸 돈이라 손대지 않고 놔뒀거든. 그런데 우리 당좌예금으로 모자라서 그 메릴린치 계좌를 건드렸어. 그 계좌로는 한 번도 수표를 쓴 적이 없었는데. CT 검사비로 첫 101번 수표를 발행했다고.”
(중략) 잭슨은 큰 소리로 웃었다. 셰퍼드는 멍청하진 않았지만 괴로울 정도로 협조적일 수 있는 친구였다. ‘사회 의료보장 제도’의 망령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영국처럼 무상 국민 보건 서비스를 도입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의사들이 더 이상 큰돈을 긁어모으지 못할까 봐 겁이 난 미국의사협회는 이처럼 사회주의를 연상시키는 ‘사회 의료보장 제도’라는 냉전 시대 선전 구호를 날조해냈고, 그 후로 그것은 자국민들의 마음에 영원히 공포로 남았다. 천재적인 이름 붙이기 수법이었다. 슈퍼마켓들이 ‘노 프릴’ 제품 라인을 내놓은 것과 비슷했다. 그들은 완벽히 기본적인 질 좋은 제품을 아무 장식 없는 흑백 포장지에 싸서 내놓았고, 웬만한 사람들은 브랜드 제품의 절반 가격을 주고 그런 제품을 사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잭슨의 어머니는 늘 돈에 쪼들리면서도 ‘노 프릴’ 화장지를 카트에 담는 모습은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이 나라의 사십 몇 퍼센트가 메디케이드나 메디케어 혜택을 받고 있는 거 알아?”
잭슨은 이렇게 운을 뗐다. 역사를 들먹이면 셰퍼드는 늘 지루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린 ‘사회 의료보장 제도’를 원치 않네 어쩌네 떠들어대잖아. 하지만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회 의료보장 제도를 누리고 있어. 그래서 나머지 절반이 두 배의 돈을 내고 있는 거라고. 쪼다들은 몰수에 가까운… (약 일 년 전에 ‘몰수’라는 유식해 보이는 말을 알게 된 잭슨은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말을 사용하려 들었다) 엄청난 세금으로 찐드기들의 CT 검사비를 내주고 자기네 CT 검사비도 또 내는 거야. 빌어먹을.”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가 못마땅한 거야? 노인들과 빈곤층이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얘긴 아니지?”
잭슨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대사가 나올 줄 알았다. 셰퍼드는 A급 쪼다였다. 현실에 안주하며 늘 속고 사는 계급. 안타깝게도 잭슨 역시 거기에 속했다. 하지만 셰퍼드 내커는 그 계급의 마스코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잭슨이 말했다.
“그래, 그런 얘긴 아니야. 내 말은, 의료보험 가입자들은 자기가 자기 의료비를 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회사에서 들어준 귀중한 의료보험이 엄청난 사은품이라도 되는 줄 알지. 하지만 그건 공짜가 아니야! 빌어먹을 의료보험만 아니면 월급을 1만 5천 달러쯤 더 받을 수 있다는 걸 왜 모르냐고! 좆나게 슬픈 일이야.”
--- 본문 중에서

지친 글리니스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고 셰퍼드는 자신도 곧 가겠다고 했다. 아내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셰퍼드는 현관 앞 베란다로 나갔다. 어둠 때문에 그 깔끔함을 잃어버린 길 건너 골프장은 황무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춥고 맑은 날씨였다. 그는 외투도 없이 온몸으로 추위와 맞선 채, 별들 사이를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지켜보았다. 희미한 기계음이 사라지고 더 이상 빨간 미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런 다음 집안으로 들어가 문단속을 하고 살금살금 위층 서재로 올라갔다. 아직 자크의 방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으므로 서재 문을 닫았다. 책상 맨 아래 서랍에서 비행기 표를 꺼내어 폈다. 오늘 날짜가 찍혀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 장씩 문서 분쇄기에 넣었다. 그 주둥이가 꾸르륵 소리를 내며 종이를 분쇄했다. 아래쪽 통에 ‘두 번째 삶’의 조각들이 꼬불꼬불 말려 떨어졌다. 그는 신원 도용을 막으려고 그 분쇄기를 샀는데, 이제 그 기계가 자신의 예전 정체성, 예전 신원을 훔치고 있다니 기묘한 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그 사이트로 들어갔다. 이제 검색 엔진에서 자판 세 개만 누르자 자동으로 그 사이트의 주소가 떴다. ‘생존율’ 앞에서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소년 시절 화이트 산맥의 얼음 같은 물에 수영하러 들어갈 때도 그랬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풍덩 뛰어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는 화면을 내려 보았다. 끝까지 꼼꼼하게 읽은 다음 다시 한 번 읽었다. 컴퓨터를 끄고 난 후 그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숨죽여 울었다.
--- 본문 중에서

그는 끊임없이 위로가 될 만한 말을 떠올려보았다. 수술이 대성공할 거라며 아내를 안심시키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억눌렀다. 정말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짜 투시력조차 발휘할 수 없는 그는 글리니스에게 사과 주스를 과하게 가져다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젯밤의 떠들썩했던 모임이 이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늘 셰퍼드와 그의 아내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따뜻한 손길로 아내의 목을 만져주는 게 가장 효과적인 것 같았다. 지금은 몸의 시간이었다. 몸으로 소통할 시간.
셰퍼드는 자신의 생각들을 아내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 이기적인 생각으로 돌아갔지만 시간이 남아돌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빈 공간이, 숨 막히는 침묵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자신이 고대할 만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희망을 가질 만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해보았다.
--- 본문 중에서

“오래전부터 계획하신 것 있잖아요. 외국으로 나가는 거… 당분간 보류하셔야겠네요.”
셰퍼드의 옆에서 루비가 말했다.
“그쪽 식구들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생각했잖아요.”
셰퍼드가 말했다.
“백 퍼센트 이해하진 못했죠.”
루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 텐데. 모두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
“좀 ‘별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어딘가에 다른 나라가 있을 거라는 생각, 어딘가에 발할라가 있을 거라는 생각, 꼭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직업이나 완벽한 결혼 생활이 될 수도 있죠. 혹은 아이를 가질 수만 있다면 뭔가 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끌리긴 하죠. 하지만 정말 답이라는 게 있을까 싶어요. 지난달에 템플 오브 뮤직 앤드 아트에서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 공연을 봤거든요. 시골에 가게 된 세 자매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갈망하죠. 하지만 관객들은 모스크바에 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선 그들이 모스크바에 가지 못한 게 다행인 거죠. 형부도 그럴지도 몰라요. 그냥 꿈으로 갖고 계세요. 어딘가에 해결책이 있다는, 마지막 수단이 있다는 꿈으로 간직하시라고요.”
“하지만 내가 계획한 건 완전히 다른 나라예요.”
셰퍼드는 병원의 이중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나라들은 우리와 경제 규모가 달라서, 서양에선 클립 한 통 살 수 있는 돈으로 한 달 동안 생활할 수도 있어요. 바꿔 말하면 거기서 한 달 내내 일해도 여기서는 겨우 클립 한 통밖에 살 수 없는 거죠.”
--- 본문 중에서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내가 꿈꿨던 어떤 두 번째 삶은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피였어. 하지만 당신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 가고 싶지 않아 했고 난 혼자라도 떠날 심산이었지. (물론 그렇게까지 하면 당신이 날 따라오리라 생각했어.) 그때 갑자기 당신이 복막중피종인지 뭔지 하는 병에 걸렸다고 했고 우린 아무 데도 갈 수 없게 됐어. 거기다 성실하게 한평생을 살았던 당신과 나였는데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사회는 아무런 도움도 안 돼.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걸까?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진 걸까? 우리 목숨의 가치는 얼마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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