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산길을 하얀색 SUV 차량이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달려 내려간다.
--- 본문 중에서
호연은 예슬을 찾으려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허리가 많이 아프다가 아프지 않게 되었다. 곧이어 끔찍한 두통이 엄습하다가 사라졌다. 목구멍에서 느껴지던 피 맛이 가셨다. 빛나던 알두스의 섬광은 우거진 나무 그림자에 가려서인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자기 초등학교 졸업식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잠시 사귄 남자친구, 대학교 MT, 석사논문 쓰다 밤 샌 것, 교수와 싸운 기억, 망원경 너머로 본 알두스.
시야가 완전히 검어지고 더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2020년 6월 7일 오전 2시 48분, 채호연과 김예슬은 사망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보다 조금, 아주 조금 일찍.
--- p.14~15
뭔가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한 정상재 교수에게 호연이 막 되묻던 순간, 다시 회의실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의 모두가 관심 있게 바라보는 가운데 문이 열렸다. 흐트러진 셔츠 차림에 피곤해 보이는 안색의 남성이 머쓱하니 인사를 건네 왔다.
“실례합니다. 여기 천문학자 분들이 모여 계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 p.97
〈이승에 큰 난리가 난 모양이더구나.〉
먼저 운을 떼어 주신 노군께 살짝 감사하면서 시영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예…… 사실 아주 무탈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가더구나.〉
“저희 쪽에도 벌써 수십만 명이 도착했습니다.”
〈버겁지 않느냐?〉
“버겁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 p.165
내가 어쩌다 이런 데 이렇게 빠삭하냐고? 우리 어머니가 한국 계실 때부터 무당 말씀을 그렇게 잘 들으셨거든. 오죽하면 이민도 무당 말 듣고 결정하셨다니까? 미국 와서도 엘에이 코리아타운에 있는 무당이란 무당들은 다 꿰고 다니셨어. 근데 나도 그게 썩 싫지가 않더라고. 재미있잖아? 오색찬란한 옷 입고, 방울 막 흔들고. 퍼포먼스가 굉장히 에스닉Ethnic해. 게다가 가끔 되게 용하다니까. 이제부터가 본론인데, 반년 전쯤 이야기야. JPLJet Propulsion Laboratory, 제트추진연구소 다니는 윤정훈 박사랑 간만에 페이스타임 하다가 들었는데, 산호세San Jose에 아주 끝내주는 한인 무당이 산다는 게 아니겠어? 한인 무당들은 미국까지 와서도 한국에서 모시던
신을 그대로 모셔. 저기 동계올림픽 했던 평창 사는 산신도 막 섬기고 애드미럴Admiral 이순신이나 중국 장군 관우 같은 거 섬긴다고. 그런데 이분이 글쎄, 캘리포니아에서 율리시스 그랜트를 장군 신으로 모신다는 거야. 캘리포니아에서! 한국 인천에 맥아더 제독 모시는 무당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살다 살다 서부에서 그랜트를 대통령도 아니고 장군으로 모신다니까 너무 엄청나잖아?
--- p.239
“알겠습니다. 만약 저승 소멸과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면 확정적이겠습니다만…….”
“예, 그렇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는 듯이 보이는 기훈에게 정 교수가 물었지만, 기훈은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기지개를 한 번 켜더니 대답했다.
“……아닙니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우선 기록물 열람부터 해 보도록 하지요.”
--- p.324
“……따라서 이승의 신앙에 기반해서 저승이 유지될 수 있었던 시기는 짧게 잡아도 3,000년 이상으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인더스강 유역 문명의 역사는 최대 1만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니까, 지금 기록을 확인할 수 없는 민간 신앙이 그보다 한참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슬은 준비한 결론을 꺼내 놓았다.
“말씀드리려는 요지가 무엇인가 하면, 신앙이 없이도 오래전부터 이 공간이 존재했다는 가정 또한 조금 단정하기 이르지 않은가 하는 거예요.”
--- p.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