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부여는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아담한 산과 들판이 평화롭게 펼쳐진, 조용하고 살기 좋은 대한민국의 지방 가운데 하나다. 1읍 15면으로 이루어진 군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모두 엎드리면 코가 닿을 거리에 있어서 다리품만 잘 팔면 아름다운 부여를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게 경험하고 볼 수가 있다. 공간이 이러니 시간도 마찬가지다. 작고 평화로운 만큼 이곳에서는 시간도 금강의 흐름만큼이나 느리고 유유자적하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면 부여의 이 시간에 익숙해질 시간이 잠시 필요하다. 이런 부여 아래에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완전히 다른 모습의 부여가 잠자고 있다. 이름부터가 그렇다. 부여는 원래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멀리 북만주 지역을 지배했던 예맥족 국가의 이름이었다.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대 한반도 북부와 드넓은 만주를 책임졌고, 고구려와 백제가 만들어지는 뿌리가 되었다. 이런 부여의 흐름은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밀려 수도를 두 번 이전하면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고, 지금의 부여, 사비라 불렸던 백제의 세 번째 수도에까지 내려온다.
--- p.19~20
1400여 년이 지난 뒤에 모습을 드러낸 백제 금동대향로는 그간 백제 문화를 두고 오가던 말들을 단번에 무색하게 만들었다. 백제 문화는 소박하니, 인간적이니 하는 말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이 보물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앞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인데,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위의 봉황, 향로의 몸통, 용 모양 받침대다. 각각의 부분들은 서로 다른 조형성으로 만들어졌다. 우선 맨 위의 봉황은 유려하게 흐르는 곡면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다. 봉황의 몸통에서부터 긴 꼬리까지 이어지는 곡면의 흐름은 페라리 같은 최고급 자동차를 연상시킬 정도로 뛰어나다. (중략) 향로 하나를 이런 수준으로 만들었다면 다른 것들은 또 어떻게 만들었을까? 백제 금동대향로가 던져주는 남은 숙제다.
--- p.84~89
성흥산성에는 유명한 ‘인생 사진 성지’가 있다. 산성 위로 가면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이 나무는 외견상 키 22미터, 가슴 직경 125센티미터, 수령 400여 년으로 관측된다. 바로 ‘성흥산 사랑나무’다. 자연 경관과 학술적인 면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제564호로 지정되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화제의 발단은 SBS 드라마 [서동요](2006년)다. (중략) 이후 이 나무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한두 편이 아니다. [계백], [일지매], [여인의 향기], [신의], [대풍수], [육룡이 나르샤] 등등. 특히 2019년 [호텔 델루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단숨에 ‘노을 맛집’의 사진 성지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성흥산을 찾아 인생 샷을 찍으려는 젊은 청춘 남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나무는 한 그루인데 스마트폰을 이용해 반전을 시키면 하트 모양을 만들 수 있다. 인스타 감성과 인싸 문화를 중시하는 젊은이들이 줄지어 기다린다.
--- p.132~134
규암을 걷다 보면 일제 강점기의 규암백화점 건물과 정치인 김종필이 자주 머물렀다는 백마여관 등 적산가옥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그 외에 1950~1960년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건물도 상당수다. 규암은 1950년에 요정과 술집이 무려 63개나 있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물류의 중심지였다. 충남 서남부 교통의 요지이면서 서해의 배들이 규암까지 들어오는 육상과 해상의 교차점이었던 것 이다. 마을을 걷다 보면 시대감각이 흐릿해진다. 내가 걷는 이 순간이 2022년인지, 아니면 1970년대인지, 그것도 아니면 1940년대인지 헷갈린다. 규암백화점 맞은편 정원이 있는 근사한 2층 양옥집 역시 지금이 어느 시기인지 혼돈스럽게 만들었다. 어쩌면 규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힐 만하다.
--- p.223~224
충청도는 말의 억양이 낮고 속도가 느리고 / 어감이 세지 않은데 / 충청도는 말과 음식이 서로 닮았다 / 충청도 사람들은 의견을 말할때도 / 내 의견을 반만 말하고 나머지 반은 / 상대방에게 맡긴다 / 식당에 가서 메뉴를 고를때도 / “밥은 뭐먹을겨?” / 물어보면 딱 부러진 대답이 돌아오는게 아니라 / “뭐든 괜찮유~~맵지만 않음돼쥬" / 이런식이고 / "술은 뭘로 헐겨?” / “뭐든 괜찮유~~ 막걸리가 워뗘유?” / 이런식이다 / 타 지역 사람들이 볼때는 주관이 뚜렷해 보이지 / 않지만 충청도 사람들은 이것을 / 상대방에게 결정의 여지를 좀더 주려는 배려라고 / 생각을 한다 / 충청도 음식도 말과 비슷하다 / 음식의 주재료와 양념이 서로의 영역과 선을 / 넘지않고 조화를 이룬다 / 주재료보다 양념이 세지않고 양념의 주장이 강하지않아서 주재료의 맛을 받쳐주는 그야말로 양념의 역할을 할뿐이다 / 양념이 주재료의 영역을 넘어서는건 그야말로 / 충청도 식으로 ‘경우’ 가 아닌것이다 / 말도 세지않고 / 음식도 세지않고 조화를 이루는 맛!! / 그것이 충청도의 맛이고 ‘영락없는’ 부여의 맛이다
--- p.263~264
부여군에서는 굿뜨래 부여 10품이라고 이름을 짓고, 청정 자연에서 생산되는 열 가지 농산품을 선정한다. 2022년 기준 10품에는 수박, 밤, 토마토, 양송이, 멜론, 딸기, 오이, 표고버섯, 왕대추, 포도가 선정됐다. 여기서 딸기, 오이, 포도를 제외한 일곱 가지 농작물은 2021년 기준으로 국내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니, 부여군이 농업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백제의 향기가 묻어나는 고도라고만 생각했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많은 농작물이 부여에서 생산된다니 좀 생경하기도 했다. 부여 여행은 눈도 즐겁고 입도 행복한 여행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p.345~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