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로,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난장판이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을 멀리하지도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았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에너지가 부족해 보였다. 그들은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외면하지도 않으면서 중립지대에서 살려 했다. 이렇게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반응하지 않아도 되고 그분을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 회색빛 완충지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 더 멸망으로 빠져드는 악순환 속에 있었다. 말라기서는 그러한 상황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효과적인 치료책이다.
---「서론」중에서
우리가 성경에 집중하는 까닭은 비밀스러운 성경 숭배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 지식이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알고 신뢰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존 던(John Donne)이 설교했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이고 교회는 그분의 메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임스 스마트(James Smart)가 썼듯이 “…성경이 없으면 기억된 그리스도는 상상으로 만들어 낸 그리스도, 예배자들의 광신과 무의식적인 욕구로 [빚어낸 그리스도]가 된다.”
---「1장 야웨의 말씀」중에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백성의 중요한 죄는 우상숭배, 다른 신들에게 돌아섬으로써 그들의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려고 했을 때 저지른 죄가 바로 우상숭배였다. 그 우상숭배의 죄로 말미암아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했고 앗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으며, 남왕국 유다 역시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갔다. 마치 그 포로 생활이 가장 역겨운 우상숭배의 죄를 치료한 것처럼 보인다. 불행히도 이곳 말라기에서 그들은 또 다른 죄를 찾았다. 그들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과 거리를 둘 수 있었고, 그분의 사랑, 행동, 말씀을 의심할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만큼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2절)라고 해롭고 폭로적인 질문을 할 정도의 용기만 있었다.
---「2장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중에서
만약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치르는 희생으로 그것을 대체한다면, 오늘날 세상에서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라 생각한다면, 그 희생 제사를 부끄러워한다면,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기를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다. 만약 계속 우리 죄를 고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다. 계속 뻔뻔스럽게 죄를 짓는다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다.
---「3장 나를 멸시하지 말라」중에서
말라기는 야웨를 섬기는 이들」중에서도 제사장들의 마음 중심에 있어야 할 태도, 곧 자기를 계시하시고 성전에 임재하시는 야웨의 이름을 경외하는 태도에 주목했다.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5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오류는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6절).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경외하는 이런 태도는 화평함으로 이어지고 화평함은 효과적인 사역으로 이어진다.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6절).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인 제사장은 야웨의 사자였다(말라기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4장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중에서
인간 본성의 가장 슬픈 특징 중 하나는, 어떤 멋진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수준으로 떨어뜨리려는 유혹을 받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주 귀한 건물이나 특별한 장소에 우리 이름을 새긴다. 유명 인사들의 쓰레기 같은 면을 읽고 싶어 한다. 마땅한 노력이 필요한 문제들을 단순화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작 우리는 상실을 경험한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이와 똑같이 행동하려는 위험에 빠진다.
---「5장 거짓을 행하지 말라」중에서
두 번째로,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서로에게 말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평했지만, 그들 마음에 있었던 것이나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시편에는 개인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내용들, 또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심, 또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들에 대한 많은 질문이 담겨 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소리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불평과 질문을 아뢰는 것을 언짢아하지 않으시지만, 그분에 관해서 우리가 하는 불평들은 괴로워하신다.
---「6장 나를 괴롭히지 말라」중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이 변덕스럽고 믿을 만하지 않다고 비난했다(2:17). 그들은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다 보니, 부적절한 희생 제물, 부적절한 사역, 신실하지 못한 결혼 생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불신, 공동체 내에서의 전반적인 불의가 만연한 삶으로 대응했다. 1:1-3:5에서 우리가 본 내용은 이런 것을 다루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탓한다. 하나님을 탓하고, 자신들이 그분을 괴롭게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나님을 탓하고,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탓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1, 1:6-7, 2:17에서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거부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신다. 우리는 이 책에서 그 모습이 익숙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모습을 본다.
---「7장 내게로 돌아오라, 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중에서
이 야웨를 대적한 “완악한 말”(13절)은 2:17의 야웨를 괴롭힌 말의 더 심각한 형태로 보인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분명 2장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3장의 더 가혹한 경고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끈질기게 하나님에 대해 악의적이고 명예를 훼손하는 험담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13절)한 것이다. 다시 2:17에서처럼, 그들은 야웨께 직접 말하지 않고 그분에 관한 거짓말을 퍼뜨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하는 말의 분명한 연관성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둘을 연결시키지도 못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상기시키신다.
---「8장 마지막 말씀」중에서