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우리를 하우스 메이트라고 부르기도 하고, 열 살 차가 나는 언니 동생, 때로는 선생과 제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그냥 하나의 개인들이다. (…) 내가 나이가 더 많고 더 오래 살았다고 해서 뭔가를 가르칠 입장도 아니고, 가르쳐줄 것도 없다. 나는 내 인생의 전문가라 자신하지만, 내가 살아온 방법과 깨달음은 오직 나에게만 작동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은 늘 조마조마한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들여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냥 내 멋대로 살았다.
물론 그럼에도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닮아간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따라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옆에 있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나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백배 덕분에 종종 그때의 나와 만나게 된다. 매일 변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는 백배를 보면서 ‘아니, 도대체 그게 왜 안 될까?’ 하다가도 그때의 나를 떠올려보면 확실히 백배 쪽이 여러모로 낫다.(얀니)
--- pp.17~19
물건만이 아니라 어쩌면 관계나 꿈 같은 것도 그렇지 않을까.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이어 나가는 건 늘 내가 어려워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 내가 정말 이 물건과 계속해서 함께해도 즐겁고, 그것을 위해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 속 스카프를 생각하면 설명할 순 없지만 나도 상처받는 느낌이다.(백배)
--- p.31
40대의 나를 상상해본 적 없던 것처럼, 내가 월세를 받는 집주인이 되리라고는 단연코 상상해본 적이 없다. 서른여덟, 돈 공부를 하기 전의 나는 낯선 동네와 낯선 나라를 떠돌며 사는 게 좋았다. 어째서인지 내 집보다 남의 집이 더 편할 때가 많았다. 평생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식으로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 지금 당장 행복하려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남들이 보면 그저 그런 흔한 구축 빌라로 보이겠지만, 이 작고 귀여운 집은 나에게 최고의 스위트 홈이다. 그러니 틈이 날 때마다 쓸고 닦아본다. 현관은 복이 들어오는 곳이니 쓸고 닦고, 부엌은 밥을 짓는 곳이니 쓸고 닦고. 지금 함께 있는 친구들과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하자는 마음으로 오늘도 나의 세계를 쓸고 닦아본다.(얀니)
--- p.35, 41
뒤늦게 틴더의 세계에 입성했다. 틴더는 각종 소문으로 무성했지만 차라리 솔직하고 일단 사진이 많았다. 학력이나 직업과 같은 정보 혹은 종교나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 같은 가치관보다도 몇 장의 사진이 꽤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언니에게 고맙다고 바로 카톡을 보냈다. 언니는 카톡 그만하고 대화에 집중하라고 했다.(백배)
--- p.46, 48
그러고 보면 섹스는 돈과 마찬가지로 누구 하나 제대로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다. 자라는 내내 여자는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만 교육받았다. 심지어 내가 고등학생일 땐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순결 교육을 받으며 ‘순결 캔디’를 먹기도 했다.(얀니)
--- p.58
‘틴더 관상가’라는 별명이 생기고 말았다. 틴더를 통해 누군가를 만나려고 할 때 ‘이 친구 괜찮을까요?’ 하고 물어오는 동생들이 제법 되기 때문이다. (…) 틴더가 나오기 전에도, 소개팅을 앞둔 친구들은 나에게 꼭 사진을 가져왔다. 일명 ‘얀 보살’. 신기가 있다는 건 아니고 다양한 연애 경험과 대학 시절부터 칵테일 바(bar)에서 일한 경력 덕에 남자에 관해서는 나름 빅데이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에 근거해 이 친구는 이런 성향일 것 같다고 하면 며칠 뒤 꼭 ‘대박대박’ 하며 찾아왔다.(얀니)
--- pp.79~80
내게 “아주 큰 사막으로 가자”라고 말했던 남자가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3년 가까이 끝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이불 속에서 장난을 치다가 남자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비장한 표정으로 “아주 큰 사막으로 가자”라고 말했다. 새우튀김과 함께 먹은 맥주에 취한 걸까? 나는 그 말이 너무 달콤해서 충치가 생길 지경이었다. 알싸한 로맨스에 취한 내가 “큰 사막 어디?” 하고 신나 물으니,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가자고……” 잘못 들은 게 웃겨서 우리는 또 한참을 깔깔거렸다.(얀니)
--- p.83
얀니는 최선을 다해 기억을 복기하며 최대한 자세히 말해주었다. 언니는 나에게 설명해주려다 자신도 잊고 있던 기억을 찾기도 했고, 기억을 정정하기도 했다. 본인의 생각을 바꾸기도 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그리고 어떤 사건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아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계속 흔들고 있는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또 그 시간을 통과한 언니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좀 복잡해졌다. “응응,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나 보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럼에도 ‘그러다’와 ‘어쩌다’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버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각지도 못했던 우연이, 순간의 강렬한 충동이, 평생의 꿈이,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니 착각이었던 것들이 ‘그러다’와 ‘어쩌다’를 만들었을 것이므로.(백배)
--- pp.90~91
나의 ‘공황 증상’은 앞으로는 연기만 하고 살겠다고 다짐했던 스물아홉에 나를 찾아왔다. 시작은 지하철에서였다. (…) 숨이 안 쉬어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당장 내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나의 주변에는 이미 공황 증세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드디어 나에게도’라는 심정으로 정신과에 찾아갔다. 공황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와는 ‘이제’ 그 흔한 공황이 생겼으니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백배)
--- p.106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엄마 이야기만 하면 우는 애였던 나는 여전히 울먹이지만 그래도 엄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김얀 작가’를 나에게 소개해준 이도 창간 때부터 한겨레 신문을 구독한 엄마였다. 나는 엄마로 인하여, 엄마 덕분에, 그리고 엄마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백배)
--- pp.128~129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목욕탕으로 향했다. 꼭 껴안고 함께 자던 엄마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에 울면서 일어난 기억이 난다. 우는 나를 위해 엄마는 내 머리맡에는 계란빵을, 내 볼에다가는 선명한 잇자국을 남겨두고 떠났다. 자고 있는 내가 귀여워 마구 뽀뽀를 하다 그만 아주 꽉 깨물어버리는 바람에 생긴 자국이었다. 엄마가 내게 남겨놓은 잇자국. 그건 어쩌면 엄마의 사랑의 방식이지 않았을까. 너무 사랑해서 그만 깨물어버리고 마는 것. 엄마가 내게 남긴 것들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언젠가 왜 그때 그렇게 목욕탕에 다녔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아무도 없는 유일한 공간이 목욕탕뿐이었다고 엄마는 답했다.(백배)
--- pp.130~131
가끔 엄마와 내가 한 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 로맨틱하다. 탯줄로 산소를 공급하며 같이 호흡하고 누구보다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엄마와 나. 세상의 어떤 엄마라도 아이를 배에 넣고 영양분을 양보하며 열 달의 시간을 버텨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얀니)
--- p.140
‘기버(Giver)’가 되어야 한다고 얀니는 자주 말하곤 했다. 기버. 주는 사람. 생각해보니 나는 상대에게 받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내가 뭔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늘 상대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할까 걱정하며 나는 내 감정도 검열했으니까.(백배)
--- p.172
백배와 공저로 글을 쓰면서 우리가 생각보다 더 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전에는 관심사가 같아서 잘 맞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성격이나 취향은 많이 달랐다. 특히 나는 대인 관계에서 털털하게 굴지만, 사실은 굉장히 디테일하고 꼼꼼한 편이다. 타인의 장점을 잘 찾아내는 게 나의 큰 장점이지만 그만큼 단점도 빨리 찾아내는 것이 내 단점이다. 때문에 이제껏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디테일하게 조금씩 나와 안 맞았다. 그런데 공저 작업을 하면서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단순히 공통점이 많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달라서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상호 보완적인 존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배와 함께 글을 쓰면서 알게 된 큰 깨달음이었다.(얀니)
--- p.180
얀니와 함께 보낸 지난 2년의 시간을 돌아보니 바로 내가 영향받았고, 내가 바뀌었다.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가진 편견들이 좀 깨졌고, 인간을 이해하는 폭이 좀 더 넓어졌으며,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은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현실에 발을 붙이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해서 가시나답게 해나가는 법도 언니에게 배웠다. 덕분에 주말마다 틈틈이 촬영했던 작업이 하나의 장편영화가 되었고, 친구들과 찍었던 단편영화는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이렇게 한 권의 책도 완성할 수 있게 되었고!(백배)
--- pp.193~194
매일 불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원을 비는 나를 보며 메리를 떠올린 적이 많았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모두 중독되어 있는 게 아닐까. 커피와 술에, 일과 성과에, 사랑과 희망에, 무엇보다도 끈덕지게 질긴 이 삶에.(얀니)
---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