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시간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시간이 기억을 덮으면 비 온 뒤 땅이 마르듯 시나브로 잊히기 쉽지만, 종이에 글로 써 남긴 기록은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나를 추억하는 데 쓰입니다. 오늘 노트에 남기는 몇 줄의 문장이 또 다른 나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호모 아키비스트’입니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될지도 모를 기록을 남기는 데 만년필보다 더 잘 어울리는 ‘쓸 것’이 있으려고요.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새끼손톱보다 작은 만년필 펜촉 안에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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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아주 조금씩 원형에 가까워집니다. 촉이 살아나는 모습은 제철을 맞아 터지는 꽃망울하고 비슷합니다. 며칠 관심 주지 않다가 무심결에 본 꽃봉오리가 활짝 벌어져 있듯, 펜을 조금씩 매만지다 보면 어느새 구부러진 허리를 반듯하게 편 펜촉이 눈앞에 보입니다. 긴장과 설렘으로 팽팽하던 시위가 일순간 느슨해지는 기분입니다. 누군가는 마법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요. 펜 수리는 펜하고 대화하는 과정입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 p.57
보통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시기를 ‘만년필 황금기’라 부릅니다. 초창기 만년필 업체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시장을 키웠습니다. 1950년대 상용화 단계에 진입한 볼펜은 기세가 대단해서 많은 만년필 제조업체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위기의 나날을 하루하루 살아내다 보면 늘 갈림길 앞에 서게 됩니다. 흔적도 없이 소멸하거나, 화려하게 비상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파카는 와셔 클립, 쉐퍼는 화이트 닷, 펠리칸은 부리 클립, 몽블랑은 화이트 스타를 앞세워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필기구 브랜드가 됐습니다.
--- p.61
어떤 사람에게는 펜에서 잉크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름하는 판단 기준입니다. 종이에 술술 써지면 써지는 대로, 긁으면 긁는 대로 그러려니 별생각 안 합니다. 미묘한 차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니 어쩐지 손해 보는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펜에 별다른 불만이 없어서 편하기도 하지요. 감각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작은 차이를 크게 느낍니다. 그 점 때문에 만년필은 불편한 도구이지만, 예상 못 한 기쁨도 줍니다. 작은 차이가 큰 영향을 미치는 섬세한 도구지요. 이렇게 예민한데 어떻게 쓰나 싶습니다만, 만년필은 불편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입니다. 내가 길들이는 대로 변해가는 ‘쓸 것’은 무엇하고도 맞바꿀 수 없는 즐거움을 줍니다.
--- p.96~97
“요즘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 제가 다니는 학교도 아침에 한 손에 노트북, 다른 손에 핸드폰 하나만 들고 등교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펜닥터님, 언제부터 살인을 비롯한 반인륜적이고 패륜적인 범죄가 넘쳐나서, 어지간한 사건이나 사고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하루 한 줄이라도, 연필이나 볼펜, 샤프나 수성펜 등 아무 필기도구로 하루 한 줄이라도 손글씨를 쓰는 게 일반화된 세상이더라도 똑같았을까요? 혹시……아니지 않았을까요?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나오는 굳은 지식을 전달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강연을 원했다면, 혹시나 펜닥터님이 강연 도중에 머릿속이 하얘져 시간을 망치면 어쩌나 걱정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저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도 구시대 유물이라 생각하는 만년필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고장난 그 펜을 어떻게든 살려내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 p.198
빈티지 만년필을 손보기가 요즘 만년필보다 까다로운 이유는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부속이 삭은 탓에 분해하다가 부서지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막상 힘들게 열어 보니 꼭 부속을 교체해야 하는 때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노년기에 접어든 펜이지요. 부속을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입니다.
--- p.214
분해하느라 정상 범위를 넘어선 힘을 주게 되고, 그 과정에서 피드가 부러지거나 멀쩡한 펜촉이 휘기도 합니다. 제때 하면 그리 고되지 않을 일인데, 때를 놓치면 몇 배 애를 써도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만년필만 그럴까요? 만년필 관리는 마음 다스리기하고 닮았습니다. 펜촉과 피드를 분해하니 잉크가 콜타르처럼 끈적한 반고체가 돼 구석구석 촘촘히 엉겨 있습니다. 물에 담그면 겉에 묻은 잉크는 술술 풀어지지만, 피드 콤 사이사이 박힌 찌꺼기는 요지부동입니다. 이럴 때는 부드러운 브러시로 살살 털어내고, 펜촉은 물에 적신 면봉으로 닦으면 효과적입니다. 충분히 제거한 다음 다시 물에 담그기를 반복해서 물기가 닿아도 잉크 잔여물이 나오지 않는 상태가 돼야 합니다.
--- p.242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영국 유학 시절 오노토 만년필을 즐겨 썼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을 쓴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콘클린의 광고 모델로 활동했지요. 요즘은 디지털 디바이스에 연결된 키보드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지만, 여전히 손글씨를 고수하는 아날로그 애호가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해도, 손에 잉크를 묻힌 채 종이 위를 사각거리며 내달리는 만년필의 필기감을 좋아하는 이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